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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수련한 축구선수-19화 (19/173)

< 확실하게 하자 (3) >

숙제는 뒤로하고, 일단은 멋대로 뛰라고 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그럼 이제 굳이 오른쪽에 박혀 있지 않아도 된다는 뜻.

'수금하러 가볼까.'

하프 라인 아래에서 공을 돌리며 기회를 살피고 있는 동료들.

도훈은 그 공을 받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

사실 도훈이 숙제에 대해 생각해보며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동료들이 나와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실력차가 나는 건 상대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동료들과 자신의 실력차이도 그만큼 나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까, 그들의 패스 실력 역시 도훈이 생각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

조금 귀찮긴 하지만, 동료들이 주기 쉽게 몸소 움직여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들이 쉬운 패스를 할 수 있도록.

"헤이!"

공에 가까이 다가가 공을 달라고 외치는 도훈.

그런 도훈을 발견한 이보타가 패스를 건네려다,

"..."

멈칫하더니 패스를 주지 않고 백 패스로 경로를 바꾸었다.

젠장.

아직도인가?

공만 주면 된다는 걸 한 번 보여줬건만, 부족하다 이건가?

이해할 수 없었다.

도훈은 곧바로 따져 물었다.

"달라니까. 왜 안주는건데?"

그러자 이보타도 맞대응.

"뒤에 수비가 붙고 있는데 어떻게 주란 말이야?"

이보타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는 도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공을 받은 뒤 제쳐내면 그만이거늘.

'그래, 그게 상식이긴 하지.'

하지만 도훈은 잠시 숨을 고른 뒤, 그것 조차 이해해주기로 했다.

도훈에게 수비 하나쯤 제쳐내는 일이야 일도 아니지만, 그들에겐 아니니까.

수비 하나가 붙으면 패스를 주지 않는 게 그들의 상식일 수 있었다.

좋다. 이해해주자.

그럼, 아예 수비가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는거다.

'참, 이것도 힘든 일이군.'

과연 축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닌 것인가.

동료들의 수준에 맞춰주는 것도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도훈.

'어디보자.'

도훈은 주변을 살폈다.

상대 수비가 없는 곳.

그 곳에 가서 공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녀석은 뭐야?'

그러고 보니 거슬리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바로, 상대 8번.

아까부터 느낌이 이상하긴 했는데, 빈 곳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자신이 어딜가든 따라오고 있었다.

'나만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구만.'

도훈은 속으로 웃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건 역시 동료들보다 적인가.

다음부턴 확실하게 하자느니 뭐니 하는 얼 빠진 녀석보다, 한 번의 일격을 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전담을 붙인 상대에게 박수를.

하지만 물론,

'충분하진 않아.'

그들도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리진 못한 모양이다.

전담을 고작 '한 명' 붙였을 뿐이니까.

'날 귀찮게 하는 거라면 성공이야.'

어쨌든 녀석의 존재로 인해 귀찮아진 것은 맞았다.

녀석이 그림자처럼 찰싹 달라붙어 다니니까, 또 다시 패스가 오고 있지 않았다.

공을 가진 동료들은 한번씩 도훈을 보긴 했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돌리며 다른 쪽으로 패스를 했고.

결국 이 녀석이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게 문제.

지금 이 상태에서 공을 받는다해도 도훈으로선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동료들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으니.

'어차피 어딜가도 쫓아오니, 순간적으로 떼놓는 수밖에 없어.'

녀석을 달고 우리 편 골대까지 갈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접은 도훈.

어차피 녀석은 어딜 가도 쫓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녀석을 떼놓는 방법은 하나뿐.

바로 순간적으로 거리를 벌려 놓고, 그 틈에 재빨리 패스를 받는 것.

'공도 없이 페인팅이라니.'

발 밑에 공은 없다.

하지만, 도훈은 상대를 속여야 했다.

그래야 공을 받을 수 있으니까.

나름 재밌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

휙-

타타탓-!

동료들의 패스 흐름을 살피며 천천히 걷다가, 순간적으로 거머리같은 녀석의 반대쪽으로 뛰며 거리를 벌리는 도훈.

"헤이!"

그리고 공을 달라고 소리쳤다.

이젠 좀 줘라.

파아앙-

그리고, 드디어 왔다.

그렇게 기다리던 패스가.

결국 원하던 공을 받아 돌아서는 도훈.

그 순간, 도훈은 비급 공부를 하던 옛 시절의 느낌이 번뜩 떠올랐다.

비급 한 장을 깨우쳤을 때, 머릿속에 번개가 스쳐지나가는 그 느낌.

그 느낌을 지금 받은 것이었다.

그건,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었다.

그 깨달음은 바로 이것이었고.

'공이 없을 때에도 공을 가진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동굴에선 배울 수 없었던 것이었다.

숙제의 정답이 이것이었나.

도훈은 피식 웃었다.

과연, 그것이었다면 말이 된다.

전반 10분 동안 패스를 받지 못한 이유.

생각해보면, 자신은 오른쪽에 서서 별 다른 움직임을 가져가지 않았다.

그저 패스가 오길 기다렸을 뿐.

하지만, 그렇게 서있기만 했다면 과연 패스를 오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

패스를 안한 게 아니라, 못한 것.

그런 것이었나.

"넌 어쩔거냐, 거머리."

공을 잡은 채 자신의 전담 마크인 상대를 바라보는 도훈.

숙제도 풀었겠다, 이젠 다시 놀아볼까.

거머리가 거머리답게 달려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

툭, 툭-!

뻗어오는 발을 피해내는 도훈.

그리고 곧바로,

타타탓-!

앞으로 튕겨나가듯 달려나가기 시작.

그리고 둘의 거리를 순식간에 벌어지기 시작했고,

"마, 막아!"

셀틱의 수비진에 다시 한 번 비상이 걸렸다.

전방을 향해 달려가며 생각하는 도훈.

'저 면상, 거슬려.'

마티니는 역시나 박스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자기에게 패스를 바치라는 것처럼.

정말 거슬리는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확실하게라.'

녀석이 확신하지 못한다면, 확신을 주자.

도훈은 그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단순하게 골을 넣을 생각이 없었다.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만한 골을 넣을 생각이었다.

파아앙-

"...?"

치고 달리던 도훈이 갑자기 속도를 줄이더니, 갑자기 제 자리에 멈춰섰다.

그 위치가 하프라인을 조금 넘은, 경기장의 한 가운데.

그 안의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도훈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더니,

까닥까닥.

"...!"

광역 도발을 시전했다.

드루와, 드루와.

그 도발에 셀틱의 어린 선수들이 홀린 듯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마치 액션 영화의 전형적인 한 장면처럼, 셀틱 선수들이 한 명씩 도훈에게 달려 들었다.

그러나 그 셋은, 도훈이 가진 공을 전혀 건드리지 못했다.

마치 꼬맹이들과 놀아주는 것처럼 세 명 사이에서 공을 빼앗기지 않는 도훈.

보다 못한 네 명째 상대가 수비에 가세했을 때,

파아앙-!

도훈이 그 사이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공은, 마치 주인을 따라가듯 셀틱 선수들의 머리 위를 지나치며 도훈에게 향했다.

도훈이 뒷꿈치로 공을 튕겨 올리며 셀틱 선수들 사이를 빠져나온 것이었다.

"저게 무슨..!"

말도 안되는 상황.

셀틱의 벤치는 물론, 밀란의 벤치마저 또 다시 당황.

그 상황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건 알베르토 감독뿐이었다.

'똑똑히 보라구.'

네 명을 허수아비로 만든 뒤, 다시 전방으로 달려가는 도훈.

마티니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황당함과 어처구니 없음,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

희한하게 위치선정은 참 좋다니까.

이렇게 멀리서도 면상이 잘 보이니.

"거시기 조심!"

도훈이 다시금 오른발을 크게 당겼다.

그리고,

뻐어어엉-!

묵직하게 임팩트.

슈우우웅-

그 슈팅은 또 다시 마티니에게로 향하고 있었고, 골키퍼가 가장 막기 힘들다는 애매한 높이로 쏘아져 나가는 슈팅에 마타니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휘이익-!

자신의 중요부위를 향해온 슈팅에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공을 피해내는 마티니.

땅볼이나 가슴높이라면 피하지 못할 것 같아 목숨을 걸고 피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 쪽을 겨냥해 슈팅을 때린 도훈이었다.

그리고 그 동작은 의도치않게 골키퍼를 속이는 팀플레이가 되었고, 골키퍼는 반응 조차 하지 못했다.

슈우우웅-

철썩-!

도훈의 두 번째 골이 골망을 흔드는 순간이었다.

그 골은, 마티니의 입을 틀어 막는 골이었다.

마티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것보다 '확실한' 골은 없었으니까.

'말이 안 돼..'

어이가 없었다.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대단한데, 너!"

"멋진 슈팅이었다!"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도훈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은 소외된 채.

언제나 주인공은 자신이었다.

축구를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줄곧.

이 곳의 왕은 자신이란 말이었다.

마티니는 스스로라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도훈에게 말을 할 수는 없었고.

“왼쪽!”

동료, 이보타가 공을 잡자 직접 패스 방향을 가리켜주는 마티니.

필드 위에서 마티니의 입김은 쌨다.

주장이고, 에이스니까.

뿐만 아니라 이 나이때에선 무시할 수 없는 드레싱룸에서의 완력 또한 강하다.

때문에 이런 커맨더의 역할도 해왔던게 마티니.

마티니는 자신의 권위를 확인해 기분을 가라 앉히고 싶었다.

그러나,

파아앙-!

마티니는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들렸을텐데?

이보타는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

도훈에게 패스를 하고 있었다.

"..젠장!"

마티니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젠 동료들도 느끼고 있었으니까.

단 두 번의 골로, 누가 에이스인지.

“굿 패스!”

도훈의 외침에 그저 발밑으로 전해준 패스일 뿐인데 이보타의 가슴이 설렜다.

"삐익, 삐이익-!"

전반전이 끝이 났다.

스코어는 3대0.

전반이 끝나기 전, 도훈은 기어코 한 골을 더 집어 넣었다.

헤트트릭.

그 세 번째 골 역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완벽한 골이었고.

그리고 후반이 시작된 후, 10분쯤 지났을 때.

"선수 교체!"

도훈은 벤치로 불러 들여졌다.

도훈은 어리둥절했다.

자신을 교체로 뺀다니?

이해할 수 없는 결정.

하지만 벤치로 돌아온 도훈의 어깨를 감싸며 알베르토 감독은 이야기했다.

"결승전 준비하자. 지금 모든 걸 다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

이미 보여준 건 충분했다.

그러나, 도훈은 더 보여줄 수 있었다.

알베르토 감독도 그런 도훈의 능력을 알아보고 있었고.

때문에 오히려 감추고 싶었다.

결승전 전까지는.

"알겠습니다."

"숙제에 대한 답은 굳이 듣지 않겠네. 이미 잘 이해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

알베르토 감독과 도훈은 함께 미소를 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악수를 나누는 선수들.

최종 스코어 4대1.

AC밀란 프리마베라팀이 셀틱 유스를 꺾고 유에파 유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하는 순간.

밀란이 승리의 기쁨을 자축하고 있는 때에, 관중석의 한 남자가 다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예, 감독님. 접니다."

허 고문의 지시를 받고 도훈을 보러 왔었던 바로 그 코치.

코치는 지금 한국이 낮인지 밤인지 신경쓸 겨를도 없이 곧바로 김학범 감독에게 전화를 건 참이었다.

"그, 부총재님이 말씀하셨던 그 친구 있지 않습니까. 백도훈이라는 친구."

-그런데?

"지금 막 경기를 다 본 참입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건데.."

코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뽑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부총재님이 말씀하셔서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이 친구는.. 뽑으셔야 합니다."

정말 진지한 코치의 목소리.

수화기 너머엔 잠시 침묵이 돌았다.

-근데...

"예, 압니다. 말도 안되죠. 감독님의 생각도 당연히 알고 있고요.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셨으니 제 말도 황당하게 들리실 겁니다."

선수 명단의 결정은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당연히 아니다.

총책임권자는 김학범 감독.

김 감독의 철학 중 하나는, 자신이 직접 지도해보고 눈으로 보지 않은 선수는 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코치도 그걸 물론 알고 있었고.

그러나, 코치는 다시 한 번 감히 말했다.

"보지 못하셨으니 안뽑겠다 하시면, 정말 감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탈리아로 오시죠. 오셔서 직접 보십쇼."

-...

"뽑으셔야 합니다."

코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 확실하게 하자 (3)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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