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18화 (18/173)
  • < 확실하게 하자 (2) >

    "부총재님이 시키시니까 오긴 했다만.."

    좁은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초로의 한국인 남성 둘.

    이들은 오늘 백도훈이라는 한국인 소년의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들은 백도훈이라는 선수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다.

    그저 누군가 시켜서 영문도 모른 채 이 곳에 온 것 뿐.

    "뭐, 부총재님이 허튼 말 하시는 분은 아니잖아요."

    "일단 보자고, 뭐.."

    이들은 바로 2020 도쿄 올림픽을 준비 중인 김학범호 사단의 코치들.

    아직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들의 최종 명단이 정해지지 않은 시점에서, 세리에에서 뛰고 있는 이승우의 리그 마지막 경기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에 출장을 와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 경기를 지켜본 뒤 잠시 업무 외의 시간을 보내려 했으나, 허정무 부총재에게 전화가 온 건 그 때였다.

    "백도훈이라는 친구가 밀란 유스에 있어. 이번에 경기에 나온다고 하는데, 꼭 가서 보길 바란다. 꼭."

    허정무는 이번 올림픽호의 기술 고문.

    애초에 사소한 부탁도 무시할 수 없는 분이건만, 허 고문은 꼭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면서 도훈을 직접 보고 올 것을 당부했다.

    때문에 이들이 아무런 정보도 없이 백도훈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이 경기장을 찾은 것.

    아직까지도 왜 이 시합을 보고 있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는 표정들이나, 일단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한 명 더 붙어!”

    “9번 막아!”

    AC 밀란의 유스, 프리마베라 팀은 꽤나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현재 1군보다 더 큰 기대를 받고 있는 것이 이 세대들로, 그 기대에 걸맞게 이렇게 유스리그 4강에 진출했고.

    “마티니? 밀란에서 프랜차이즈 스타로 키우는 친구야. 이탈리아를 대표할 원 톱으로 키워질 녀석이라고.”

    그 중심에는 조르지오 마티니가 있었다.

    밀라노에서 태어나, 7살때부터 밀란 유스팀에서 축구를 시작했던 조르지오 마티니.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던 마티니는 청소년기를 거치며 체격도 커졌고, 수려한 외모까지 가지게 되었다.

    여러모로 스타성을 가진 녀석이었다.

    키 크고 잘 생긴 백인에 이탈리아 순혈인 밀란 홈 그로운 공격수.

    조르지오 마티니는 이탈리아 공격수의 계보를 이을 남자였다.

    그런 마티니가 있는 밀란의 공격 전술은 매우 단순했다.

    모든 찬스와 패스를 마티니에게 몰빵.

    마티니는 이 팀에서 마치 이름이 호로 시작하는 모 선수같은 위치였다.

    거의 모든 최종 패스가 마티니에게 향했고, 마티니는 무조건 슈팅으로 기회를 마무리했다.

    그만큼 마티니가 전술의 핵심, 아니 모든 것이라고 봐야할 정도.

    마티니는 그러한 전술 속에서, 이번 시즌 27경기에 나서 23득점을 올리는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

    파아앙-!

    오늘 경기 초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방법은 다양했다.

    수비에서 한 번에 찔러 주거나, 미드필더를 거쳐 가거나, 왼쪽에서 크로스를 올리거나.

    하지만 그 과정의 마지막엔 언제나 마티니가 있었다.

    심지어는 슈팅을 때릴만한 상황에서도 마티니의 위치를 찾는 녀석까지 있을 정도.

    도훈의 눈엔 그게 보이고 있었다.

    뻐어어엉-!

    슈우우웅-

    "아오!"

    경기 시작 10분이 채 되지 않아 네 번째 슈팅을 날려 먹고 마는 마티니.

    '이 정도로 몰아주는거면 23골이 아니라 50골은 넣었어야지.'

    이미 말했듯 마티니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망한 공격수.

    하지만, 문제는 그런 마티니조차 도훈의 눈에는 애송이 중의 애송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당연히 지금같은 공격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10분이 다되도록 자신에게 패스 한 번이 오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고.

    '신삥이라 이거지.'

    정말로 단 한 번도 패스가 오지 않고 있었다.

    반대편의 녀석에겐 잘도 패스를 하면서.

    익숙한 얼굴들끼리만 공을 주고 받겠다, 라는 걸로 밖엔 도훈은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더 이상은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공이 안 온다면, 찾아 가야지.

    “어이, 어디가?”

    어디 가긴. 공 받으러 간다 임마.

    자신의 눈앞을 지나치는 도훈을 보며 공격형 미드필더 이보타는 어리둥절.

    오른쪽 사이드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도훈이 자리를 이탈하고 중앙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왼쪽 사이드까지 침범하는 도훈.

    “뭐 하는 거야!”

    “여기!”

    경기장 밖에서 자리를 지키라는 코치의 외침이 들려온 듯 했으나, 도훈은 무시하며 공을 달라고 소리쳤다.

    뭐, 코치에게 혼날 건 걱정하지 않았다.

    이 다음부턴 코치도 할 말이 없어질 테니까.

    파아앙-

    도훈의 목소리에 엉겁결에 패스를 건네는 미드필더 오셀로.

    그러나 자신이 내줘놓고 그곳에 낯선 얼굴이 있자 오셀로도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가 여기서 왜 나와?'

    분명 저 녀석은 오른쪽에 있어야 하는 녀석인데, 여긴 왼쪽 사이드가 아닌가.

    가장 황당한 건 왼쪽 윙인 쉬빌레였다.

    도훈이 쉬빌레의 공을 빼앗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모두가 도훈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그따위 것들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타타탓-!

    공을 받자 마자 돌아서 치고 나가기 시작하는 도훈.

    그 전환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같은 동료들 조차 출발이 늦었다.

    동료들도 그러한데 수비들의 반응은 어떠했겠는가.

    도훈이 곁에 있던 상대 수비보다 두 걸음을 먼저 치고 나가고 나서야 셀틱의 수비진이 반응을 하며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덤벼드는 한 녀석.

    '어딜.'

    슬라이딩 태클을 뻗어온 상대.

    그러나 도훈은 공을 살짝 띄우며 그 태클을 가볍게 피해냈며 달려갔다.

    그 과정에서,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들어간다!”

    도훈의 모습을 보며 각자의 자리로 침투하는 밀란의 공격수들.

    왼쪽에선 쉬빌레가, 박스 중앙에선 마티니가.

    그러나 도훈은 공을 빠르게 몰고 들어가며 상대 수비의 진형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보가 전혀 없겠지.’

    도훈은 이해했다.

    자신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니, 지금처럼 해이하게 자신을 놔두는 것을.

    상대 수비는 도훈을 견제하는 것보다, 침투해 들어가는 쉬빌레와 마티니를 붙잡는데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공을 몰고 들어가는 도훈은 어느 정도 놔주는 느낌.

    박스 근처까진 몰고 들어와봐야 뭘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인 듯 했다.

    뭐,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답을 해줘야하지 않을까.

    “헤이!”

    손을 들며 박스 안에서 어물쩡 거리는 마티니가 눈에 거슬리기도 하고.

    도훈은 치고 달리던 것을 멈추고 그대로 도움닫기 후 오른발을 크게 당겼다.

    그리고,

    "대가리 조심!"

    뻐어어엉-!

    대포 발사.

    슈우우웅-

    공이 묵직하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울렸고,

    “...!”

    고개를 꺾어 도훈을 바라보며 달려가던 마티니의 눈이 커졌다.

    예상하고 있던 패스가 아니라, 공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고 있었으니.

    ‘젠장!’

    황급히 허리를 숙여 공을 피하는 마티니.

    그리고 공은 마티니의 머리가 있던 곳을 지나 골문 구석을 향해 빨랫줄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 궤적은, 아름답거나 경이로울 것 없이 일직선 그 자체였다.

    슈우웅-

    철썩-!

    “와아...?”

    잠깐의 적막.

    다들 뭘 본건지 실감하지 못하는 듯.

    그러나 잠시 후, 모두는 깨달았다.

    도훈의 총알같은 슈팅이 셀틱의 골문을 열어 젖혔다는 것을.

    너무도 번개같은,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정말 전혀 없는데요. 오늘이 정말 첫 경기에요.”

    “한 번 더 찾아봐!”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은 뒤 어수선해진 셀틱의 벤치.

    오늘 수비에선 무조건 조르지오 마티니만 주의하면 된다고 선수들에게 일러두었던 셀틱 벤치였다.

    그러나 방금 허용한 실점은 그 마티니가 아니라, 정보 자체가 전무했던 동양인 소년에게서였다.

    게다가 방금의 퍼포먼스는 뭐란 말인가.

    중앙에서 공을 잡아 순식간에 치고 올라가더니,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슈팅으로 골망을 찢어버릴 듯 필드를 갈라 버렸다.

    마치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는데 그걸 또 맞은 기분.

    “나단! 이제부터 13번을 전담으로 막아!”

    13번은 도훈의 등번호.

    셀틱은 부랴부랴 수비 전술을 수정했다.

    재밌는 건, 사실 밀란의 벤치도 당황스러웠던 건 마찬가지라는 것.

    골은 정말 대단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슈팅이었고, 모두가 탄성을 내지른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감탄은 감탄이고,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도 있었다.

    그 전의 행동 말이었다.

    “도훈!”

    도훈을 부르는 알베르토 감독.

    무언가 지적할 것이 있어 보이는 감독의 표정에, 도훈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 뛰어 왔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거지?”

    “골을 넣어야하는데, 패스가 오지 않아 그랬습니다.”

    도훈의 대답에 헛웃음을 터뜨리는 알베르토 감독.

    “전반 10분까지 패스가 너한테 향하지 않았고,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자리를 이탈한 것이다. 이 뜻인가?”

    “그런 셈 입니다.”

    “왜 동료들이 패스를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나?”

    “다들 9번을 활용한 공격만이 익숙한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모두가 9번에게만 패스하고 있으니까요.”

    “음.. 자네에게 숙제 하나를 주지.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뛰게. 위치에 구애받지 말고. 공격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 프리 롤. 자네 마음대로 해보라고. 그런 다음, 경기가 끝나고 다시 내게 이유를 설명해보게. 전반 10분 동안 왜 자네에게 패스가 가지 않았는지.”

    “..알겠습니다.”

    “참고로 힌트를 하나 주자면, 내가 자네를 이렇게 불러들인 건 자네가 포지션을 이탈해 왼쪽으로 넘어온 행동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네.”

    고개를 끄덕이며 도훈의 어깨를 두드리는 알베르토 감독.

    도훈은 자리로 돌아갔고,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상식적이지 않아서 재밌는 친구라니까.'

    그런 도훈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알베르토 감독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숙제라.

    여태껏 자신에게 숙제를 내줄 수 있는 건 호산 스승님뿐이었는데.

    어찌됐든, 도훈은 알베르토 감독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10분 동안 자신에게 패스가 오지 않은 까닭.

    또, 자신이 지적한 건 포지션을 이탈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

    글쎄.

    이게 무슨 말일까.

    “음?”

    “아까 왜 패스 안했어? 나한테 주면 됐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마티니였다.

    “다음부턴 확실하게 하자. 이번엔 뭐 어쨌든 골이 들어가긴 했지만, 확실한 방법을 택하자고.”

    마티니는 도훈의 어깨를 툭 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마티니는 방금 도훈의 플레이에 조금 심기가 불편해진 듯 보였다.

    자신을 통하지 않고 멋대로 플레이한 까닭일까.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건만.

    마티니 입장에선 아직 뭘 모르는 도훈의 돌발 행동이 거슬리는 건 당연했다.

    여기서 마지막 패스라는 건 무조건 마티니 자신에게 향해야 하는 법이니까.

    피식.

    그러나 그런 마티니의 말에 도훈은 피식 웃었다.

    확실한 방법으로 가자고?

    나름 배우려는 자세를 취해줬더니.

    감독까진 이해해도 이 녀석까지 가르치려들게 만들 수는 없지.

    “그래. 다음'에도' 확실하게 할게.”

    그나마 좆도 아닌게, 라는 말은 한국어로 흘렸으니 알아듣지 못했겠지.

    “삐익-!”

    경기는 재개 되었다.

    < 확실하게 하자 (2)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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