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확실하게 하자 (1) >
사실 스승님과의 대련을 거듭하면서 든 아쉬움은, 빙의로 실력을 가져올 순 있어도 그 신체까지 가져올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똑같은 실력이라도 키가 크다든가, 작다든가, 떡대가 넓다든가 하는 차이에서 오는 느낌이 상대하는 입장에선 생각보다 크게 다가오는 법.
그러니 실전은 또 다를 수 있고, 이미 여러차례 느낀 바 있는 도훈이었다.
한 마디로, 이미 베켄바우어를 넘었다고 해서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대결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
다부진 체구.
낮은 자세의 밸런스는 같잖은 페인팅 따위론 무너뜨릴 수 없어 보일만큼 안정적.
확실히 칼라브리아의 위압감은 지금껏 상대해본 아마추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또한, 아까 전 제대로된 자세를 취하지 않았던 칼라브리아와 지금의 차이도.
‘이 정도면 가치가 있겠어.’
도훈은 인정했다.
동굴에서 나온 뒤로 상대해본 상대 중엔 그나마 가장 빈 틈이 없어 보이는 상대.
지금까지는 눈앞의 상대를 제쳐내는데 기껏해야 유령신보 정도의 초식만을 사용했던 도훈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실험해 볼 가치가 있어 보였다.
지금껏 갈고 닦았던 보법 중 좀 더 쓸만한 녀석을.
‘지주신보(蜘蛛神步)’
스승님의 비기 중 하나, 지주신보.
이것 하나에 매달린 시간이 10년가까이 될 정도로 연마하기 어려웠던 기술.
한 번 사용할 때 필요한 기의 양또한 어마어마해, 현재의 도훈으로서도 한 경기에 두 번 이상은 쓰기 어려울 정도의 그 신보.
이 신보를 바레시와의 대련 도중 마침내 완성시켰던 도훈이었다.
그리고 그 지주신보에, 그 전까지 난공불락이었던 바레시는 무너졌었고.
그 정도의 비기가 지주신보.
여기서 지주(蜘蛛)란, 거미를 뜻하는 말이었다.
휘이익!
휘이익!
도훈의 다리가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 주변에 회오리라도 만드려는 듯 빠르게 움직이는 두 발.
그걸 마주한 칼라브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야, 이게?’
황당했고, 당황스러웠다.
공을 스치듯 빠르게 움직이는 발은 마치 헛다리 짚기를 여러 번, 그것도 초고속으로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너무 빨라 칼라브리아의 눈에는 마치 다리가 8개인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거미가 순식간에 자신에게 달려드는 듯한 느낌.
마치 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이라도 된 듯 공포감마저.
이것이, 바로 지주신보.
“설마 또?”
숨을 죽이고 둘의 1대1을 바라보는 참가자들.
설마, 칼라브리아가 또 다시 도훈에게 1대1을 내주고 말 것인가?
섣불리 발을 뻗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듯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바쁜 칼라브리아.
‘이 이상은..’
그러나 한 없이 물러날 수만은 없었다.
어느 덧 페널티 박스 안까지 밀려나고 있었으니.
차라리 박스 바깥에서 몸으로 저지하는 편이 나았겠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이미 늦은 상황.
어떻게든 깔끔히 저지해야 했다.
수비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먼저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인가.’
도훈도 그걸 알고 있었고, 이미 칼라브리아가 달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문제.
결국,
쉬이익-
칼라브리아의 발이 공을 향해 뻗어져 나오는 순간,
툭-
공의 주변만을 빠르게 돌던 도훈의 발이, 공에 닿았다.
“...!”
허공을 가르는 칼라브리아의 발.
공은 이미 도훈이 가져간 후.
또 한 번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지고 말았다.
도훈이 ‘두 번째’ 로 칼라브리아를 제쳐내는데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뻐어어엉-
슈우우웅-
철썩-!
"또.. 제쳤는데?"
"너무도 쉽게.."
두 번이나 제쳐졌다.
누구보다 놀란 건 칼라브리아 본인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자신이 일개 아마추어 따위한테 두 번이나 돌파를 당한 ‘수모’ 따위가 아니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드리블.
어찌해야할지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 드리블과 마주했다는게 중요했고, 충격이었다.
대체 뭐란 말인가.
이건 이 세상의 드리블이 아니었다.
뭐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녀석은 외계인이란 말인가?
‘아직.’
그러나.
막상 도훈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직도 상대에게서 백퍼센트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칼라브리아에겐 아마추어와의 연습 시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
아주 작은 대회의 예선 경기만도 못한 동기부여일 것이 당연했다.
도훈은 칼라브리아에게서 ‘전력을 다한다’ 라는 느낌을 여전히 받지 못했고, 따라서 이번 대결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어느 정도는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현존하는 그 어떤 선수라도 자신을 쉽게 막아설 수는 없다는 걸.
“고생했다. 대단하던데, 실력이.”
“아닙니다. 더 배워야죠.”
연습 시합이 끝나자, 칼라브리아가 도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가투소 감독도 그렇고, 칼라브리아 역시도 도훈에게 관심을 보이자 다른 참가자들은 그저 도훈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비록 유스 계약이라곤 하지만, 어쩌면 미래엔 저 둘이 같은 팀에서 경기를 뛸 수도 있는 일이니.
“계약했다며? 그래. 열심히 해서 꼭 같이 뛰자구.”
“그래야죠.”
도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가는 칼라브리아.
'네가 더 열심히 해야 같이 뛸 수 있을 걸. 미래엔..'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속으로 삼키는 도훈이었다.
ㆍㆍㆍ
“이거 정말이냐?”
“아, 계약서 받으셨어요? 맞아요. 제가 사인한 거 맞아요.”
“허어..”
아버지와의 통화.
밀란에서 보낸 계약서를 받아 보셨는지, 아버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그 유우럽의 축구팀이 너랑 계약을 하겠다고 했다고? 연봉 5000만원을 주겠다고?”
“예.”
“내 말 똑똑히 들어라, 도훈아. 너 한국에서부터 자꾸 밖으로 나돌고, 뭔가 이상한 단체에 뭔가 씌인 것 같은데 말이야. 요즘 엄한 놈들 꼬셔다가...”
“아버지.”
도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아버지는 자신을 믿지 못하시는 듯.
“혹시 소윤이 컴퓨터하고 있어요?”
“어? 어.. 하고 있는데.”
“그럼 인터넷에 제 이름을 검색 해보라고 하시겠어요?”
“어.. 기다려 보거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와 동생의 목소리.
그리고 잠시 후,
“허, 허허.. 허허..”
아버지의 헛웃음 소리만이 수화기 너머로 가득했다.
“너, 너... 정말이냐?”
“정말이라니까요. 제가 그 때도 말씀 드렸잖아요. 유럽까지 왔는데.”
“허어.. 허어..”
사실 도훈도 알지 못했다.
아직 자신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본 적은 없으니.
그래서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뭘 본건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대충 자신의 이름 정도는 떠돌고 있지 않겠나.
“알겠다. 이거 사인해서 다시 보내면 되는거냐?”
“예. 번거롭겠지만 부탁 드릴게요.”
“아, 아니다. 번거로울 것 까지야..”
하지만 그 날, 아버지가 인터넷으로 본 것은 도훈의 예상보다 더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버지도 잘 알고 있는, 모를 수가 없는 전설의 축구 선수가 자신의 아들에 대해 쓴 칼럼이었으니까.
"17소년 백도훈은,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빛나는 보석이었다. 이제부터 이 소년의 행보를 우리 모두가 지켜봐야 한다... 차범근이라는 사람이 썼대요."
"허어.."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특급으로 부쳐온 계약서에 사인을 적어 넣었다.
“축하하네. 앞으로 잘해 보게나.”
“예.”
손을 맞잡는 가투소 감독과 도훈.
방금 도착한 아버지의 사인이 담긴 계약서.
그로써 마침내 도훈이 AC 밀란 유스 소속의 선수가 되는 순간.
이젠 아무런 경력도 없는 아마추어 따위가 아니라, 더 찬스로 발굴되어 단번에 밀란과 계약을 하게된 유례없는 아마추어 출신 선수가 된 도훈이었다.
“형, 1차 됐어요?”
“됐는데, 걱정이다. 턱걸이야. 2차에선 힘들 것 같아.”
“에이. 2차에서도 턱걸이로, 3차에서도 턱걸이로 통과하면 되죠. 그게 형 주특기잖아요.”
“매 번 마지막에 뽑히니 장이 꽈배기를 트는 기분이야. 넌 어때? 유명한 선수들 많이 봤냐?”
“유스 소속 애들만 봤는데. 알만한 이름은 딱히.”
더 찬스 참가자들이 일주일 동안 밀란의 훈련장을 쓰고 있기 때문에, 도훈은 짐을 호텔에서 클럽 하우스로 옮겼을 뿐 특별히 이동할 일은 없었다.
운동도 똑같이 이 훈련장에서 하는데, 신분이 더 찬스 참가자에서 밀란 유스 소속 선수로 바뀌었을 뿐.
다만 그렇기에 참가자들이 도훈을 바라보는 시선엔 며칠 전보다도 더욱 동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되는거야? 리그 경기가 남아 있나?”
“리그는 끝났고. 유에파 유스리그 경기가 있대요. 얘네 4강에 진출했다고.”
“이야. 대단하다 야. 나같은 늙다리는 뛰고 싶어도 못 뛰는 리그도 뛰어보고.”
2020년 5월 27일.
이미 리그 마지막 경기까지 모두 치뤄진 세리에의 일정.
하지만 밀란의 유스팀인 AC 밀란 프리마베라 팀은 아직 대회와 경기가 남아 있었다.
바로 유에파 유스 리그.
밀란 유스팀은 꽤나 탄탄한 인재풀을 바탕으로 유에파 유스 리그 4강에 진출해 있는 상태였고, 곧바로 일주일 뒤가 그 4강전이라는 것.
“뛸 지 안 뛸지는 모르죠. 이제 막 합류했는데 뭐.”
“넌 분명히 뛸거야. 내가 감독이면 넌 무조건 선발이야. 진짜로.”
도훈의 어깨를 두드리는 임찬주.
임찬주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임찬주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도훈이 유에파 유스리그, AC 밀란 프리마베라 팀과 셀틱 FC 유스 팀간의 4강전 경기에 선발 출전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의외인데.’
사실 도훈 본인도 조금은 놀란 결정이었다.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4강전이지 않은가.
오늘 이기면 결승이고, 지면 탈락인 중요한 경기에 입단한 지 일주일된 신입을 선발로 내보낸다니.
도훈이 생각해도 과감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근거는 충분했다.
"진짜야. 보면 안다니까."
가투소 1군 감독의 강력한 추천.
그리고,
"진짜라더니, 진짜네.. 그냥 바로 1군으로 데려가시지 그려셨을까.."
첫 날, 도훈의 모습을 지켜본 밀란 프리마베라 감독 알베르토는 진지하게 가투소 감독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었다.
그냥 1군으로 데려가라고.
도훈은 나이만 유스 나이일 뿐, 실력 자체론 당장 1군에 등록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실력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1군에서도 핵심 자원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잘하네. 잘 해."
일주일의 훈련 동안 보여준 모습.
알베르토 감독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기술, 태도, 센스.
모든 것에서 19, 20살이 대부분인 팀의 유망주들 보다도 뛰어난 천재성과 완성된 실력.
당장 경기에 출전시켜도 무리가 없겠다는, 아니, 경기를 이기려면 출전을 시켜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 알베르토 감독이었다.
기존 멤버들과의 조직력같은 문제 따위는 신경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양 팀, 인사!”
어찌되었든, 그리하여 오늘은 도훈에게 뜻깊은 날.
이제 정식으로 축구 선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세상에 백도훈이라는 이름 석자를 알릴 순간.
도훈의 선수 데뷔전이 시작 되려하고 있었다.
“오늘, 잘 해보자. 코치님 말대로만 뛰면 잘 될거야.”
경기 시작 전, 도훈의 어깨를 두드리고 가는 팀의 주장 조르지오 마티니.
열아홉인 마티니는 조만간 1군 콜업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밀란의 특급 유망주로, 밀란뿐 아니라 장차 이탈리아 대표팀의 스트라이커 자리를 책임져줄 것이라는 기대까지 받고 있는 재목.
그런 마티니가 오늘 원 톱으로, 도훈은 오른쪽 윙에 배치된 형태.
“단순하게 플레이하면 돼. 오른쪽 사이드를 줄기차게 공략하고, 마무리는 박스 안의 조르지오에게. 조르지오는 머리든 발이든 어떤 크로스도 알아서 잘 해결해줄테니 편할거야.”
코치가 도훈에게 해준 경기 전 지시.
마티니를 도와 전형적인 윙어의 역할을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일단은 그 지시에 알겠다고 대답한 도훈이었다.
물론 그 지시가 마음에 든 건 아니었고, 그대로만 플레이할 생각도 없었다.
도훈은 이 경기를 이길 생각뿐이었고, 그러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플레이를 할 생각뿐이었다.
그 가장 효과적인 플레이라는 게, 과연 동료가 골을 넣도록 돕는 것일지 도훈은 장담할 수 없었다.
“삐익-!”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고,
“잘 해보자, 신삥!”
주장 마티니의 파이팅과 함께 밀란의 어린 선수들이 적진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저 친구인가?"
"예, 맞는 것 같네요."
그리고, 그 경기를 우연히 지켜보게 된 한 남자가 있었으니.
< 확실하게 하자 (1)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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