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계인 (2) >
연봉 – 40,000 € (KR 52,000,000 원)
도훈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연봉이었다.
4만유로, 그러니까 대략 5천2백만원.
살면서 여태껏 벌어본 돈이라곤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로 받은 40만원 정도가 전부.
그런 도훈에게 한 순간에 5천만원이 넘는 연봉을 주겠다니.
물론 아마추어에겐 커도, 슈퍼 스타들과 비교하면 주급만도 못한 돈인 건 맞았다.
하지만 이건 프로 계약이 아닌 유스 계약.
과거 급식포드라 불리며 돌풍을 불어왔던 마커스 래쉬포드의 그 시절 연봉도 4천만원 수준이었으니, 자신을 지켜본지 고작 하루남짓인 밀란 입장에선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 셈.
“옵션 조항들도 꼼꼼히 읽어보게. 아, 물론 유스 계약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네. 부모님은 현재 한국에 계시는가?”
“예. 아버지가 한국에 계십니다.”
“서류 처리는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마음 편히 기다리면 돼. 자네의 사인과 보호자의 사인까지 완료가 되면, 자넨 정식으로 AC 밀란 유스 소속 선수가 되는 것이네.”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도훈.
특히 도훈은 옵션 조항들을 꼼꼼히 검토했다.
옵션엔 임대 조항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타 프로팀 임대가 가능하고, 임대시 연봉은 누가 주고, 몇 번의 임대가 가능하고, 임대 기간 동안 몇 골을 넣고 무슨 활약을 하면 보너스가 얼마고 등등의.
또한 계약 중 언제든지 1군 콜업 및 타 팀 임대시 새로운 조건의 프로 계약이 가능하다는 항목까지.
그러니까, 단순 유스 계약이 아니라 도훈이 하기에 따라 이 계약은 곧 프로 계약으로 변경될수도 있다는 것.
‘조만간 다시 계약서 쓰겠구만.’
유스 레벨에서 오래 있을 생각은 당연히 없는 도훈이었다.
뭐, 이쯤 검토했으면 됐을까. 눈에 거슬리는 조항은 없었다.
최종 결정은 아버지께 넘기는 것으로 하고, 도훈은 서명란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어차피 계약은 할 셈으로 온 것이었으니까.
“고맙네. 훗날 훌륭한 결정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게끔 우리가 노력하겠네. 그나저나 말이야.”
"예?"
"이탈리아어는 어떻게 그렇게 잘 하는거야? 완전히 원어민인데."
"아, 하하.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 시간날 때마다 공부했습니다."
"어린 친구가 대단하구만. 어쨌든, 앞으로 잘 해보자고."
건치를 드러내며 손을 내미는 가투소 감독.
도훈은 그 손을 맞잡으며, 가투소 감독에게서 호탕함과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계약 했다고?”
“예.”
“아아, 다행이다.”
“뭐가요?”
도훈이 밀란 유스팀과 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밝히자 임찬주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너 그럼 이제 하차 하는거 아냐? 그럼 우리들한테도 한 자리가 생기는거지. 너가 빠지면 파티할 애들 많을 걸?”
“바로 하차하는 건 아닌데. 계약 마무리되려면 1,2주는 걸린다던데요. 그 때 동안은 계속 해야죠.”
“굳이 그래야겠냐?”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뭐 관광이나 하나.”
물론 끝까지 경쟁에 참가할 생각은 없는 도훈이었다.
대학 입시로 치면, 도훈은 이미 수시에 합격한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그래도 동업자들인데, 그들의 자리 하나를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끝까지 한다면, 반드시 최종 8인중 한 자린 자신의 것일게 분명했으니.
“오늘 게임인데, 적당히 머릿수나 채워줘야죠, 뭐.”
“야, 그러면 날 좀 밀어주는 건 어때?”
“하하, 그럴까요.”
반색하며 묻는 임찬주.
도훈은 웃어 넘겼다.
오늘 게임은 11대 11의 실전.
분명히 선수 평가에 있어 배점이 큰 포인트.
앞서 말했듯 굳이 자신에게 의미도 없는 경기에서 돋보여 다른 이들의 점수를 빼앗고 싶진 않은 도훈이었고, 가볍게 뛰기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준비를 마치고 훈련장에 나섰을 때 그러한 생각은 바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비글리아가 우리 팀이라고?”
“비글리아가요?”
“응. 밀란 선수들 몇몇이 같이 게임 뛰어준대. 이야, 기대되는데. 세리에 A 리거들이랑 게임이라니.”
이미 훈련장은 떠들썩했다.
원래 이 훈련장의 주인인 밀란 선수들이 훈련장을 찾았기 때문.
그리고, 그들과 직접 한 운동장에서 시합을 뛸 수 있는 기회가 참가자들에게 주어졌다.
그 중 도훈이 속한 팀엔 밀란과 아르헨티나 대표팀 중원의 핵심, 루카스 비글리아가 같이 뛰게 되었다고.
뿐만 아니라 상대팀엔 현 이탈리아 대표팀의 풀백인 다비데 칼라브리아가 참여.
아마추어들에겐 하늘같은 선수들과 함께 경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쯤 되니 도훈도 설렁설렁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전력을 다하진 않겠지.’
그러나 그들이 함께 뛰어준다고 해도, 역시 100퍼센트를 다해 실력을 발휘해주진 않을 것이라고 도훈은 생각했다.
어차피 참가자들이야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래봐야 그들이 설렁설렁 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될 것이고, 그들 입장에선 전력을 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도훈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느껴보고 싶었다.
동굴에선 빙의술을 익힌 스승님 덕분에 세계최고급 선수들과 1대1로 수련을 해본 적이 있지만, 빙의가 아닌 ‘실제’ 와 맞붙어본 적은 없는 도훈이었으니까.
정말 전력을 다하는 유럽 A급의 선수들과 붙어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들로 하여금 100퍼센트를 다하도록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간단했다.
“형, 미안한데 오늘 제대로 해야겠어요.”
“어? 당연히 그래야지. 이게 어떤 기회인데.”
“형이나 다른 참가자들한텐 미안하게 됐네요. 저들의 실력을 좀 봐야겠어요.”
뭐라는거야, 라는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보는 임찬주.
그러나 잠시 후, 도훈의 말 뜻을 임찬주는 정확히 알 수가 있었다.
파아앙-
툭-
“오오, 저 친구가 그 친구인가?”
“감독님이 바로 사인했다는?”
“의외인데. 아시아인 일줄은.”
시합이 시작되었고, 도훈이 공을 잡았을 때 많은 시선들이 집중 되었다.
도훈은 이미 장안의 화제.
1차 합격자를 가리기도 전에 가투소 감독의 계약서를 받았다는 사실은 역대 더 찬스의 사례를 봐도 전무한 일.
그야말로 역대 더 찬스를 통틀어 가장 역대급 재능을 가진 참가자의 등장이니 모두 도훈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도훈은, 그런 기대가 허황된 것이 아님을 보여줬다.
“뒤! 붙는다!”
툭-
뒤에도 눈이 달린 듯,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뒤에서 붙어오는 압박에서 탈출하는 도훈.
사실 동굴에선 이해하지 못했었다.
‘암굴’ 에서 했던 훈련을.
빛이 완벽히 차단된 암굴에서, 도훈은 스승님의 위치를 소리만으로 파악하는 수련을 했었다.
단순히 방향뿐만이 아니라, 거리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까지.
그 땐 직접 공을 가지고 하는 수련이 아니라면 시간 낭비라는 생각도 했었던 도훈이었지만, 실제 필드로 나와본 후 역시 쓸모 없는 수련은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지금처럼, 직접 사방을 둘러보지 않고도 상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쉬익-
타타탓-!
“와아..!”
좁은 공간을 가볍게 빠져 나온 뒤, 속력을 붙이며 상대 미드필더 두셋은 가볍게 제쳐내는 도훈.
역시나 가투소의 마음을 빼앗을만한 실력에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도훈에게 중요한 건 조무래기들이 아니었다.
'다비데 칼라브리아.'
다비데 칼라브리아.
그가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참가자들의 반응은 대박이었다.
그는 현재 밀란의 수비수 중에서 가장 높은 몸값을 자랑하고 있는 전도유망한 수비수였으니까.
때문에 도훈은 시험해보고 싶었다.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다는 칼라브리아의 수비 실력을.
“왼쪽 비었어!”
공간이 열린 사이드.
그러나 도훈은 넓게 비어있는 사이드를 향해 치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굳이 많은 인원들이 밀집해 있는 중앙을 향해 치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주하게 되는 칼라브리아.
칼라브리아는 박스 라인에 서서 도훈이 달려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은 명분이 없다 이거지.’
그런 칼라브리아의 자세를 보며 도훈은 생각했다.
사실 모양 빠지는 일이 아니겠나.
세계 최고의 프로가 아마추어들을 상대로, 속된 말로 ‘진지 빨고’ 하는 것 자체가.
칼라브리아 입장에서도 자신이 돋보여야 할 경기도 아니기 때문에 배려 차원에서 적당히 해주려고 마음을 먹고 왔을 것.
하지만 도훈은 건드리고 싶었다.
칼라브리아의 자존심을.
‘제일 자존심 상하던 것.’
가끔 스승님과 1대1을 할 때, 공수를 바꿔 대련을 한 적이 있었다.
도훈이 수비를 하고, 스승님이 공격을 하는 식으로.
사실 실력차가 상당했기 때문에 대련은 언제나 스승님의 승리였다.
스승님에게 패한다는 게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독 한 기술에 당했을 때만큼은 자존심이 매우 상했었다.
그게, 이거였고.
툭-
“어..?”
“뭐, 뭐야?”
도훈이 칼라브리아의 옆을 스쳐 지나간 순간, 구경꾼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잘못 봤나 싶었다.
하지만, 칼라브리아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니 잘못본 것은 아니었다.
“알을.. 까버렸어?”
알까기.
도훈은 칼라브리아의 다리 사이로 공을 통과시키는 것으로 그를 제쳐버렸던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알까기는 수비수에게 있어 가장 굴욕적인 순간 중 하나.
뻐어어엉-!
슈우우웅-
철썩-!
그리고 도훈은 칼라브리아를 제치자 마자 슈팅을 때렸고, 공은 골문 구석을 정확히 갈라 버렸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지금.. 칼라브리아를 허수아비로 만든거냐..?”
“말도 안 돼.. 운이지?”
“칼라브리아가 봐준 거겠지.. 그렇게 믿어야지..”
믿을 수 없다는 반응들.
당연했다.
칼라브리아의 알을 먹이는 아마추어라니.
“나이스, 꼬맹이.”
칼라브리아는 웃으며 도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훈도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나눴고.
하지만,
‘다음 번에도 웃을 수 있을까?’
지금의 웃음은, 본인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에 지을 수 있는 웃음일 것이었다.
만약, 전력을 다했는데도 돌파를 허용하는 수모를 당한다면 그 땐 칼라브리아도 웃을 수 없겠지.
‘보고 싶은데.’
도훈은 오늘 그런 칼라브리아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세계 최고가 될 자신이 이름도 없는 아마추어에게 분함을 느끼는 그 얼굴을.
확실히 ‘그 알까기’ 이후부터 칼라브리아는 조금씩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기 시작했다.
애꿎게 피해를 본 건 도훈 팀의 다른 공격수들.
아마추어에게 칼라브리아는 철벽, 그 자체였다.
물론 여전히 100퍼센트를 다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70퍼센트 정도로 실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 아마추어들 상대론 충분.
“와, 아무것도 못하겠네.”
칼라브리아를 제쳐 보려다 본전도 못찾은 참가자 하나가 혀를 내둘렀다.
그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 빈틈이 없는 느낌.
어떤 페인팅을 써도 다 읽히는 기분에 공격수로서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수비였다.
사실 이런 모습을 세리에 A의 공격수들 상대로도, 챔피언스리그의 별들을 상대로도 보여줬던 것이 지난 시즌의 칼라브리아.
현 시점에서 칼라브리아를 가볍게, 식은 죽 먹기로 제쳐낼 수 있는 공격수는 한 손가락에 꼽는 것이 사실.
가능하다고 해도 한 경기에 여러 차례나 보여주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헤이!”
도훈이라고 무조건 칼라브리아를 뚫어낼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
다시 한 번 공을 잡고 돌아서는 도훈.
그리고, 다시 마주하는 도훈과 칼라브리아.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칼라브리아의 자세는 낮아져 있었다.
낮은 자세는 수비의 기본.
칼라브리아가 조금 더 진지해졌다는 증거였다.
‘너무 적당히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덤벼드는 도훈을 보며 생각하는 칼라브리아.
이러한 프로그램이 왜 있을까.
단순히 유명한 선수들과 한 번 시합을 뛰어보는 경험을 만들어주기 위해?
아닐 것이었다.
뭔가 깨달음을 얻어가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로서 적당히 져주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오히려 예의가 아닐 수 있다.
전력을 다해서, 실력의 차이를 느끼게 해주고 더욱 더 노력하도록 해주는게 초청받은 프로의 입장에서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이 들게 해준 건 재밌게도 지금 눈앞의 아마추어였고.
역시 6살 아이에게도 배울 게 있다더니.
‘프로의 힘을 보여주마.’
칼라브리아는 프로로서, 눈앞에서 달려들고 있는 상대가 같은 프로라고 생각하며 수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런 칼라브리아를 향해 도훈이 정면으로 달려 들었다.
< 외계인 (2)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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