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14화 (14/173)
  • < 큰 물로 (3) >

    공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였다.

    도훈은 여전히 달려오고 있었지만, 공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혹시 이미 패스를 한건가? 아니면 길게 치고 달리기 위해 공을 차놓은 것인가?

    조유민은 할 수 없이 속도를 줄이며 좌우를 살폈다.

    그러나 여전히 모두가 도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공은 여전히 도훈에게 있다는 것인데.

    맞았다.

    공은 여전히 도훈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숨기고 있었다.

    대체 전력으로 질주하면서 어떻게?

    정답은 왼발의 바깥쪽.

    그리고 오른발의 협조였다.

    도훈은 달리면서 계속해서 왼발 바깥쪽으로 공을 컨트롤하며 나아갔다.

    동시에, 움직이는 발의 왕복 운동과 오른발로 정확히 타이밍을 맞추며 공을 조유민으로부터 숨겼다.

    완벽한 착시현상.

    도훈의 오른쪽에서 달려들던 조유민으로서는 공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움직임.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100년을 수련한 도훈에겐 가능한 ‘기술’ 이었다.

    파아앙-

    타타탓-!

    조유민이 멈칫하는 사이에, 도훈은 숨겼던 공을 중앙쪽을 향해 길게 차고 들어갔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조유민의 곁을 통과하는 도훈.

    완벽히 허물어진 왼쪽 사이드.

    순식간에 박스까지 도달하는 도훈.

    예상치 못한 돌파라 커버는 느렸다.

    애초에 도훈이 조유민의 수비를 뚫고 이 곳까지 진입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그 누구도 없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고민할 필요 없다는 뜻.

    도훈은 반대편 골대를 바라보고 그대로 왼발을 휘둘렀다.

    뻐어어엉-!

    묵직한 임팩트.

    정확히 체중을 실어찬 까닭에 자연히 들어올려지는 반대발.

    그리고 슈팅은 잔디를 깎아버릴 듯 낮게 깔려 페널티 박스를 대각선으로 갈랐고,

    슈우우웅-

    철썩-!

    골망을 찢을 듯 출렁이게 만들었다.

    필드 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순간이었다.

    “이 봐.”

    “예?”

    “저 선수, 누구지?”

    “아.. 아마추어 선수입니다. 이번에 나이키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서 선발된 아마추어인데.. 잠깐 훈련에 같이 참여하는 식으로..”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름이 뭐냐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바로 국가대표 팀의 감독.

    파울로 벤투(Paolo Bento).

    날카로운 눈으로 도훈을 바라보고 있는 벤투의 질문에 코치가 부랴부랴 수소문해 백도훈이라는 이름을 전했다.

    “백도훈? 흐음..”

    이상한 일이었다.

    벤투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맡은 지도 2년여가 다되어가는 시점.

    그동안 해외, K리그 클래식과 챌린지는 물론 대학 리그까지 직접 보러 다니며 한국 선수들을 파악하는데 노력했던 벤투 감독이었다.

    그러나 백도훈이라는 이름은 오늘 처음 들어보고, 처음보는 선수였다.

    실력은 충격적이었고.

    어떻게 이런 실력을 가진 선수가 지금껏 아마추어에 아무런 축구경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단 말인가?

    이건 완전히 숨은 보석 중에 보석이었다.

    “지켜봐야겠는데.”

    “아, 예.”

    이번 대표팀 소집 명단은 이미 확정.

    하지만 다음 대표팀을 소집하는데 있어서, 그 땐 지금과 명단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고민이 벤투 감독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도훈이 보여준 단 한 번의 장면으로 인해.

    “삑, 삐익-!”

    “고생하셨습니다!”

    연습게임은 끝이 났다.

    스코어는 5대4.

    결과는 대표팀의 승리였지만, 애당초 몸풀기 수준의 연습 상대였던 고려대도 4득점을 올리며 예상과 달리 결코 만만치 않은 시합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서 빡쎄게 하자.”

    “..예.”

    오히려 고려대 감독은 선수들을 혼내며 돌아갔다.

    고려대 팀이 올린 4점의 득점이 모두 고려대 소속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골은 모두 도훈 혼자서 올린 득점이었다.

    충격.

    도훈은 더 찬스의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보여주던걸, 한국 대표팀 선수들을 상대로도 보여주고야 말았다.

    물론 똑같은 수준은 아니었다.

    더 찬스에선 다른 참가자들을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였다면, 대표팀 상대론 눈에 확 띄는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방금의 시합에서 그 어떤 대표팀 선수보다 도훈이 눈에 띄었다는 건 인정하긴 어렵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은 분명했다.

    “이해는 잘 안되지만, 어쨌든 지켜봐야겠는데요 저희도.”

    아직 데뷔조차 하지 않은 재야의 신인.

    그러나 단 한 번의 연습 시합으로 대표팀 코치들에게까지 눈도장을 찍어버린 도훈이었다.

    ㆍㆍㆍ

    2020년 5월 14일.

    도훈은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날아와 있었다.

    드디어 더 찬스 세계 본선이 시작되기 때문.

    “와, 개좋은데? 방 넓은거봐.”

    신이 난 임찬주와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도훈.

    집보다도 큰 호텔방에는 나이키측에서 선물로 준비한 축구화 등의 장비들이 세팅되어 있었고, 삼시세끼 식사 역시 최고의 음식들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건 각종 지역 예선을 뚫고 본선까지 올라온 참가자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혜택.

    그제까지만 해도 곰팡이가 쓴 벽지가 도배된 좁은 방에서 잠을 청했던 도훈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돈을 벌면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있다.’

    살면서 돈이 없어 서러운 일들은 꽤나 많았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이야 막연하게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많은 돈의 산물’ 들을 마주하니, 도훈은 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건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가족과 함께 누리고 싶었다.

    돈.

    애초에 그 말도 안되는 수련을 시작한 것도 호날두같은 스타들이 자랑하던 재력을 동경해서였다.

    언젠간 축구를 하는 목적의 1순위가 바뀔 진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도훈의 1순위는 돈이었다.

    그게 천하제일인이 되려는 목표였다.

    “진짜 기대되지 않냐. 잘 하는 애들 무지 많을텐데, 빨리 같이 훈련하고 붙어보고 싶다.”

    그러나 임찬주는 그게 아닌 듯 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축구를 시작한 도훈과 달리 임찬주는 정말로 축구가 좋아 여기까지 온 참가자였으니.

    ‘스승님의 말씀..’

    분명히 도훈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만큼의 실력을 수련으로 쌓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수련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도훈은 매일 비급을 읽으며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고, 스승님이 말씀하셨던 가슴 속의 타오르는 불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은 수련으로,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 불을 임찬주는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도훈의 목표는 바로 그것.

    그 불의 씨앗을 가슴에 품는 것이었다.

    거대한 호텔 로비에 가득히 모인 더 찬스 세계 참가자들.

    도훈과 임찬주를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유럽 등 세계 전역의 예선을 뚫고 올라온 막강한 참가자들이 기대감 넘치는 얼굴들로 자리해 있었다.

    “다들 축구 잘 하게 생겼네.”

    임찬주가 긴장한 듯 다른 참가자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임찬주와 도훈은 어엿히 치열했던 한국 예선을 통과한 우승자이지만, 솔직히 같은 월드컵 진출 국가라 해도 아시아 예선 통과 국가와 유럽 예선 통과 국가의 난이도 차이가 있듯 더 찬스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유 바르샤? 롱 타임 어고? 와우.”

    친화력 넘치는 성격답게 벌써 옆 자리의 참가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임찬주는 그 참가자가 어린 시절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혀를 내둘렀다.

    경력이라곤 한국 고교 아마추어 정도가 전부인 임찬주로선 기가 팍 죽는 소리.

    그 참가자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참가자들은 같은 참가자들이 알아보고 사진을 찍을 정도로 유명한 참가자들도 있었다.

    다들 각자 사정때문에 꿈을 이어가진 못했지만, 유망했던 과거를 가진 쟁쟁한 참가자들.

    이런 녀석들이 모인 곳이었다.

    이 곳은.

    “우린 뭐 아무도 관심 없구나.”

    괜히 시무룩해하는 임찬주.

    그러나 도훈은 크게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이 곳에선 자신이 최고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하루만 지나도 지금과 같은 관심이 자신에게 향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오오!”

    “뭐야, 누구야?”

    어수선하던 참가자들의 시선이 갑자기 단상으로 주목되며 환호성이 일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잡고 단상에 나타난 한 남자때문.

    “여러분,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다들 저 아시죠? 하하.”

    “예!”

    “와, 가투소다!”

    남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도훈과 달리 열광하는 참가자들.

    남자는 자신을 AC 밀란의 감독 젠나로 가투소라고 소개했다.

    임찬주에게 물어보니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가투소를 모르냐고 반문해왔다.

    그만큼 유명한 인물인 듯 했다.

    “일주일간 여러분의 훈련을 같이 도와줄 아주 좋은 역할을 맡게 되어서 저도 기쁩니다. 저 역시 여러분의 꿈을 응원하며, 최선을 다해 서포트 해드릴 생각입니다. 뭐, 또 혹시 모르죠. 이 곳에서의 인연이 훗날 더 좋은 인연으로 발전하게 될지도.”

    “와아-!”

    거대한 환호성과 환영의 박수.

    그렇게 더 찬스 세계 본선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씁, 괜히 기대했네.”

    AC 밀란의 협조로 제공된 밀란의 넓은 훈련장.

    150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한번에 다섯 개의 훈련장에서 북적이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워낙에 사람이 많으니, 가투소의 몸이 한 개인 이상 모든 참가자들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이거 차별 아니냐?”

    도훈과 임찬주가 몸을 풀고 있는 훈련장.

    같이 훈련장을 쓰는 참가자들을 대충 보니, 묘하게 공통점들이 느껴졌다.

    대부분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참가자들같은 느낌이랄까.

    유럽이나 남미 출신으로 보이는 참가자들은 도훈이 있는 훈련장에선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가투소 감독 역시 보이지 않았고.

    “유럽, 남미 참가자들 모여 있는 훈련장에 있겠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사실 자신이라도 그럴 것 같았으니까.

    “어차피 합격은 가투소가 정하는게 아니니까 1차만 통과하면 돼. 우리할 것만 하자고.”

    더 찬스 세계 본선은 총 3차의 합격자 테스트를 거쳐 최종 8인의 우승자를 선정하게 된다.

    그 중 1, 2차 테스트는 훈련과 연습 시합을 직접 지도해 줄 밀란의 현직 코치들이 매기는 포인트로 상위 득점자가 합격하는 방식.

    그리고 최종 8인은 거기에 더불어 가투소 감독과 나이키에서 언론사에서 초청한 현직 경기 분석관들이 실제 경기와 동일하게 평점을 메겨 전까지 쌓아 놓은 포인트와 합산, 최종 우승을 가리는 방식.

    사실 방식이 어떠하든 도훈은 상관이 없었다.

    다 떠나서, 여기서 제일 잘하면 우승하는 것 아니겠나.

    그럼, 그냥 제일 잘하면 됐다.

    다른 건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이건 우리 밀란 선수들이 실제 훈련때 사용하는 장비입니다. 이 원 중앙에 서서, 불빛이 들어오는 판에 공을 맞추면 됩니다. 정확히 불빛이 들어온 패널을 맞추면 1점. 빛이 들어오지 않은 패널을 맞추면 마이너스 1점. 30초안에 많은 점수를 획득하시면 됩니다.”

    실제 밀란 선수들의 훈련 장비를 체험하는 참가자들.

    첨단의 고급 장비를 체험하는 건 좋지만, 매 훈련마다 체점을 당하는 입장이기에 참가자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삑-!”

    파아앙-

    파아앙-

    참가자들은 이내 신이 나기 시작했다.

    생판 모르는 각양각국의 선수들이지만, 이들에게 있어 의사소통 수단은 축구.

    모르는 참가자가 훈련을 해도 참가자들은 흥미롭게 지켜봐주며 박수쳐주고, 실수가 나올 땐 같이 안타까워 했다.

    “삑! 19개.”

    “휴우. 집에 이거 하나 갖다 놓고 싶은데! 코치님, 19개면 어느 정도의 기록입니까?”

    “우리 1군 멤버 중 하나의 기록이 26개라네. 뭐, 1류급 선수와 비교하는 건 아직 가혹한 일이지만.”

    가장 먼저 프로그램을 마친 참가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공을 잡으면서 동시에 주변을 살펴 불이 들어오는 패널을 찾고, 곧바로 공을 차 패널을 맞춘 뒤 다시 튕겨나온 공을 잡으며 다음 패널을 찾아야 하는 프로그램.

    최대한 집중해 빠르게 한다고 했는데도 밀란 1군 선수의 기록과는 꽤나 차이가 난다니.

    “참고로 우리 중 가장 고득점은 31개라네. 물론 자네들도 언젠간 할 수 있는 기록이야. 지금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어차피 자네들의 목표도 세계최고급의 선수가 되는 것 아니겠나.”

    어깨를 으쓱이며 참가자를 격려하는 코치.

    어차피 경쟁자는 밀란 선수들이 아니라 같은 참가자들.

    19개면 나쁜 기록은 아니라는 코치의 말.

    그러나, 다음 차례의 참가자가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시작했을 때,

    ‘말도 안돼.’

    코치의 눈은 겉잡을 수 없이 확장되었다.

    < 큰 물로 (3)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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