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11화 (11/173)

< 무대가 좁다 (3) >

"결국엔 재능이야. 노력? 누가 안해. 다 해. 노력은 다 하는데, 그 중에서 재능 있는 놈이 결국 되는거야. 그런거지."

"형도 재능이 있잖아요."

"그거 아냐? 어중간한 재능이 있는거보다, 차라리 없는게 낫다는 거. 내가 차라리 축구를 존나게 못했으면 이렇게 매달리지도 않았겠지."

쓸쓸히 미소짓는 임찬주.

둘은 말없이 한참을 더 뛰었다.

“...형.”

“허억, 허억.. 존나 잘 뛰네 이 자식... 왜?”

“끝까지 해봐요. 노력으로 안되는 거 없어요.”

“그럴까? 하하.”

“거기 둘!”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들려온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우산을 쓴 거구의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뭣들 하는거지?”

“가, 감독님?”

우산을 쓴 남자는 차범근 전 감독이었다.

도훈과 임찬주는 얼른 숨을 고르고 자세를 갖췄다.

“아이구, 쫄딱 젖었네 둘 다. 늦은 시간에, 비까지 맞아가면서 운동장엔 왜 나온거야?”

“아, 그게요. 그냥 좀 잠이 안와서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임찬주.

도훈 역시 고개를 숙였다.

“휴식. 몸 관리. 프로 선수가 되려면 이 두 가지는 확실히 하고 가야 하는거야. 내일 감기라도 걸려서 제 실력 못 보여주면 어쩌려고 그래? 억울하잖아.”

꾸중을 들을만한 일이 맞았다.

차 감독의 말 대로 몸 관리 역시 프로가 갖춰야할 자질.

프로가 되고 싶어 오디션에 참가한 녀석들이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꾸중을 하고 있는 차 감독의 목소리에선 아버지같은 다정함이 느껴졌다.

“내가 억울할 것 같아서 그래. 니들 둘이 내일 감기라도 걸리면.”

“...!”

“이 시간까지 뛰는 열정은 플러스 10점. 근데 비 맞으면서까지 하는 건 마이나스 20점이야. 내일, 잘들 해 봐.”

“옙!”

“들어 가십쇼!”

고개를 꾸벅 숙이는 둘에게 손 인사를 하며 떠나는 차 감독.

“들어가죠. 빗방울이 굵어지네.”

“빨리 들어가자. 더하면 그 땐 진짜 혼난다. 누가 먼저 도착하나, 내기!”

“아, 잠깐!”

타타탓-!

도훈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달려가는 임찬주.

물론, 몇 초 지나지 않아 도훈이 임찬주를 앞질렀지만.

ㆍㆍㆍ

“2020 더 찬스, 대망의 마지막 결승전! 여기까지 오신 22명의 참가자들 모두 고생하셨다는 말을 미리 드리고 싶습니다. 차범근 감독님도 한 말씀 해주시죠.”

“예, 뭐. 다들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만약 이 기회를 붙잡지 못했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회는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기회를 잡을 자세가 되어 있는 것 같고요. 불가능은 없습니다. 다들 파이팅입니다.”

“파이팅!”“그래, 해보자!”

차 감독의 말에 열의가 불타는 듯 파이팅을 외치는 참가자들.

“그럼 각자 위치로 가주십시오!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예선 마지막 경기가 시작 되었다.

사실, 마지막이라고 해서 떨리거나 하는 건 전혀 없었다.

차분히 경기장을 훑는 도훈.

예선 첫 날부터 생각한거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나은 참가자는 없다.

있을 수가 없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삐익-!”

도훈은 경기를 시작했다.

날카로운 눈으로 시합을 지켜보고 있는 차 감독.

그런 차 감독의 눈빛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경기장의 선수들.

결승전이라지만, 오늘 경기의 승패보다 중요한 건 최종 2인에 드는 것.

이긴다고 해도 여기서 살아남는 건 둘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눈에 띄는 플레이를 보여야 하는 것이 참가자들의 상황.

때문일까.

의외로 시합은 준결승 때보다 못한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개인 플레이의 향연.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일.

하지만 그것은 빨간 팀의 이야기고, 도훈이 속한 파란 팀은 조금 달랐다.

의외로 팀플레이가 되고 있었다.

자연히 경기의 주도권을 쥐는 파란 팀.

다만, 파란 팀의 수비형 미드필더 임찬주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위화감.

“가운데! 비었잖아!”

평소 팀의 커맨더 역할을 해왔던 임찬주였다.

아무래도 맏형이고, 게임 보는 눈이 좋아 참가자들도 시합을 할 땐 임찬주의 오더에 많이 의존을 해왔었고.

하지만, 오늘만큼은 참가자들이 임찬주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팀플레이는 이뤄지고 있었고.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잠시 후, 임찬주의 의문은 해결 되었다.

동료들이 자신의 오더를 무시하는 땐, 딱 한 가지뿐이었다.

“도훈이!”

파아앙-!

도훈에게 공을 주라고 했을 때.

동료들은 말을 무시하고 다른 쪽으로 패스를 넘겼다.

그제야 임찬주는 알 수 있었다.

‘견제하는구나.’

당연히 도훈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준결승때 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공격을 자신에게 의존했던 팀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패스가 전혀 오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 눈에 띄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건, 어떻게든 차 감독의 눈에 드는 것이 목적인 시합이니까.

‘너희들도 어쩔 수 없겠지.’

이해했다.

너무나도 간절한 기회.

남 좋으라고 뛸 순 없는게 당연했고 도훈도 이해할 수 있었다.

누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들러리가 되고 싶겠나.

하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이제 와서 될 것 같아?’

어림 없는 일이었다.

자신도 슬슬 가만 있진 않을 거니까.

하지만 상황이 애매했다.

공이 상대팀에서 돌고 있다면 얼마든지 달려가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공이 아군에게서 돌고 있었으니까.

아군의 공을 무턱대고 빼앗을 순 없지 않나.

아군의 공을 빼앗아 골을 넣는다고 해도 그게 좋은 모습으로 비출진 의문.

그렇다면.

'이건 어때.'

도훈에겐 색다른 생각이 있었다.

잠시 공이 터치 라인 바깥으로 나간 상황.

“야!”

도훈은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도훈은 모든 동료들, 아니 경쟁자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니들 생각 다 알아! 근데, 내가 더 확실한 방법을 제안할게! 나한테 패스해! 그럼 내가 골을 챙겨줄게!”

도훈이 말을 마치자, 경기장에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이윽고 곳곳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고, 대부분은 어이없는 얼굴로 도훈을 쳐다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도훈은 한 명을 구제해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어차피 모두의 목적은 ‘눈에 띄는 것’.

그리고 자리는 두 자리.

그렇다면, 꼭 도훈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갈 수도 있는 일 아니겠나.

게다가 도훈이라면 이 필드 위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참가자였다.

하지만,

“어이, 다들 솔깃한 건 아니지?”

“그럼. 뭘 믿고 패스를 줘. 쟤가 무슨 수로 우리 골을 챙겨주는데?”

참가자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당연했다.

어떻게 골을 챙겨준다는 말인가?

하지만, 잠시 후부터 참가자들의 그런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한 장면 이후부터.

도훈은 플레이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니가 그런 말해서 주는 건 아니라는 건 알아둬!”

파아앙-!

가장 먼저 도훈에게 패스를 건넨건 임찬주였다.

임찬주가 한 말은 사실.

원래부터 임찬주는 도훈에게 패스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찬스가 지금 났을 뿐이었다.

툭-

그리고 도훈이 이번 시합에서 처음으로 공을 잡았다.

위치는 하프라인을 조금 넘은 위치.

“덤벼봐.”

“...!”

도훈은 공을 밟은 채 가만히 섰다.

도발.

곧바로 빨간 팀 미드필더 세 명이 도훈을 둘러싼 뒤 덮쳐 들었다.

하지만,

스르륵, 툭-!

그 사이를 빠져나오는 건 도훈에겐 매우 간단해 보였다.

실제로도 간단했다.

달려드는 녀석들의 발을 피해 공을 발바닥으로 굴린 뒤, 빈 틈을 향해 툭 차놓고 빠져 나왔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간단해 보이는 동작은 도훈의 엄청난 1대1 경험과 내공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의 동작, 무게 중심이 훤히 보이고 있었으니까.

“뭐해! 뛰어 들어가!”

그리고 도훈은 터치 라인을 따라 치고 달리며 임찬주에게 외쳤다.

도훈의 말대로 박스를 향해 달리는 임찬주.

“막아!”

빨간 팀의 수비에 혼돈이 찾아 왔다.

냄새를 맡은 상대가 박스 안으로 달려들고 있었고, 도훈은 왼쪽 사이드를 파고 들고 있었다.

사이드와 중앙.

당연히 사이드론 풀백 정도만이 붙고, 나머지는 중앙을 지키는 게 상식.

하지만 그 사이드가 도훈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도훈은 절대 한 명이서 막을 수 있는 파괴력이 아니었으니까.

“같이 붙어!”

결국 중앙 수비수 하나가 협력 수비를 위해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왔다.

바로 이거였다.

골을 챙겨준다는 이야기가.

마음만 먹는다면 도훈은 모든 수비를 자신에게 이끌어낼 자신이 있었다.

타타탓-

사이드를 파고 들던 도훈이 중앙을 향해 달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곧 마주치는 빨간 팀의 풀백.

그리고 그 뒤에도 협력을 나온 수비가 하나 더.

도훈은 공간을 향해 피하지 않았다.

도훈은 그들의 정면을 향해 달려 들었다.

그리고,

툭-

툭-

툭-

툭-

마법같은 네 번의 터치가 이뤄졌다.

‘유령신보.’

아직 성에 찰만큼은 완성하지 못한 보법.

그러나, 지금의 수준으로도 그 둘을 뚫어낼 정돈 충분했다.

“와아!”

"지금 연속으로 팬텀 친거야? 너무 빨라서 못봤어!"

탄성이 터져 나왔다.

ㄹ자의 직선을 그리며 정말 유령처럼 순식간에 둘을 통과해 나오는 도훈.

이 정도 했으면,

“알아서 해라!”

파아앙-!

뒤의 몫은 알아서 챙겨먹어줘야겠지.

도훈은 프리로 서 있는 임찬주의 발에 정확히 패스를 찔러 넣었고,

뻐어엉-!

슈우우웅-

철썩-!

임찬주도 그걸 놓치지 않았다.

골.

도훈의 첫 도움이자, 임찬주의 첫 골이었다.

그 장면 이후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골을 만들어 준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지만, 도훈은 그것이 가능한 레벨이었다.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패스만 해주면, 골을 주겠다는데.

골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빛나는 건 도훈이었지만, 어차피 커트라인은 2명이다.

그 중 한 명이 도훈이라면, 나머지 한 명은 많은 골을 넣은 녀석이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겠는가.

재밌는 장면은 그 때부터 시작 되었다.

경기 초반, 누구도 도훈에게 패스하지 않았던 파란 팀이, 이젠 공을 잡으면 무조건 도훈에게 패스를 하기 시작한 것.

그리고 도훈은 공을 잡을 때마다 한 골, 한 골씩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뭐하는 애야, 저거?”

“아빠, 형 공도 못잡고 있어요.”

경기장을 찾은 참가자들의 가족들이 어이없다는 듯 시합을 지켜 보았다.

그 수많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마침내 결승까지 왔다고 해서 경기를 보러 왔는데 정말 이게 결승전이 맞는지 너무나도 일방적인 시합이 펼쳐지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도훈에 의해서.

“잠깐, 패스준 게 누구였지?”

“나!”“여기다!”“뭔 소리야, 나잖아!”

어처구니가 없는 풍경이었다.

< 무대가 좁다 (3)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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