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굴 (5) >
7부리거를 가볍게 제쳐낸 뒤, 호산이 불러온 것은 5부리거였다.
그런 5부리거와 도훈은 10번을 붙었고, 10번을 뚫어냈다.
아직까진 단연 도훈의 실력이 압도적이었다.
그 다음은 4부리거였다.
결과는 8대2.
역시 도훈의 승리였다.
그러나 8번의 승리보다 신경쓰이는 건 2번의 패배.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도훈은 확실히 하고 가고 싶었다.
수련, 대련.
또 수련, 또 대련.
그리고 3일이 지나지 않아,
도훈은 4부리거와 10번을 대결해 10번 모두를 완벽히 제쳐내는데 성공했다.
그런 식으로 도훈은 계속해서 올라갔다.
잉글랜드 3부리거, 이탈리아의 2부리거를 상대했고, 전부다 완벽하게 뚫어낼 때까지 대련하고 또 대련했다.
3부리거를 완벽하게 제압하는데엔 한 달이 걸렸고, 2부리거를 압도하는덴 세 달이 걸렸다.
파죽지세였다.
이런 식이라면 1부리거도, 누구나 들으면 알 선수들을 제쳐내는 것도 식은 죽 먹기일 듯 싶었다.
이제 수련한지 30년이 좀 넘었는데, 이런 기세라면 70년이 지난 뒤엔 얼마나 강해져있을지, 금기의 영역까지 도달하는 것은 아닌지 도훈은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기세가 덜컥, 하고 주춤하는 때가 왔다.
처음으로 1부 리거라는 녀석을 상대했을 때였다.
“2부리거와 1부리거의 차이가 얼마 정도인지 아느냐.”
“그게 그거 아닌가요? 2부에서 올라가기도 하고 1부에서 떨어지기도 하잖아요.”
“모르는 소리다. 2부에선 3부로 떨어지기도 하고, 1부로 올라가기도 하지만 1부에선 2부로 떨어지는 것외엔 없다. 그 의미가 뭔지 아느냐.”
“뭔데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자들의 리그라는 것이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자들의 리그.
1부리그란 그런 곳이었다.
간단히 말해, 그 지역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곳.
2부에서 우승하면 1부로 승격하지만, 1부에서 우승하면 그 나라의 챔피언이 된다.
“뭐, 몸으로 느껴보면 알겠지. 혹시 이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
“무슨 이름이요?”
“마르코 카포네.”
“들어본 적 없습니다.”
“이탈리아의 1부에서 올해 18위를 하고 있는 팀의 수비수다.”
도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차이가 있을까요.”
“붙어봐라.”
호산은 몸을 내주며 생각했다.
훈련의 성과가 나타나고, 상대를 차례로 꺾어나가며 도훈의 자신감이 생긴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제자가 분명히 간과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900년간을 수련하며 느낀 것.
실력은 절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성장이 그리는 곡선은 수평을 그리다 어느 순간 계단처럼 툭하고 오른다.
게다가 그 성장의 폭은 아주 작다.
처음부터 지금까지에 비해선.
하지만, 그 작은 성장을 위해 걸리는 시간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길수도 있다.
아니, 분명히 길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제자야.’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공을 몰고 덤벼드는 도훈.
뭐, 세 달쯤 덤벼들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테지만 말이었다.
‘뭐지, 이 벽은..’
만 하루를 꼬박 대련을 하는데에만 쏟아부은 도훈.
분명히 어제까진, 2부리거를 상대로 10번 중 10번.
압승을 거뒀던 자신이었다.
그런 2부리거와, 지금의 상대인 1부리그 하위권 수비수와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랐다.
확실히 달랐다.
2부리거와, 1부리거 사이의 벽이.
어쩌면 그 둘간의 차이 자체는 미세한 차이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을 상대하는 도훈이 느끼기엔, 그 미세한 차이가 커다란 결과의 차이를 가져오고 있었다.
타타탓-
파아앙-!
“젠장!”
공을 빼앗기고 마는 도훈.
벌써 100번도 넘게 붙었다.
하지만 한 끝차이로 제쳐내지 못한 게 수십번.
물론 도훈이 제쳐낼 때도 있었으나, 제쳐낸 회수보다도 제쳐내지 못한 게 많았다.
이 정도라면, 자신이 한 수 아래라고 보는 게 맞는 현실.
2부리거를 완벽히 압도했던 자신인데.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정 해야 했다.
‘여기서부턴 아무리 무식하게 덤벼봐야..’
아무리 헤딩해봐야 벽은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벽.
이 계단을 뛰어넘기 위해선, 한 단계 진일보가 필요했다.
바로 초식 수련.
“좀만 기다리슈.”
“기다리마.”
다음을 기약하며 도훈은 다시 혼자서의 수련에 들어갔다.
이제 도훈도 마냥 초심자인 것만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실력이 어느 경지까지 왔는지는 가늠을 할 수가 있었다.
예전과 달랐다.
단순한 수련만 해도 하루하루 늘어가는게 보이던 때와는.
지금은 한 단계 진보한것을 스스로 느끼기 쉽지 않았다.
결국 눈에 보이는 건, 새로운 초식을 습득하거나 기존의 것을 더 연마해 1성을 올리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도훈은 이름도 기억 안나는 1부리거에게 이기기 위해 초식 연마에 들어갔고, 원하던 초식의 1성을 높이는데 5년이 걸렸다.
그리고 돌아온 도훈.
“자, 이제 다음 놈 부르시죠.”
“그래야겠구나.”
돌아온 도훈은 대련 100번에서 94번을 승리했다.
완전한 압도.
‘해냈어.’
도훈이 다시 한 번 자신의 벽을 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기쁘지만은 아니었다.
‘동굴에 처음 들어온 뒤로부터 오늘까지. 난 아무것도 없는 제로에서 1부리거를 압도하는 경지까지 오르는데 거의 35년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다시 세계제일까지 가는데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저 높이 남은 벽들.
그것들을 넘기 위해선 더욱 더 험난한 수련길이 펼쳐져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까.
앞으로가 진짜라는 걸 깨달은 도훈.
그 어려움을 마주한 도훈이지만, 그렇기에 도훈의 수련은 점점 더 기세를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도훈은 벽들을 차례로 부수어 갔다.
프리미어리거, 해리 매과이어.
분데스리거, 조나단 타.
프리메라리거, 라파엘 바란 등등.
다 나열할 수도 없는 상대들과 지독한 대련과 초식 연마를 달려온 도훈.
마지막엔 현존 선수로는 상대할 자가 없어 '전설' 이라 불리우는 선수들까지 대련 상대로 동원되었을 정도.
야신이라는 골키퍼와 페널티킥 대결을 했던 건 지금도 기억에 남았다.
뿐만 아니었다.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까지.
현재 세계의 고수들이 모여있는 강호, 유럽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을 모두 익혔으며, 나아가 축구의 역사와 현재까지 모든 걸 섭렵했다.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들을 넘어서는 건 도훈이었다.
도훈에겐 그들의 재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수련이 있었기에.
그리고 마침내 도훈이 수련을 시작한지 90년이 지났다.
“이제 10년밖에 남지 남았구나.”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도훈의 나이는 여전히 열일곱이고, 바깥 세상 역시 9분이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도훈은 분명 90년이라는 세월을 겪어냈다.
길고 길었다.
축구의 축자도 모르던 소년이,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만 것이다.
“아마도 네 마지막 상대가 될 것이다.”
“한 녀석 더 볼 수 있게 할 겁니다.”
7부리거부터, 파비우 칸나바로까지.
수많은 상대를 격파해온 도훈.
그리고 마지막 10년은 마지막 상대를 꺾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었다.
하지만, 도훈은 이번의 상대를 마지막으로 수련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 다음의 상대까지 보고야 말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프랑코 바레시라는 친구다.”
“수준은?”
“역사적으로 수비수 열손가락 안.”
“좋습니다.”
마지막 10년.
도훈의 각오는 충만했다.
대련하고, 초식을 연마하고,
다시 대련하고, 다시 초식을 연마하고.
이제 도훈은 공을 가지고 돌 사이를 눈 감고도 통과할 수 있었으며, 급류의 제일 아래서부터 상류까지 오르는데 반나절이 걸리지 않았다.
90년보다 치열한 10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찾아오고 있었다.
“벌써 내일이구나.”
축구도사, 호산.
그 평생의 수련을 인정받아 축구신선으로의 등선.
그것이 바로 내일이었다.
그렇다는 건, 또한 도훈이 속세로 돌아가는 날이 바로 내일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인 것 같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그 오랫동안 같이 시간을 보내왔는데.”
“처음 이 곳에 들어왔을 때를 생각하면, 너도 철이 많이 들었어.”
“변하지 않으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니까요. 사실, 이젠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호산이 웃었다.
하지만 도훈은 진심이었다.
그 시절이 생각나지 않았다.
100년전의 기억 대신, 현재 도훈의 머릿속에 가득찬 건 오로지 축구뿐이었다.
“이젠 축구가 좋으냐?”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할 수 있는건 축구뿐이라는 생각일 뿐입니다. 무지 아깝지 않습니까. 여기서 보낸 100년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 최고가 될 겁니다. 이 100년이 쓸모없는 시간이 되지 않도록.”
“좋은 마음가짐이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이 곳에 온 것을 보고 운명이라고 하였다. 비록 시작은 의도치 않았으나, 어쩌면 너의 인생이 이렇게 바뀐 건 운명일지 모른다.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도, 아까워 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도훈아.”
“예.”
“최고가 된다는 건 오직 그 마음가짐으론 부족할 수도 있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축구가 정말 좋아서 심장이 타는 듯 불타오르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심장을 태우는 그 뜨거운 무언가가 없다면,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명심하거라. 가장 중요한 건 기술도, 체력도 아닌 바로 그것이다.”
“스승님의 뜻을 헤아리겠습니다.”
호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강호에 뛰어들 일만 남았다.”
“그렇겠지요.”
“자신 있느냐?”
“자신이 없다면, 지난 100년이 너무 허망되지 않겠습니까. 자신 있습니다.”
도훈의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호산.
“하지만 말이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장이다. 진짜 축구라는 건 동굴에서 홀로 해오던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많이 다를게야. 축구는 11명이서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1명의 선수만이 최고가 될 수 있지요. 저는 그 자리만을 보고 달려갈 뿐입니다.”
“그 한 자리는 나머지 10명의 도움이 없이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두면 좋겠다는게 스승의 노파심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호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이 마지막 대련이구나.”
“아쉽습니다.”
“딱 100번. 100번의 대련을 마치면 시간이 될거다.”
“그럼, 사제간의 인사는 이것을 마지막으로 하시죠.”
호산에게 큰 절을 올리는 도훈.
정말 긴 세월이었다.
호산의 말마따나 의도치는 않았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고 도훈은 변했다.
그리고, 원래 세상에서의 도훈도 변할 것이다.
도훈의 인생이 바뀔 것이다.
“내 인사도 받으시게.”
제자에게 맞절을 올리는 호산.
모든 걸 완성했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었던 비급전승과 제자.
오기와 끈기로 여기까지 와 그 아쉬움을 풀어준 도훈이 호산은 고마울 뿐이었다.
“가자.”
“가겠습니다.”
호산의 눈빛이 다른 이의 그것으로 바뀌었고,
마지막 100번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후우, 후우..”
고개를 숙이고 헐떡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차오른 숨.
마지막 대련이 마침내 끝났다.
그리고, 호산은 사라졌다.
고개를 들자 여지껏 어두웠던 동굴에 한줄기 빛이 내려오고 있었고, 도훈의 앞에 남은 건 책 한 권, 비급뿐이었다.
‘가셨군.’
스승님은 등선했다.
이젠 도사를 넘은 신선이 되어, 높은 곳에서 노니시게 된 것.
그리고, 도훈에겐 바깥세상의 길이 열렸다.
지난 100년동안 그토록 갈구했던 바깥세상, 원래의 세상.
도훈은 비급을 챙긴 뒤 그 길을 걸어 나왔다.
이젠 익숙했던 세상이 낯설게 느껴진다.
어디가 원래 자신의 세상이었는지 헷갈린다.
하지만,
“뭐하다가 이렇게 늦게 오냐? 찾으러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잠깐.. 일이 좀 있었어요.”
“일? 무슨 일?”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 남자의 얼굴을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싱겁긴. 다시 올라가자.”
“예, 아버지.”
아버지라는 익숙치 않은 단어를 듣고 도훈을 요상하게 쳐다보는 아버지.
이제,
새로운 자신을 새로운 세계에 내보일 시간이었다.
‘난 최고가 될 수 있다. 아니, 되어야만 한다.’
마지막 대련 상대는 프랑코 바레시가 아니었다.
이미 5년전 그를 넘어선 도훈의 마지막 100번 대련의 상대는 프란츠 베켄바우어라는 사나이였고, 그와의 100번 대련은 도훈의 81번 승리로 돌아갔다.
< 동굴 (5) > 끝
ⓒ 한명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