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60화 (160/160)

160화

[고정자라...]

강민은 아키로가 된 후, 원래의 세계, 그가 살던 차원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은 그만을 위한 세계에서 수억 번 동안 반복된 삶을 살았다.

고정점, 그가 죽고 나서 돌아가는 시점은 사장이 강민의 머리를 때릴 때였다. 그날을 고정점으로 설정한 건 시스템이었다. 시스템이 발동한 날, 즉 그가 강제로 고정자가 된 날이 그 날이었기 때문에 그날이 고정점이 된 거였다.

그는 이 사실을 몰랐다. 짐작하지도 못했다. 그에겐 첫 번째 삶의 기억, 퀘스트를 하고 몬스터와 싸우고 신을 죽이기 위해 죽은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세상은 그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지형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몬스터가 돌아다녔다. 마나가 있었고, 마법이 있었다. 그가 알던 나라들도 있었지만, 없어진 나라들도 있었다.

[...게다가 내가 영웅이라고?]

지금은 서기 3342년.

그는 아직까지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다 죽었지만, 그를 기념하는 축제는 여전히 남아 성대하게 열렸다. 그 본디 취지는 잊히고 그저 놀기만 하는 날이 되긴 했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기억했고, 그 이야기는 후대로 이어졌다.

[...영웅이 되려고 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그는 일단 납득했다. 2016년에 세상은 바뀌었고, 세상이 멸망할 일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그걸 막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주변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제 뭘 하면 좋을까.]

그는 영혼의 상태였지만,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육체도 만드려면 만들 수 있었다. 좀 오래 걸리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죽었을 테고, 다시 태어나려면...]

세계는 반복된다. 세상이 열리고 태어나기로 결정된 사람들이 모두 태어나고 나면, 그리고 죽기로 결정된 사람들이 모두 죽고 나면, 세상이 닫히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럼 이전에 태어났던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고, 그리고 또 죽는다.

[20억 년 정도인가? 그리고 내가 태어난 게... 또 50억 년... 후우.]

하지만 70억 년을 그대로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아키로는 여기서 벗어난 존재. 그가 하고자 한다면 사고속도를 높여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것도 가능했다.

[일단 10배속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막 아키로가 된 그에게 그 이상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영혼의 모습을 배우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금방 그렇게 될 거였다.

[좋아, 다음 세상이 열릴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보자고.]

마지막 삶에서 그는 그들이 죽고 나서도 100년을 더 살았다. 미련은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기회가 주어지니 가장 먼저 그들 생각이 났다.

[만나면 실망하려나?]

세상이 다시 열린다 해도 그가 아는 사람은 그가 아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를 기억하지 못할 테고, 여기는 마나가 있으니 그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성장할 것이다. 심지어 그는 다른 부모 밑에서 태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예지와는 태어나는 시기가 약간 어긋나서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을 수도 있었다. 아이들도 다른 부모 밑에서 태어나거나 혹은 다음 세상에선 태어나지 않거나 할 터였다. 그가 예지와 맺어진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만나고 싶었다. 한 번쯤은 만나서 과거를 추억해보고 싶었다. 누가 뭐래도,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 + +

[때가 된 건가?]

강민은 세계 저편에서 고요히 있던 자신을 깨우는 손길을 느꼈다. 바로 세상이 자신에게 허락한 원래 육체의 기운이었다.

[흐음... 역시 마나가 있으면 이렇게 되나?]

세상은 강민이 태어났을 때와 많이 달랐다. 원래 서기 1995년에는 콘크리트 건물과 자동차가 다녀야 했는데, 제국력 528년에는 아직도 성벽에 마차가 다니고 있었다. 상공업의 발달은 한참 멀었고,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다.

[부모님은 같은 분이신데... 좀 힘들게 사시는 군.]

그는 태어나자마자 손을 좀 쓰기로 했다. 편하게 사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니지만, 현대인의 감성을 지닌 그에게 중세의 삶은 너무나 더러웠다.

[큭, 그럼 신의 아들이 태어났다고 소문이 나겠군.]

그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일이 커지면 시끄러워지겠지만, 그는 그걸 더 바랐다. 걱정은 없었다. 심심함을 덜어줄 거란 기대감만 넘쳤다. 그는 아키로. 같은 아키로가 아니라면 대적할 수 없는 존재다.

[그나저나, 다른 아키로는 아직 없는 건가?]

그는 태어날 몸으로 들어가기 전에 세상을 한 번 둘러봤지만, 다른 아키로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나처럼 혼자 자거나, 아직 안 타나났거나... 제발 그냥 자는 거여라...]

그는 간절히 바랐다. 혼자 있으니 심심했다. 아키로가 아닌 이들의 삶에 끼어들어가는 것은 질렸다. 그들의 삶은 재미있지만, 그들은 항상 먼저 죽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그와 오랜 시간을, 아키로 급의 시간을 공유할 사람을 원했다.

좀 더 사고 속도를 높여서 차원 밖, 다른 차원의 아키로들과 만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더 현실성이 없는 방법이었다.

[자, 그럼 다시 태어나 볼까?]

"응애! 응애!"

"아들이에요!"

"여보!"

+ + +

강민은 친숙한 영혼들을 많이 만났다. 우려했던 실망감은 없었다. 약간만 달랐으면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실망했을 수도 있겠지만, '마나'라는 것 때문에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이질감보단 '다른 사람'이라는 인식이 더 강했다.

그래도 반가웠다. 어쨌거나 그에게 소중한 영혼들이었으니까.

"민! 민! 민!"

"또 왜요? 이번엔 무슨 일인데요?"

여기서도 강민은 강민이었다. 원래 강찬이 예정된 이름이었는데, 그가 스스로 바꿨다. 다들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그는 고집을 피워 그렇게 했다.

그의 앞에서 호들갑을 떨며 달려온 건 멀리에서 유학 온 소녀, 그레이시였다. 그레이시는 아냐 누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는 아냐 누나보다 어렸지만, 생김새는 비슷했다.

"인형 같은 애가 들어왔어! 최연소 입학이래! 네 기록을 깼어!"

"그래요?"

그는 약간 구미가 당겼다. 적당히 실력을 숨겼지만 기본적으로는 천재인 척해서 최연소로 입학했는데, 그보다 더 빨리 들어온 사람이라고? 진짜 천잰가?

"가 보자. 지금 교장실에 있대!"

"...제가 안 간다고 하면 끌고 가실 거죠?"

"응! 당연하지!"

그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원래 알던 아냐 누나도 좀 푼수 끼가 있었지만, 여기서는 더 했다. 중세 사회에선 좀 더 침묵할 줄 알았는데... 마나 때문인가?

"그럼 가자!"

"네."

일단 궁금하기도 했으니, 그는 흔쾌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교장실이 있는 건물 밖에는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주로 남학생이었다.

"여학생이에요?"

"인형 같은 애라고 했잖아!"

"누나는 어린 애 좋아하니까, 남자인 줄 알았죠."

"...이, 이게!"

그레이시가 발끈하며 강민을 때리려고 했지만, 강민은 슬쩍 피해 버렸다. 그리고는 손을 든다.

"저기, 저기 나와요."

"어, 어디?"

그는 참 쉽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이 금방금방 바뀌는지... 데리고 다니면 심심하진 않아 보였다.

'이러다가 그레이시랑 결혼하려나...'

"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의문을 내뱉고 말았다. 그레이시를 따라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깜짝 놀랄 만한 걸 보았다.

"어?"

"민, 왜 그래?"

그는 그 정체를 그 순간 파악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동안 찾아 헤매던 영혼이 눈앞에 있었다.

예지의 영혼.

그는 기찬과 유비의 영혼을 찾지 못했다. 스스로 희생하여 영혼이 조각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지의 영혼도 찾지 못했다. 그녀는 병에 걸려 죽었다고 했으니 다시 시작한 세상에서는 태어났어야 했다. 하지만 태어난 후 지금까지 그가 지구 전역을 계속 감시해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이유도 보자마자 알았다.

"...아키로?"

"...!"

건물에서 나온 12-3세 정도 되는 소녀는 앳됐지만, 예지와 닮았다. 그녀도 강민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동그랗게 뜬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솟아올랐다.

"...오빠!"

"...어?"

와락.

강민은 덮치다시피 달려드는 소녀를 부드럽게 안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오빠라고!?'

"으아아아앙."

소녀는 안기자마자 펑펑 울었다. 그는 우는 소녀를 달랬다. 주위는 다 놀라는 중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건 그레이시로, 그녀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을 완성할 수 없었다.

"저, 저, 저."

"누나, 잠깐만 실례할게요."

파앗.

강민은 벙찐 그레이시를 두고, 소녀와 함께 사라졌다.

+ + +

"으아아아앙."

소녀는 한참 동안이나 울었다. 정말 끝도 없이 울었다. 그래서 그는 시간을 느리게 가게 만들었다. 이러다간 하루 종일 울기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좀 괜찮아졌어?"

"흑, 윽, 끅.... 네. 끅."

"...예지 맞아?"

"네. 오빠는요? 강민이 맞아요?"

강민은 예지의 물음에 잠깐 멈칫했다. 느낌상 예지가 아는 강민과 자신은 달랐다. 그래도 일단은 같은 영혼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일단은. 어떻게 아키로가 된 거야?"

"...고정자가 됐어요."

"응? 왜?"

"오빠의 죽음을, 오빠가 제게 준 사랑을 잊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눈을 떠보니 오빠가 죽었던 날이었어요..."

예지는 학교 뒷산 큰 나무 아래에서 강민의 품에 안겨 자신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풀어냈다. 그녀는 수천억 번 정도 삶을 반복하고 나서야 아키로가 되었다.

"...고생했네. 만나고 싶었는데, 왜 그렇게 자신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오빠가 죽었으니까, 다 귀찮아져서... 있는 줄 알았으면 안 그랬을 텐데... 좀 찾아볼 걸... 그런데 오빠는 어떻게 살아 있는 거예요?"

"나? 나는 잘 모르겠어. 이 세계의 기억도 없고... 아, 이거 먼저 얘기했어야 했는데. 나는 네가 알던 강민이 아닐 거야. 나는 희생한 기억이 없어."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예지는 좀 전부터 강민의 반응에서 거리감을 느끼긴 했지만, 이런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이번엔 강민이 그의 이야기를 했다. 고정자로 살았던 이야기와, 자신의 고정점에 대해서.

예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진정되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고, 충격적이었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게 된 건데... 괜찮아?"

"괜찮아요. 그러니까 결국 제가 오빠 부인이었다는 거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고요? 정확하게 따지면 그렇죠.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면 벌써 아냐 언니를 좋아하고 있어요?"

"그건 아니야. 아냐 누나는 아직 누나일 뿐이고, 너를 싫어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내가 아는 예지는, 그 예지로 남겨두고 싶어."

예지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녀도 자신을 위해 희생한 강민과 눈앞에 있는 강민을 동일 개체로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그것과는 별개로, '강민'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처음만난 아키로이기도 했고, 전번 세상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품이 너무 편안했다. 마침 집에 돌아온 것처럼.

"음.. 좋아요. 그럼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요?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강민과 전예지로서. 그건 괜찮은 거죠?"

"응? 뭐, 그거야 상관없는데... 꼭 너를 선택할 거라는 보장은 없는데?"

"...허, 초장부터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

"뭐, 사실이니까."

"흥, 두고 봐요. 제 매력에 푹 빠지게 해서 제가 차 버릴 테니까."

"그거 재밌겠는데?"

아직까지 예지는 강민의 품에 안겨 있고, 강민은 거부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둘의 관계가 크게 바뀔 것 같진 않았다. 그들이 서로에게 과거의 기억을 투영한다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적었다.

강민은 과거의 기억이 추억 정도로만 남아 있었고, 예지는 그저 기억하기 위해서 고정자가 되었던 거니까.

‘고마워요. 오빠.’

그녀에게 있어 이 만남은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남은 영겁의 시간을 홀로 살아가리라 다짐했는데, 같이 갈만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런 기쁨을 준 세상과, 강민의 영혼에.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은 강민에게도.

"그럼 돌아갈까? 누나가 기다릴 거야."

"...잠깐만요! 언니는 그냥 누나라면서요? 왜 그렇게 신경 써요?"

"...음... 그렇게 따지면 너는 오늘 처음만난 사람인데?"

"...아, 죄송해요. 그럼 일단 인사부터 할까요?"

"응?"

그제야 예지는 강민의 품에서 벗어나 똑바로 섰다. 그녀는 얼굴에 생긴 눈물 자국을 없애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치마를 살짝 잡고 인사를 했다.

"전예지라고 합니다. 선배님."

"...크큭.

"선배님?"

"아, 안녕. 난 강민이야. 잘 부탁해."

"네!"

둘은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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