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시야에 무지개빛이 가득 찼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앞엔 늘 보던 풍경이 있었다.
콘크리트로 된 건물, 너비 2m 정도 되는 보도블록, 꽃잎이 떨어지고 있는 가로수, 때가 잔뜩 낀 도로,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 노란 중앙선, 다시 차, 도로, 가로수, 인도, 건물...
전형적인 한국의 도시였다. 도로안내표지판에 신촌로터리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 신촌 근처인 듯했다.
물론, 진짜 신촌 근처는 아니었다. 이곳은 만들어진 도시. 신이 흡수한 이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도시였다. 이곳은 그의 영혼 안이었다.
부르르릉.
도로에는 차도 다니고, 인도에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선 건물과 자동차에서 나는 빛과 다른 색의 빛이 났다.
내 눈은 여전히 영혼의 본질을 봤다. 길을 걷는 사람이나, 차를 타고 움직이는 사람 등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색의 빛을 띠고 있었다. RGB 수준으로 나뉘는 지, 같은 노란색이라도 사람마다 달랐다.
반면에 자동차, 건물, 도로 등은 전부 같은 색이었다. 칠흑과 같은 검은색. 신, 로호프의 색이었다.
로호프의 이름은 들어오면서 바로 알았다. 일단은 나도 신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표층 의식 정도는 공유했다. 거기서 알아낸 이름이었다.
그리고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당연히 내 의식도 공유된다. 그러니 그가 나를 찾아오기 전에 먼저 시작해야 했다.
'들어가면, 신 안에 있는 영혼을 죽이십시오. 죽일 수 있으면 성공이고, 죽일 수 없다면 실패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어질 겁니다. 밖에서 하던 생각이 안에서도 발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쳇바퀴 돌듯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방식입니다. 스스로는 확인하기 힘드실 겁니다. 당신의 영혼이 완전히 제압되지 않았다는 걸 아는 확실한 방법은 신 안에 있는 다른 영혼을 죽이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영혼을 지배하는 자가 신에서 당신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게 아키로가 신이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신이 나타나고 나서 다리아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그중 일부는 내가 아키로 마스터가 되면서 확인하기도 했다.
지체할 것 없이 내 영혼을 가지고 검을 만들어 길을 가던 사람 하나를 찔렀다.
푸욱.
검은색 검강에 심장이 찔린 사람은 찌른 곳을 중심으로 물렁해지다가 이내 사라져 검을 통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영혼은 들어오면서 그가 살아왔던 기억을 낱낱이 내게 넘겨주었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시간은 순간이었지만, 그 찰나의 시간동안 나는 그의 삶을 산 것과 같은 기분을 맛봤다. 아니, 한 40년 살다 온 게 분명했다. 정신은 금세 원래 신촌보다 한산한 로호프의 신촌으로 돌아왔지만, 분명 수많은 걸 느꼈다.
어쨌든... 됐다!
분명히 영혼 하나를 흡수했다. 흡수된 영혼은 전체적으로 보면 신 안에 속해 있었지만, 국지적으로 보면 내 영혼 안에 들어왔다. 그렇다는 건, 내가 신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우웅.
흡수한 영혼을 써서 왼손에 검을 하나 더 만들었다. 푸른색의 검강이 만들어졌다. 푸른 검강에서 느껴지는 힘은 검은색 검강에서 느껴지는 것보다 약했다. 반쪽 아키로지만, 내가 아키로라 영혼의 격이 높았다. 하지만 금세 따라잡을 것이다. 영혼을 흡수해서 계속 밀어 넣으면 되니까.
푹, 푹, 푹.
양 손의 검강을 늘려 지나가던 행인을 한 명씩 찌르다가,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방법을 바꾸었다. 파이어 볼을 만들 듯, 영혼을 응축해서 도로 한 가운데로 던졌다.
콰아아앙!
8차선 도로 중앙에서 터진 영혼구는 사방 1km에 영향을 미쳤다. 수십의 영혼이 한꺼번에 내게 날아왔다.
웅웅웅웅.
내 영혼의 전체 용량이 순식간에 커졌다. 신의 영혼 안에 들어오면서 끊겼지만, 70억과 연결되어 있을 때완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힘을 빌려 쓸 수 있다는 느낌이라 경우에 따라서는 못 쓸 각오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건 온전히 내 힘이라, 완전히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내 영혼은 고통을 받아야 했다. 수십 명의 삶을 한 번에 받아들여 처리하는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로 부족했다. 로호프를 상대하기 위해선 더 고통 받더라도, 더 많은 영혼을 흡수해야 했다. 적어도 로호프가 흡수한 영혼의 반절은 흡수해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최소 조 단위의 영혼은 흡수해야 했다. 그 때까지 내 영혼이 버텨줄지 의문이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속도론 안 된다. 조금 있으면 로호프가 이상을 눈치 채고 정리하러 올 텐데, 그때가 되면 늦는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떻게 할까. 이 이상의 폭발을 만들 순 있지만, 그건 해결책이 아니었다. 폭발의 규모가 문제가 아니라, 장소가 문제였다. 이 신촌 거리에는 사람이 너무 없었다. 아니, 서울 자체에 사람이 너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도시로 넘어가는 게 대안이 되기에도 어려웠다. 다른 도시로 넘어가는 시간은 둘째치더라도, 지구에서 신에게 흡수한 사람 숫자가 적었다. 5천만 명이 누구 애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조 단위 숫자에 비하면 길가에 개미 정도의 존재인 것이다.
그 순간 눈앞에 신이 나타났다. 자주 보는 기생오라비, 재수 없는 면상이 나타났다. 예상보다 빠른 등장이었다.
[이번 이레귤러는 꽤 인상적이군.]
이번에는 분신체였다. 다행히 분신체가 따로 흡수하고 있는 영혼은 없었다. 오직 신 그 자체.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강했다. 그는 이미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다. 수조, 수억의 영혼을 흡수한 만큼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도 수천만의 영혼을 흡수한 정도로는 강했다.
그러나 아직은 할 만했다. 나도 만만치 않았다. 이 차원을 기준으로 한 70억의 영혼은 끊어졌지만, 내 영혼을 기준으로 한 100명의 영혼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도 70억처럼 일부만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 온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내가 여기 와서 직접 흡수한 영혼들처럼. 게다가 그 100명의 영혼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아키로가 되지는 못했어도 그에 근접한 영혼들이었다.
베르트랑부터 정철까지.
그들의 힘과 이 안에서 흡수한 몇 십 명의 힘, 그리고 내 힘을 더해 나는 흰색 번개가 되었다.
파지지직.
번개는 발생하는 순간 그를 뚫었다. 지구에 있을 때처럼 수십 개의 벽이 나를 가로막았지만, 이번에는 그 모든 걸 뚫고, 그의 영혼까지 뚫어 버렸다.
[뭐지... 이건...]
그는 의문을 남기고 다른 영혼들처럼 뭉개지더니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상이 깨져나갔다.
파칫, 파칫, 쩍, 쩍.
하늘이 강화유리처럼 형태를 유지하며 깨지다가 이윽고 조각조각 난 것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 뒤에는 또 무지갯빛 하늘이 있었다. 나는 그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무지갯빛하늘은 마치 물처럼 나를 감쌌고, 나는 꽤 긴 시간 무지갯빛 바다를 거슬러 올라가 밖으로 나왔다.
파아앗.
먼저 푸른 하늘이 보였다. 하늘 아래는 들판과 산이 있었고, 그 아래에 중세에나 있을 법한 성벽이 그 위용을 자랑했다.
고개를 내려 아래쪽, 내가 나왔을 것으로 생각되는 지점을 바라보았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잡초만이 무성할 뿐.
아, 다른 게 있었다.
조금 전의 세상이 사람을 제외하고 온통 검은 빛을 띠었다면, 이곳은 온통 무지갯빛이었다.
그 말은...
콰아앙! 퍼버버버벙.
수십 개의 영혼구를 던져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터트렸다. 땅이 뒤집어지고, 성벽이 무너졌다. 잡초들이 폭발에 노아 사라지고, 산이 크게 흔들리며 생살을 드러냈다.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쾅! 쾅! 쾅! 쾅!
맨틀 정도는 볼 기세로 땅을 파헤쳤다. 신기하게도 파헤쳐진 땅은 공중에서 빛을 내며 사라졌다. 주변의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빛이 되어 사라지고, 내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의 영혼이 내 안에서 내 힘이 되었고, 나는 그 힘을 바탕으로 더 넓은 영역에 공격을 가했다.
그러기를 몇 십초, 세상이 다시 조각나기 시작했다. 잠깐 신의 존재감이 강해졌었는데, 또 분신체가 나타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말도 한 번 못하고 사라져 버렸지만.
전과 같이 무지갯빛 하늘이 드러났고, 나는 그 하늘을 통해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파아앗.
새로 도착한 곳은 배 같았다. 복도가 좁고, 길었고, 철제로 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온통 무지갯빛 천지였다. 그 말은 여기도 모든 재료가 다른 영혼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내가 좀 전에 있던 세상 같은 게 최소 단위로서 이 세상을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좀 전 세계에서 나는 마구잡이로 공격했고, 한 번 공격에 작게는 수십, 많게는 수만의 영혼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퍼버버버벙.
한 번에 수백만 이상의 영혼이 흡수되었다. 쉬지 않고, 계속 주변을 파괴했다. 영혼에 내 의지를 박아서 내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내 아래에 복속시켰다.
쾅, 쾅, 쾅.
배가 부서졌다. 밖은 우주였다. 배는 배였는데, 우주선이었다. 우주도 온통 무지갯빛이었다. 우주에 떠도는 먼지들이 죄다 빛을 내고 있었다.
후으응응.
영혼은 끊임없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건 묘한 쾌감을 줬다. 처음에는 별로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는 걸 싫어하는 것만큼, 개개의 영혼들도 그럴 거라 생각했으니까. 비록 신의 아래에서 해방시킨다는 명목이 있었지만, 내가 그 대신 그들의 절대자가 된다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러나 계속 반복되니, 생각이 점점 바뀌어졌다. 정확하게는 그들에게서 강제로 힘을 뽑아 쓸수록 생각이 바뀌어갔다.
신이 했던 것처럼 일상으로만 생각이 향하게 하고서, 나머지 힘을 내 것처럼 쓸 수도 있지만, 그들을 쾌락으로 몰아넣고 거기서 나오는 고양감을 내 힘으로 쓸 수 도 있었다.
나는 그 방법을 사용했는데, 내가 마치 신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만든 천국에서 사람들은 내 뜻에 따라 기뻐하며, 내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들의 기쁨이 한데 모여 내게 계속 전달되니,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니까, 아니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니까 기분이 좋아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게다가 흡수된 영혼이 늘어나고,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커지고, 파괴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나는 내가 커지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내가 커지는 건 아니고, 그저 입고 있는 옷이 커질 뿐이었지만, 그 옷이 내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있으니 차이가 있는 것인가?
나는 이미 지구가 있던 차원보다 커져 있었다. 나는 이미 100억 정도의 영혼을 흡수했다. 이대로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내가 대신 신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로호프를 흡수하고서...
으윽.
하지만 그런 나를 제지하는 고통이 있었다. 완벽한 아키로, 즉 신이라면 겪지 않을 고통이겠지만, 시스템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수십만의 영혼이 백분의 몇초 간격으로 내 통제 안으로 계속 들어오니까, 내 영혼은 쉴 새 없이 강제로 넓혀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죽음과 맞먹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순간순간마다 영원의 시간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걸 반복하는 것이다.
'너는 신이 아니다.'
70억 영혼과의 연결은 끊어졌지만, 아직도 나를 아키로로 유지시켜 주고 있는 시스템이 내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있었다. 내 영혼이 깨어지지 않는 건 시스템이 나를 유지시켜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조차도 차원 융합이 완료되면 사라져 버리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내 정신이 유지되고 있는 건, 내 자아가 유지되고 있는 건 시스템의 탓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유지 시켜주는 건 영혼의 강도, 그 외형 뿐, 그 안은 건드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은 아키로가 아니라면 절대로 버티지 못할 일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아니 오늘 아침, 아주 먼 일인 것 같지만, 이미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자아가 깨어졌어야 했다. 70억이 전해주는 생각의 파도에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내 고유 능력은 뭘까?
후보자들은 다들 고유 능력이 있었다. 중령은 정신계, 기찬은 보드를 소환했고, 유비는 얼음을 다루었다. 그러나 나는 퀘스트를 반복하는 능력 말고는 없었다.
그 차이를 알았을 때, 내 능력을 부활이나 회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도 죽으면 다시 돌아가는 건 아닐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아닌 듯했다. 부활, 아니 정확하게는 회귀 능력이 있는 건 맞지만, 그건 부가적인 능력이었다.
단 하나를 위한.
[고정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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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