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로호프>
퀘스트에서 나오니 느낌이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일단 내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생각과 감정이 무지막지하게 밀려 들어왔다.
'오늘 날씨 좋네.'
'하아... 출근해야 해.'
'몬스터야! 도망쳐!'
'여보, 아들이야. 정말 수고했어.'
'제시... 도망쳐, 제시...'
'크아아악!'
기쁨, 슬픔, 사랑, 즐거움... 죽음을 앞둔 사람의 절절한 감정도, 생명이 태어날 때의 환희도... 세상 모든 감정과 모든 일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다.
70억.
70억의 삶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다.
내 뇌, 아니 영혼은 무시무시한 정보를 처리해야 했다. 따라갈 수 없었다. 고작해야 그들의 일부, 현재 시점의 생각과 감정만을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인데 그랬다.
그 정보를 처리하느라 내 생각은 굉장히 느리게 진행되었다. 그래도 정신을 잃진 않았다. 자아를 잊어버리지도 않았다. 수십 번도 더 겪은 죽음의 경험이 나를 견디게 해줬다.
그리고 예지가 있으니까. 설사 내 자아가 사라진다고 해도, 예지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거, 그거 하나만 있으면 나는 분명 회복될 수 있다. 내가 모든 기억을 잃고 이상해 진다해도, 그녀가 나를 되돌려 줄 거다. 내가 그녀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다. 나는 그녀를 믿고 있다.
어쨌든, 이대로는 일어날 수도 없었다. 머릿속의 명령이 육체에 닿는 그 간단한 과정을 처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일단 분심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마음을 나눠 한쪽에 처리를 맡기고, 다른 한쪽에 육체의 통제를 맡겼다. 영혼을 처리하는 게 조금 늦어지기야 하겠지만, 그제야 움직일 수 있었다.
눈을 떴다. 세상이 달리 보였다. 모든 것에 일렁이는 형체가 겹쳐 보였다. 천장에도, 이불에도, 침대에도, 침대 옆 스탠드에도, 책장에도, 창문과 창틀에도, 심지어는 공기 원자 하나하나에까지 일렁이는 투명한 것이 겹쳐 보였다. 온 세상은 완벽한 지성을 갖추지 못한 영혼의 조각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은 그 나름대로 일부의 감정과 일부의 이성을 가지고 내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비로웠다.
"으음."
예지의 위에도 생명의 녹색 빛이 겹쳐져 있었다. 편안하게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과 녹색의 빛은 잘 어울렸다. 그녀의 몸 위에는 하나의 빛이 더 있었다. 녹색 빛과 적절히 어우러진 푸른 바다의 빛과 시원한 하늘의 빛이 그녀의 복부 위에서 빛났다.
하나와 두리.
쌍둥이의 태명이었다. 예지가 나중에 제대로 짓기로 했는데... 이대로 갈지도 모르겠다.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라며...
[아빠!]
[아빠!]
하나와 두리는 아직 이것 밖에 못했다. '아빠'라는 것도 내가 재구성한 거지, 실제로는 그냥 감각이었다. 나를 아빠로 인지하는 수준일 뿐이었다.
이불 아래로 손을 넣어 예지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은 매끈한 배지만, 10개월 후에는 남산만큼 커질 것이다. 내 손길에 바다빛과 하늘빛이 좌우로 움직였다.
"으음."
[엄마 깨니까, 나중에 하자.]
[우우.]
[우우.]
아이들이 투정을 부렸지만, 나는 손을 뗐다. 자식도 중요하지만, 역시나 예지가 먼저였다. 그녀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넘겼다. 내 손길이 따뜻한지, 그녀가 얼굴을 손에 비벼댔다.
귀여워서 웃었는데, 슬퍼서 또 웃었다.
그녀를 두고 떠나야 하다니...
!!
슬픔과 기쁨 사이를 오가던 나를 깨운 건 나눠진 마음이었다. 마음은 경고를 보내왔다. 지금 움직여야 한다고.
예지를 흔들어 깨웠다.
"으음... 오빠?"
쪽.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녀의 입술 감촉을 한 번 더 머리에 넣었다. 다음은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하나와 두리가 반응했다. 이것도 머릿속에 넣었다.
"...오빠?"
"미안해..."
"그럼 벌써?"
"응.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네..."
"...흑, 뭐, 이, 이게 무... 끅, 흐으윽."
그녀를 일으켜 품에 안았다. 그녀의 따뜻함을 몸에 새겼다. 영혼에 새겼다.
"흐아아아아앙."
"애들을 부탁할게."
"흐아아앙."
"...대답, 안 해 줄 거야...?"
"흐으윽. 윽, 끅."
!!
한쪽 마음이 계속 경고를 보내왔다. 지금 나가야 했다.
"예지야, 이제 갈게."
"끅, 가, 가지 마요! 여기서, 그냥... 흐흑."
그녀가 나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걸로는 나를 붙잡을 수 없었다. 내 몸이 희미해졌고, 예지가 당황했다.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흐으윽, 오, 오빠, 아직, 아직... 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 애들은 잘 키울 테니까... 흑, 오빠!"
다행히 그녀의 마지막 말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울음도.
"흐아아아아앙."
자, 이제 이기자. 이겨야 해. 이겨야, 예지가, 하나와 두리가, 부모님이 살아남을 수 있다.
+ + +
검은 바탕에 온갖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원래의 우주는 이렇게 밝지 않지만, 내 눈은 우주에 떠다니는 온갖 영혼의 조각들을 보기에 대낮과 다름이 없었다. 공기는 없었지만, 공기를 걱정할 상태는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육체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우주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우우우웅.
물리적 소리가 아닌, 영적 세계에서의 울림이 내가 도착한 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가 나타났다.
파아앗.
나타난 건 행성이었다. 지구와 같이 바다와 대기가 있는 듯, 행성은 푸르렀다.
다른 차원의 행성.
나를 마지막으로 모든 후보자들이 100개의 퀘스트를 다 완료했으니, 차원이 최종 융합 단계에 들어선 거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내가 계속 죽으면서 퀘스트 진행을 늦추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우리 쪽에서 융합을 늦출 수 있듯, 저 쪽에서도 융합을 가속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까. 내가 늦출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고, 그 시간은 아키로가 되기엔 짧았다. 100개의 퀘스트를 깨고, 시스템의 보정으로 완벽한 아키로가 되는 것이 가능성이 높았다.
마지막 대역전의 가능성, 승리의 가능성이!
우우우웅.
행성이 나타난 건 여기만은 아니었다. 차원을 몇 개나 흡수해 온 신의 차원엔 행성이 수십 개가 넘었다. 그 수십 개의 행성 하나하나가 우리 우주 이곳저곳에 나타났다.
모든 것은 영혼들이 알려 주었다. 나는 지구에 사는 70억 뿐 아니라, 전 우주에 있는 모든 영혼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영혼의 조각들은 생각과 감정이 완전치 않아 처음엔 그들이 전달하는 의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내 영혼이 깨지고 넓어지기를 반복하며 나의 정보처리속도가 높아졌다. 그러자 우주의 모든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있는 이곳은 지구에서 100만 광년 쯤 떨어진 곳이지만, 지구의 상황도 눈앞에서 보듯 보였다.
쿠르르릉.
지구에는 새로운 지형이 생겨나고 있었다. 다른 차원의 행성이 직접 지구에 융합한 탓이었다.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사람들이 놀라 호들갑을 떨었지만, 융합 시엔 알아서 보호가 되는 듯했다. 그리고 지구에 융합된 행성엔 후보자들을 위협할 만한 개체가 없었다.
다행이었다. 그런 개체가 있었다면, 내가 기껏 신을 죽여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지구는 괴수에 멸망할 테니까. 그럼 예지도, 하나와 두리도 죽는다.
내가 돌아가면 어떤 강한 녀석이 와도 지킬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움직일 수 없었다. 왜냐면, 여기서 돌아가는 건 신을 끌어들이는 일이 되니까.
[너군.]
신의 본체는 분신체와 같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 다른 점은 없었다. 다만 내가 보는 눈이 달라져서, 그가 전보다 눈부셔 보였다.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수많은 빛이 합쳐져서 그의 전신에서 흰 빛이 나고 있었는데, 몇 개의 빛이 합쳐졌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10억? 아니, 1000억? 아니... 조 단위가 넘어가는 게 확실했다.
70억의 정신과 교류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잠깐 품어 보기도 했다. 70억이 가진 힘의 일부만 쓸 수 있겠지만, 대략 1, 2억 영혼의 온전한 힘을 쓸 수 있는 거랑 맞먹을 테니까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봐야 신을 죽일 순 없을 테지만, 그를 무한정 추방시킬 수는 있었다.
그런데 역시나 희망사항이었다.
조 단위라니... 그동안 다녀 본 평행 세계를 생각해 보면, 우리 세계의 지성체 수가 다른 세계보다 많은 건 확실했다. 하지만 신은 그것조차도 훌쩍 뛰어넘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차원을 집어 먹은 걸까? 그러고도 왜 또 우리 세계를 집어 삼키려는 걸까.
[시험을 통과하고 아키로가 됐나? ...하지만 그래봐야 반쪽짜리지. 너는 여전히 필멸자다. 조용히 내 안에 들어와 내 힘이 되거라.]
그는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는 빛의 선이 움직였다. 선은 내 목을 자르고, 내 뒤에 있는 행성을 자르고, 그 뒤에 있는 항성을 자르며 폭발시켰다.
그의 힘이 압도적이라면, 이렇게 될 줄은 애초에 예상했다. 그 때문에 우주로 나와 그를 맞은 것이다. 이 일격에 지구가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그의 손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놀라울 뿐.
[싱겁군.]
70억 영혼과 함께하는 지금 상태에선 원래 목이 잘린다고 죽지 않는다. 그러나 신의 공격은 단순히 목을 자른 게 아니라, 내 영혼과 육체의 연결이 끊어 버리는 즉사기였다.
나는 죽었고, 내 영혼은 빠르게 신의 영혼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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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