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53화 (153/160)

153화

<정철>

96번째.

눈발이 날렸다. 바람은 거셌다. 눈은 바람을 타고 몸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바람막이가 소용이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큰 눈덩이로 바람막이를 치우고, 그 틈으로 칼날 같은 바람이 눈을 끌고 들어와 부어 버렸다. 앞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푹, 푹.

한 남자가 그 눈보라를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초라했다. 바람막이라고 두른 거적때기는 곳곳이 찢어져 실제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닭털 같은 거라도 채워 넣은 털옷은 없었다. 그의 작은 몸뚱이를 세상에서 가려주고 있는 건 얇은 천 쪼가리가 다였다. 그나마 두 겹이라는 게 위안이었지만, 심리적인 효과 이상은 없었다. 발엔 가죽신을 신고 있었지만, 이미 신발의 역할 따윈 사라지고 없었다. 두꺼운 털 장화를 신었어도 소용없을 눈보라였다. 그의 발은 이미 오래전부터 감각이 없었다.

푹, 푹.

그는 분명 나아가려고 발을 내딛었지만, 발은 50cm도 나아가지 못했다. 아니, 그것조차도 무리였다. 디딜 때쯤엔 바람에 밀려 30cm앞에 착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쯤 되면 걷는다고 하기 힘들었다. 앞서 말했지만, 버티고 서 있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푹, 푹.

그래도 그는 나아갔다. 50cm든, 30cm든, 10cm든 쉬지 않고 나아갔다. 손발의 감각은 이미 없고, 옷 안에도 눈으로 가득 찼고, 앞은 보이지 않아 방향도 확실하지 않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레아야, 조금만 기다려. 아빠가 곧 갈 테니까.'

그의 딸은 병에 걸려 있었다.

숲의 장난.

초기에는 감기와 비슷한 병이었다. 기침을 하고, 열이 난다. 중반까지도 비슷했다. 몸살기가 동반되지만, 조금 심한 감기라고 생각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말기에 병은 갑자기 돌변한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고열과, 폐를 다 토해낼 것 같은 기침, 온몸의 수분을 다 뺄 듯이 땀을 흘려대는 무서운 병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말기의 증상은 하루면 없어지고, 그다음 날엔 언제 그랬냐는 듯 원상태로 회복된다.

그래서 '장난'이란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모든 게 그렇든 예외가 있었다. 이 병에 걸려 죽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어린 아이들이 걸렸을 때다. 어른들도 한 번 앓고 나면 며칠 고생해야할 정도로, 마지막 고열과 기침은 심했다. 아이들은 그 마지막 하루를 견디지 못했다. 아이들은 이 병에 잘 걸리지 않지만, 걸리면 십중팔구는 고열과 기침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딸은 이 병에 걸려 있었다.

푹, 푹.

반 보나 더 나아갈까. 그의 위치는 눈보라에 가려 판별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이 눈 속을 뚫고 산을 넘어가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만 자생하는 레드 빈(Red Bean)을 따서 돌아와야 했다. 레드 빈은 숲의 장난을 치료할 수 유일한 치료제였다. 그걸 제하면 대신관의 치유만이 효과가 있는데, 가난한 그는 대신관을 부를 수 없었다.

푹, 푹.

레드 빈은 귀중한 치료제는 아니었다. 자생하는 곳이 한정적이긴 해도, 희귀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게 마을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데에 있었다. 거기에 하필이면 겨울이고, 레드 빈의 자생지에 가려면 눈보라를 뚫고 가야한다는 건 더 큰 문제였다.

빙룡의 숨결(Breath of Ice Dragon).

북부 끝단 지역에 부는 눈보라는 악명이 높았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지만, 매년 겨울 눈보라에 얼어 죽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푹, 푹.

초라한 남자, 그람은 거대한 자연에 맞서서 생명을 불태우는 중이었다. 자신에게서 난 어린 것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이걸 도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드시 성공할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었다.

후우웅.

그런 절박한 심정 때문일까, 그는 단계를 뛰어넘어 영혼의 힘을 쓰고 있었다. 초라한 차림에도 이 눈보라를 버티고 있었던 건 그런 이유였다. 다만, 분명히 무리한 개방이었고, 이후에 어떤 영향을 받을지는 몰랐다. 알았더라도 무조건 이렇게 했을 게 뻔했지만.

나는 그의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

온몸을 얼게 만드는 눈의 무게감, 날라가 버릴 것만 같은 바람의 압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기는 아버지의 사랑.

'레아야, 아빠가 구해 줄게.'

장장 10시간, 딸을 구하겠다는 아버지의 의지는 끝내 승리했다. 그는 레드 빈을 구했고,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사지엔 이미 감각이 없었지만, 그는 딸이 살아났다는 소식에 그저 미소만 지었다. 바보 같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 + +

후일담.

그람은 죽고 없었다. 동상 때문에 죽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천수를 누리지도 못했다. 그 날 영혼의 힘을 갖다 쓴 탓에, 일찍 죽어 버린 것이다.

휘이이익.

'아버지는 잘 계실까?'

레아도 이미 30대가 되어, 당시의 레아만 한 아이를 기르고 있었다. 그녀는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빙룡의 숨결을 보며 그람을 떠올렸다. 그녀의 아버지가 행한 전설적인 일화는 아직까지 마을에서 회자됐다.

"엄마! 또 할아버지 생각하지?"

"응, 맞아. 할아버지 이야기 해줄까?"

레아의 아들, 레디는 지겹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할아버지가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는 이야기 하려고 그러지?"

"우와, 어떻게 알았어?"

"겨울이면 매일 하는 데 왜 그걸 몰라."

"그래도 들어 봐."

"싫어. 이제 나도 할 수 있거든?"

레아는 호기롭게 얘기하는 레디를 놀랍게 쳐다봤다.

"그럼, 레디가 한 번 해봐. 엄마가 들어볼 테니까."

"응? 그럼 내가.... 에헴."

그녀는 아들이 어떻게 시작할 지 몰라서 일부러 헛기침을 하는 게 다 보였다. 그녀는 엄마였으니까.

"그, 아, 아니,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그게 그러니까..."

그녀가 빙긋이 웃자, 레디는 더욱 당황했다. 소년은 급하게 머리를 짜내, 겨울마다 들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소년의 입장에서 재구성된 그람의 이야기는 원본과는 상이했다. 그걸 듣는 레아의 얼굴엔 더 큰 미소가 피어났다.

'고마워요, 아빠.'

+ + +

97번째.

"바이탈 계속 떨어집니다!"

"어디야! 빨리 찾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지호는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하기 위해 수술을 받고 있었다. 지금 문제가 일어난 쪽은 지호 쪽이었다. 의료진 쪽에서 실수를 했다. 간을 절제하다가 혈관을 잘못 찌른 것이다. 이대로 가면 지호는 죽을 운명이었다. 마취에 취해 아직 정신이 없는 그는 만족할 지도 모르겠다. 위험하다는 건 인지하고 시작한 일이었고, 그는 죽어도 아버지는 살 테니.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내 영혼과 지호의 영혼을 자극해서 출혈 부위를 막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빛이 나도록 조정했다.

저번 퀘스트 부터, 그냥 내 맘대로 영혼의 힘을 이용할 수 있었다. 시스템이 주는 힘은 쓸 수 없었지만,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 할 수 있었다.

"발견했습니다!"

"조치해! 뭐하는 거야!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죄송합니다."

실수한 의사에게 벌을 주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사는 게 우선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다음번에는 좋은 의사가 되길 바랄 뿐.

다음 날 이어진 후일담에서 건강해진 부자는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98번째

"자, 아~."

환자복을 입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 영숙은 앞에 있는 남자의 말에 입을 벌렸다. 남자는 그녀의 아들인 성규였다. 그도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50 후반. 예전 같았으면 같이 골골 거리고 있어야 할 나이였다.

스읍. 주르륵.

성규는 영숙이 먹다가 반쯤 흘린 죽을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그는 다시 죽을 한 숟가락 펐다.

"자, 아~."

영숙은 그 말에 다시 입을 벌렸다. 하지만 입 안엔 음식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입이 열리며 일부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안 씹고 뭐하세요. 드셔야지. 자, 꿀꺽, 꾸울꺽."

성규가 과장된 몸짓으로 침을 삼키자, 영숙도 어색하게 따라했다. 행동은 어색했지만, 다시 벌어진 입에는 음식이 없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이 상황에서도 먹을 것에 대한 습관은 여전히 남아 있는 덕분이었다. 그럴 때면 성규는 인간이란 족속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도, 동시에 감사했다. 영숙은 아직 죽이라도 넘길 수 있는 상태였으니까.

"옳지, 잘 했어요. 자, 이제 조금 남았으니까, 이거 다 먹으면 쉬어요. 알겠죠?"

"아, 앙."

영숙은 '응'이라고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입이 벌려진 상태라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성규는 들고 있는 죽 한 숟갈을 영숙의 입으로 가져갔다.

스읍, 주르륵.

다시 죽이 절반쯤 입가의 주름을 따라 흘러내렸다.

여기는 요양병원이었다. 따라서 성규가 와서 밥을 먹일 필요가 없었다. 병실마다 간병인들이 배정되어 있고, 식사가 어려운 사람들은 간병인들이 도와주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성규는 왔다. 아침, 점심, 저녁... 최소 하루 두 끼는 직접 와서 영숙의 시중을 들었다.

사람들은 요즘 들어 보기 드문 사람이라며 칭찬했다. 빈 말이 아니었다. 영숙이 입원해 있는 병실만 해도 알 수 있었다. 환자의 가족들은 한 주에 한 번 정도만 찾아오는 게 전부였다. 안 오면 안 왔지, 그 이상 오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여건이 안 되서 안 오는 거겠지만, 성규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개인택시를 해서 시간적 여유는 많았다. 그래도 끼니마다 찾아오려면 많은 것을 감수해야 했다.

일단 시간.

밥을 먹이고, 수저를 씻고, 생리 현상을 해결하고, 말 몇 마디 나누고 나면 한 시간은 금방 갔다.

그리고 돈.

끼니마다 찾아오려면, 결국 병원 근처에서 운행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멀리 가는 손님은 가끔 거부해야 했다. 아무 생각없이 병원에서 멀리 떨어지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제제를 가하며 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안 그래도 돈이 되지 않는 개인택시였다. 스스로 그런 제한을 두니, 돈이 벌릴 리 없었다. 저녁을 먹이고 나서 새벽이 되도록 운행을 하지만, 병원비를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머지 5인 가족의 생활비는 저축에서 까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탓일까, 다른 한 쪽에서는 극성이라고 까 내리는 말이 나왔다. 물론 성규 앞에서는 하지 않았지만, 성규도 눈치로 알고 있었다.

'시간과 돈 써가면서 뭐하는 짓이냐며... 그 가족은 어떻겠냐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숙 뿐 아니라, 성규의 아버지 재헌도 치매끼가 있었다. 어느새 부턴가 그와 그의 가족들의 삶은 노 부부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의 부인과 자식들은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특별히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묵묵히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칭찬 받아야 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에 가까웠다. 하루, 한 주, 한 달 정도가 아니라, 년 단위의 일이니까. 차도가 없는 병의 진행을 옆에서 보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을 돌보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도 힘들었다. 아들이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포기하고 싶었다. 시간, 돈, 가족... 모든 게 점점 묵직해졌다.

포기라고 말은 거창하지만, 별다른 건 아니다. 그냥 남에게 맡긴다는 이야기다. 밥도 대충 먹이고, 운동도 대충 시키고, 생리현상도 대충 처리하는 간병인에게 영숙을 맡기고 싶다는 이야기다. 남들처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찾아서, 얼굴 도장 정도만 찍겠다는 이야기다.

쏴아아아.

'그래도 되지 않을까?'

식기를 씻으면서 성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그러면 안 돼.'

이건 내 말이었다. 퀘스트는 성규의 결심을 도우라는 거였고, 나는 그의 결심을 도우기 위해 과거를 끄집어냈다.

부엌에서 밥을 지으시던 어머니.

밭에 가서 일하시던 어머니.

어려운 시대였다. 다른 기억은 없었다. 특별한 추억도 없었다. 단지 두 가지 모습이 몇 십 년, 아니, 어머니의 평생 동안 이어졌을 뿐이었다.

"읍."

성규는 입을 막고 울음을 삼켰다.

그도 아버지였기에 안다. 어머니의 삶을, 어머니의 마음을. 그러니 이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늦어 버렸지만, 계속 해야 했다. 그건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한 일이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받기만 했던 자신에 대한 속죄.

쏴아아아.

물소리에 눈물 소리를 숨기며, 성규는 다시 마음을 잡았다.

+ + +

"자, 아~."

성규는 정신이 없었다. 그저 소리에 따라 기계적으로 입을 벌렸다. 입안에 뭔가가 들어오기에 꿀떡하고 삼켰다. 수십 년간 몸이 기억하고 있던 거라 정신이 없어도 알아서 움직였다.

"잘 드시네. 자, 이제 조금이니까, 조금만 더 먹어요. 자, 아~"

그는 다시 입을 벌렸다. 그리고 다시 삼켰다.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 여자가 누군지 기억도 잘 안 나고, '미소'라는 개념도 잊어 버렸지만,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 여자 옆에는 그 여자만한 청년이 서 있었는데, 그가 말을 했다.

"할아버지, 많이 드시고, 나으셔야죠."

성규의 정신은 그 순간 잠시 돌아왔다. 그의 앞에 있던 건 딸이고, 그 옆에 서 있던 건 외손자였다. 그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기뻐서 울음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너무 기뻐서 웃음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짧은 순간 스쳐 갔던 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고 생각했던 그의 지난날이었다.

분명 그의 어머니도 자신이 찾아온 걸 반겼으리라.

주르륵.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엄마, 할아버지 눈곱이 너무 많이 끼었어."

"네가 좀 떼 드려."

"뭐 쓰면 돼?"

"저기, 물티슈로 닦아 드리면 돼."

성규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래도 그의 가슴은 이전보다 따뜻해져 있었다.

+ + +

99번째.

나는 다시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이번엔 달리는 아버지였다. 그리고 수영하는 아버지였다. 마지막으로 자전거 타는 아버지였다.

뇌성 마비를 앓아 눈동자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아들은 그런 아버지 앞에서 함께 달리고, 수영하고, 자전거를 탔다.

내가 있던 세계에서도 볼 수 있었던 미담.

미담으로 들을 땐 감동적이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하는 건 그리 감동적이지 않았다.

물을 가를 때마다 팔 근육은 찢어질 듯했다. 조금 앞으로 나아가는가 싶다가도, 허리에 묶인 밧줄이 몸을 뒤로 당겼다. 그 밧줄에는 아들이 누워 있는 보트가 매달려 있었다.

겨우 수영을 끝내고 올라오면 두 사람 몫의 자전거를 타야 했다. 그나마 편한 거지만, 그것도 초반뿐이다. 180km의 거리를 달리다 보면, 다리도, 팔도, 배도, 온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더 그저 앉아만 있는 아들의 뒷머리를 치고 싶었다.

마지막 마라톤은 자신이 달리는 건지, 땅이 알아서 움직이는 건지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포기하고 싶었다.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될까? 이런다고 아들에게 도움이 될까?

그의 아들은 달리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달렸다. 마라톤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마라톤을 했다. 철인삼종경기를 완주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하고 있었다.

이걸로 끝일까? 더 무얼 원하진 않을까? 중간에 멈춰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러다가도, 그는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발을 디뎠다.

전신이 마비된 아들이 겪을 세상은 이런 것 보다 힘들 게 분명했다. 이 정도도 보여주지 못하면, 아버지의 등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들은 금방 좌절하고 말 것이었다.

보여주고 싶었다. 불가능을 없다고.

"크윽."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고, 그는 이미 모든 힘을 소진했다. 그때, 내가 나섰다. 그의 영혼을 자극시켜 힘을 끌어냈다.

아들의 다리가 되어 줄 다리와 무릎에 힘을 더하고, 아들의 팔이 되어 줄 팔에 탄력을 더하고, 아들의 방패가 되어 줄 가슴에 당당함을 더했다.

"으아아!"

그렇게 내 도움을 받아 그는 처음으로 아들과 함께 철인 삼종 경기를 완주했다.

그 세계에서도 그런 미담은 이미 존재했고, 한 발 뒤늦은 그의 이야기는 큰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마치고, 그는 아들과 함께 웃었다.

아들에게도 자신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그들은 함께 그 벽을 넘었다. 그게 중요했다.

+ + +

"오빠, 이거 드세요."

"음, 맛있어."

"당연하죠. 누가 만든 건데요."

예지가 내 방에서 요리 중이었다. 오래갈 거라는 생각과 달리, 그녀는 유비가 죽은 다음 날 시 내 방으로 왔다. 그리고 내 옆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을 제외한 모든 방비는 이미 내 손을 떠난 상황이었다. 오버 테크놀로지가 적용된 무기와 헌터들이 일반 몬스터를 막고, 일부는 대형 몬스터도 막았다. 후보자가 할 일은 가끔 발생했고, 그 마저도 내 손을 빌릴 이유는 없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나는 이 세계가 가진 마지막 카드였으니까.

그래서 하루 종일 예지와 같이 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멋진 레스토랑, 영화관, 예쁜 카페,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시장, 고요한 산성... 천수의 도움을 받아 외국에도 갔다.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고,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 하늘이 열린 것 같은 폭포도 보았다.

사회는 대이능부대의 대처를 믿고 있었다. 그런 만큼 아프리카와 중국 일부를 제외하고는 몬스터가 나타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실드 아래에 모여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북적북적하고 활기찬 곳도 있었다.

세상을 보는 건 즐거웠다. 예지랑 시간을 보내는 것도 즐거웠다. 무엇보다 그게 마지막 시간이라 소중하고 의미가 있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매일 밤 했다. 나는 그녀에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그녀는 살 자신이 없다고 했다. 매일 밤 싸웠다. 그래도 떨어지진 않았다. 어쨌든 내가 죽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녀가 어떤 걸 선택해도, 이건 나와 그녀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중 하루는 온종일 우리 가족과 같이 보냈다. 그녀와 했던 것처럼 이곳에도, 저곳에도 갔다. 해외는 처음이신 부모님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부모님은 나에게 갑자기 왜 이러냐고 물으셨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예지에게 말하는 것보다 힘들었다.

계속 이런 퀘스트가 이어져서 그런 것 같았다. 기찬 어머니의 모습도 계속 떠오르고...

'오빠가 요즘 너무 소홀한 것 같다면서요. 이제 좀 여유롭데요. 오빠 돈도 많이 벌었는데, 이젠 자주 할 거예요. 맞죠?'

'으, 응.'

예지가 옆에서 도와줘서 겨우 넘어갔지만, 넘어갔을 뿐이었다.

"저 앞에 두고 무슨 생각해요? 다른 여자 생각하죠?"

"...부모님."

"..."

그래도 가족들은 내가 없다고 죽으려 들지는 않겠지... 나는 식탁에서 일어나, 건너편에서 또 울음을 터트린 예지를 안았다. 그녀는 거부하다가, 이내 내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가 살아갈 건 믿지만, 그녀의 행복은 희망조차도 그릴 수가 없었다.

왜, 우리 세상은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시작할 때도 몰랐지만, 이제 와서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든 말든, 끝은 왔고, 세상은 신에게 흡수당하거나, 말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를 골라야 했다.

잠시 후면 마지막 퀘스트, 100번 째 퀘스트를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친구, 연인 다음에는 가족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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