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51화 (151/160)
  • 151화

    "으응. ...어?"

    예지가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가 내가 없는 걸 발견 했나 보다. 그녀는 침대를 좀 더 더듬다가, 눈을 뜨고 고개를 움직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덮고 있던 이불이 천천히 떨어졌다. 적당한 크기의 가슴이 뻔뻔한 모습을 드러냈다. 하도 주물러 댔더니, 이젠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보면, 예전보다 좀 더 커진 듯하다. 역시 많이 주무르면 커지는 걸까?

    "언제 일어났어요? 벌써 준비도 다 했고..."

    "한참 됐어. 요즘 잠이 는 거 같아. 벌써 10시야."

    "에? 10시요?"

    그녀는 못 믿겠다는 듯이 머리맡에 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늘 보던 모습인데도 동작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마음을 달리 먹어서 그럴지도. 그녀는 시계를 확인하고 입을 비죽이 내밀었다. 그녀는 일찍 일어나는 거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다 오빠 때문이잖아요. 밤마다 괴롭히니까 그렇지, 뭐."

    "그래서 싫어? 안 해도 되겠어?"

    "싫진 않아요. 싫진 않은데... 아아, 치사해요."

    "내가 뭘."

    "선택하지 못하는 문제를 선택하라고 하잖아요."

    뜨끔했다. 그녀는 후보자보다 더 후보자 같아서, 나에 대해서만큼은 무슨 예지력이라도 발휘하는 것 같을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좋은 타이밍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예지야."

    "왜요?"

    "나..."

    "..."

    내가 심각해지자 그녀도 절로 심각해졌다. 그녀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마음이 무거웠다. 저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 했다. 숨긴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그냥 넘긴다고 마음이 편해질 리도 없었다. 의견을 나누고, 설득을 시켜야, 내가 죽은 후에도 그녀가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그 이후에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제호키아 백작 부인처럼.

    "나, 죽을 것 같아."

    "...자세히 말해 봐요."

    그녀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건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될 터였다. 또 나 스스로에게 상처를 가하는 말이기도 했다.

    "신이라고 하는 자가 나타났어..."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이 나타난 것, 후보자들이 죽은 것, 세상 모든 이가 죽을 거라는 것, 다리아와 알리나가 나에게 예언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죽어야만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것까지.

    "...그래서, 나 죽을 것 같아."

    "숨기고 있었던 게... 이런 거였어요?"

    "응?“

    역시 그녀답다. 무언가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의문과 원망, 체념...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는 눈이었다.

    "...왜 오빠가 죽어야 하는 거죠?"

    "세상을 구해야 해."

    "그거 말고는요."

    "부모님도, 동생도 구해야 하고... 그리고 너를 구하고 싶으니까.“

    "...그럼 저는 어떻게 하구요."

    "..."

    "오빠가 죽으면 저는 어떻게 하냐구요."

    "..."

    "제가 저 혼자 행복하고 즐겁게 잘 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네가 그랬으면 좋겠어."

    "무리예요.“

    그녀는 단호했다. 그 말 뒤에 숨겨진 뜻이 느껴졌다.

    ‘저는 오빠를 따라 죽을 거예요.’

    "왜? 나를 좋아하게 된 것도 특별한 계기는 없었잖아."

    "헐,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그건 저에게는 특별했어요! 그리고 2년 동안 내 전부를 줬는데, 그걸 이제 와서 잊으라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저와 오빤 이제 한 몸이나 다름없는데, 몸의 반쪽을 잊고서 살라고요?"

    "잊으라는 말이 아니잖아. 누굴 만나라는 것도 아니야. 그냥, 나 대신 산다고 생각하고 살아주면 안 될까?"

    "안 돼요. 오빠가 죽으면, 저도 죽을 거예요.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부모님은? 너희 부모님은 어떻게 하려고."

    "다 크신 분들이에요. 어차피 딸 같은 거 내놓은 자식이었고."

    "우리 부모님은... 몰라, 어쨌든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 너 두고 못 가.“

    단호하고, 격렬하게 죽음을 얘기하는 그녀. 나를 사랑하기에 그런 거지만, 나를 사랑한다면 그냥 살아줬으면 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 일 테고, 그래서 이러는 거겠지.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을까?

    "그럼 죽지 말아요! 아직 끝이 온 것도 아닌데, 왜 미리 포기해요? 예언이 뭐라고! 오빠는 바보예요? 왜 죽을 생각부터 하냐고!"

    "..."

    "흑, 끅. 흐윽."

    탁.

    눈물을 닦아주러 다가가는데, 그녀가 내 손을 쳤다. 그녀의 눈물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내게 박혔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그녀가 힘을 얻을까. 살 힘을 얻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

    하지만 깊이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큰 기운, 한 달 전, 생사의 고비에서 따라다녔던 영혼의 기운이 느껴졌다. 가까웠다. 분명 서울 내였다.

    위이잉.

    폰을 볼 것도 없이 일단 달려 나갔다.

    "...예지야, 미안해. 갔다 와서 다시 이야기하자. 신이 나타났어."

    "흑, 윽, 뭐, 끅, 흡, 가, 가지 마요! 죽으러 가지 말라고!"

    그녀는 울다가 창밖으로 뛰려는 내게 달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기다려 줄 수 없었다. 적은 코앞에 있었고, 빨리 대응하지 않으면 서울이, 그녀가 위험했다. 여기서 그녀를 지키지 못하면, 나중에 죽는 의미가 없었다.

    "미안..."

    창문에서 뛰어내리며 윈디를 타고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 뒤로 그녀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가지 마! 가지 말라고! 가면 죽을 거잖아... 윽, 으으앙."

    + + +

    윈디를 타고 날아가며 중령과 통화했다.

    "저는 바로 가고 있습니다. 빨리 와 주세요. 한강 다리 위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서강대교입니다!"

    [알겠네. 바로 가지.]

    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할 말도 없었지만, 통화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신이 발견한 모양인지, 공기의 칼날이 나를 공격해왔다.

    휙, 휙, 휙.

    하나로 시작한 칼날은 다가갈수록 수가 늘어, 순식간에 수십 개가 되었다. 피할 공간도 없었고, 피하기에도 빠른 속도였다. 일부는 막고, 일부는 피했다. 그렇게 피하며 다가가다 보니,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그 면상이 보였다.

    "너군. 꽤 강해졌는데?"

    강해졌다. 한 달 전만 해도 그의 의지가 담긴 공기의 칼을 와해시키는 건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하고 있었다. 나는 주변의 공기를 점해 그의 공격을 막거나, 그의 공격 자체를 파훼했다. 그가 좀 더 집중을 하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그게 가능했다.

    "이번엔 널 죽이고 말겠다!"

    "나를 죽여도 새로운 나가 온다는 것 정도는 잘 알 텐데?"

    "그럼 몇 십 번이고 죽여주마!"

    라이트닝 소드를 썼다. 번개가 되어 날아간 내 몸은 전처럼 이상한 곳을 찔렀다.

    "그런 것만 써서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거지?"

    파지직.

    다시 공격했다. 내 공격이 통하든, 통하지 않든, 계속 공격했다. 그의 주의를 끌어서 시간을 벌어야 했다. 전 세계에서 후보자들이 올 시간, 그리고 그들이 희생할 시간을.

    팟, 팟, 팟.

    빛의 속도에 가깝게, 일초에도 수십 번씩 그의 기운을 향해 돌진했다. 이제 아키로 90%에 도달한 정신력으로도 일초에 수십 번은 버거웠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면 그의 주의를 끌어올 수 없을 게 뻔했다.

    아니, 더 무리했어야 했다.

    꽈아앙.

    번개가 그의 영혼, 나뉘지 않은 그의 영혼에 직격했다. 저번처럼 막을 몇 개 뚫다가 튕겨져 나왔다. 저번보다는 많이 뚫었지만, 튕겨 나오는 것 똑같았다.

    "시간을 더 끌게 해주고 싶지만... 더러운 꼴을 또 보고 싶진 않아서 말이지."

    조금 더 무리해서, 일초에 수백 번 공격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도 방어로 전환할 틈이 없었을지 모르니까.

    "뭐, 이번에도 그냥 죽을지 모르지만, 수확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저번에는 너무 적었단 말이지. 마침 여기는 사람도 많군."

    후우웅.

    그를 중심으로 공기와 마나가 모였다. 주변이 반짝거렸다. 그의 공격, 빛의 기둥이 발생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규모는 수km. 이전의 어떤 공격보다 컸다. 이 공격은 아마 용산까지 닿을 것 같았다.

    막아야 했다.

    막아야 했는데, 막을 사람이 없었다. 내가 끈 시간은 고작해야 수십 초밖에 안 됐다. 그동안 서강대교에 도착한 건 중국과 일본 일부, 그리고 한국의 후보자들뿐이었다. 중령을 비롯하여 그들 중 셋 정도만 희생해도 일단 공격을 막고 시간을 끌 수는 있겠지만, 지금 그걸 할 수 없어 보였다. 다들 머뭇거리며 개인 방어만 하는 게 다였다. 중국에서 벌어진 상황과 비슷한 듯했다. 그때도 기찬이 죽기 전엔 아무도 죽지 못했다고 했었다.

    튕겨 나온 몸은 전보다 빨리 회복됐다. 신의 빛이 완성되기 직전이었다. 일단 막아보기 위해 주변 공간을 활성화 시켰다. 내 영혼을 거미줄처럼 뻗어, 사방의 공기를 자극했다.

    동시에 고민했다.

    나는 더 힘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최대한 끌어낸 거지만, 더, 그러니까 영혼과 육체의 연결을 끊어가며 힘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만 영향을 안 받는 건지, 그가 나를 제외한 건지, 나는 죽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죽으면 모든 게 도루묵이었다. 아직 완벽한 아키로가 되지 못했고, 혼자서 죽으면 그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럼, 이 세상은 끝이었다. 그 방법조차도 성공률이 높은 건 아니었지만, 그게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빛을 함부로 꺼트릴 수 없었다.

    잠깐, 그 빛을 함부로 꺼트릴 수 없다고?

    그게 누구의 빛인데? 그게 세상의 빛일지는 몰라도, 내 빛은 아니잖아? 지금 내가 나서지 않으면 예지가 죽어. 부모님도 죽어. 그럼 내가 이 세상을 구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여기에서 살아갈 수 있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

    .

    .

    생각하면 할수록, 지금 막아야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게 내 죽음으로 이어지든, 말든 말이다.

    "너도 이상한 놈이군.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공격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결심만 하면 모든 프로세스는 백분의 몇 초 안에 끝날 것이고, 그의 공격은 내가 만들어내는 검막에 막힐 거였다.

    진짜 그렇게 하려고 했다. 세상이고 뭐고, 지금 눈앞에 닥쳐온 그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를 막아주는 의지가 있었다.

    [넌 뒤로 빠져!]

    샤라라라라락.

    콰아앙!

    ============================ 작품 후기 ============================

    신은 앞으로 한 번 더 나옵니다. 그러면 총 네번 나오니까, 처음 나왔을 때가 중중중 보스!

    @드래곤음양사 눈물이 마르지 않으시다니...ㅠㅠ 이어 감사를 표해야 하는 거겠죠? 잘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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