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49화 (149/160)
  • 149화

    <재현>

    90번째가 넘어가면서 퀘스트는 극적으로 바뀌었다. 때려 부수거나 싸우는 퀘스트는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도 때려 부수던 것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 바뀐 건 그것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퀘스트는 전투가 주목적이 아닐지라도 그 스케일이 컸다. 루이스는 풋풋한 사랑을 통해 교황이 되었고, 카너와 앨리스는 세상을 구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90번째 이후의 퀘스트는 쭈욱 소소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 + +

    90번째 퀘스트에선 친구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단순한 편의점 알바였지만, 평행 세계 속의 나, 재민에겐 힘든 일이었다. 재민은 사람 앞에 나서기를 주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바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알바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 그가 혼자서 가게를 보게 된 건, 그의 친구 동성이 너무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동성은 할머니와 같이 사는 소년 가장이었다. 그는 아프신 할머니를 대신해, 학업 중에도 알바를 세 개나 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아프다고 알바를 빠질 수 있을 리 없었다. 알바를 빠지면 잘리고, 잘리며 새로 구해야 하고, 구하는 동안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그러느니 하루 고생하고 말자고 생각했다. 튼튼한 것만이 유일한 장점이라 스스로 말하는 그는 늘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그를 찾아온 지독한 감기에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참고 어떻게 버텼지만, 이틀째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에게 손을 벌렸다. 교우관계가 넓진 않았지만, 좋은 친구 몇몇을 가진 그였다. 여러 친구들에게 부탁한 끝에, 편의점 알바를 제외한 두 알바는 대타를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편의점 알바 대타는 구하지 못했다. 시간이 되는 이들이 없었다. 결국 자신이 하기로 했다. 어차피 주말 야간이라 쉬는 시간이 많았으니까.

    동성의 옆에서 그걸 다 본 재민은, 주저하며 용기를 냈다. 숫기가 없는 자신에게 다가와준 친구, 친구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자신은 없었고, 동성이 뒤처리를 하는 데 더 큰 고생을 할지도 모른 다는 걱정을 하면서도, 재민은 말을 꺼내고 말았다.

    동성은 고마움 반, 걱정 반으로 재민의 제안을 승낙했고, 그리하여 재민은 동성 대신에 편의점 알바에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대로 고생했다.

    바코드를 두 번 찍어 욕을 먹었고, 진열을 잘못해 두 번 일해야 했고, 청소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한 소리 들어야만 했다. 담배는 뭐가 뭔지 몰라 손님이 짜증을 냈고, 거스름돈을 실수해 돈으로 맞은 적도 있었다.

    나는 그러고 있던 그의 몸에 들어가 대신 아르바이트를 했다. 손님도 없는 카페 알바 출신이긴 하지만, 편의점 알바 정도는 껌이었다. 알바를 하면서, 재민도 같이 가르쳤다. 알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면 되는지.

    그렇게 몇 시간. 그게 퀘스트의 끝이었다.

    + + +

    91번째 퀘스트에선 아내를 위해 도시락을 쌌다. 이건 평행 세계 속의 나, 현우에게도, 원래 나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둘 다 요리라고는 젬병이다. 나에겐 자취생 경험이 있었지만, 도시락을 언제 싸 볼일이 있었겠는가? 대충 김치찌개나 하고 말지.

    그날은 수능 날이었다.

    나이 50이 넘어, 이제 60이 되어가는 아내는 수능을 보겠다고 지난 1년 동안 부산을 떨었다. 현우는 그 옆에서 계속 핀잔을 주면서도, 알게 모르게 아내를 응원했다. 자신과 아이들, 또 시부모를 위해 한평생 살아왔던 아내였다. 아내가 자신의 꿈, 원하는 일을 했으면 하고 바랐고, 잘 되기를 기원했다.

    결혼하고 30년, 아니 그 전에도 부엌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은 그가 이렇게 일어난 건 그런 이유였다.

    쉽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김밥 같은 거라도 만들면 될 텐데,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나이 60먹은 아저씨가 캐릭터 도시락을 만들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 이전에 밥부터 망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갔을 땐, 쌀 씻은 후에 취사도 안 눌러 놓은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망했다' 수준인 것이다.

    나는 그런 요리 부진아를 데리고서 도시락을 만들기 위해 씨름해야 했다. 나답지 않게 손재주가 좋지 않아서, 굉장히 힘들었다. 그동안 힘쓰는 일만 해온 탓이었다.

    그렇게 또 몇 시간, 도시락이 완성되고 나서 퀘스트는 끝이 났다. 후일담에서 보니, 현우의 아내는 그 도시락 덕분인지 수능을 잘 봤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92번째 퀘스트에서도 작은 스케일의 소소한 일을 했다. 물론, 당사자에겐 작은 일이 아니었다.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대리가 어떻게든 시간을 내기 위해 한 주 동안 쉬지 않고 일해야 했으니까.

    여자 친구와의 1주년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자기 일만 있다면 어떻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회사는 협업 위주였다. 자기 일이 끝나도 다른 쪽에서 일이 끝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에 꼭 정리해야 할 것도 많았고, 일을 열심히 하니까 위에서 더 던져주는 일도 끝내야 했다.

    이중삼중의 방어벽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90번째 이후로 나는 퀘스트 속에서 따로 능력을 쓸 수 없었다. 쓸 수 있다면 체력 보충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 조차도 해주지 못했다.

    겨우 찾아낸 거라곤, 그의 영혼을 통해 뇌를 자극 시키는 것 정도였다. 그 외엔 그냥 그의 안에서 그의 마음을 느끼는 게 다였다. 집중이 잘 안 되고, 쉬고 싶고, 다음 주로 미뤄도 되는 업무들이지만,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 여자 친구와의 1주년을 소중하게 보내기 위해서 애쓰는 그의 마음.

    따뜻하고 설레는 마음을 느끼다 보니 퀘스트는 그냥 끝이 났다.

    후일담에선 환하게 웃는 예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평행 세계 속의 예지였고, 평행 세계 속의 나였다. 심지어 그의 이름도 강민이었다. 우리 세계가 변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 + +

    93번째 퀘스트에선 연인과 헤어져야 했다.

    정민은 불치병 진단을 받았다. '척수 소뇌 변성증'이라는 이름도 어려운 그 병은, 소뇌의 기능을 상실해가는 병이다. 병의 진행 상태에 따라 기본 운동조절 기능 자체를 잃고, 평형감각이 무너진다. 근육을 정밀하게 움직이는 게 어려워지고, 걸음걸이도 술에 취한 사람처럼 불안정하게 된다. 곧 자주 넘어지고, 서 있는 것도 힘들어지며, 혀를 움직이는 것은 물론, 말하는 것도 힘들어진다. 그리고 끝내는 호흡이 힘들어지고, 호흡기 착용으로 인한 합병증, 폐렴 같은 것으로 죽는 경우가 많은 병이다.

    정민은 그런 병의 수발을 현 여자친구인 예림에게 맡길 수 없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곧 소뇌가, 척수가, 다리가 제 말을 듣지 않게 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대뇌는 손상이 없기 때문에, 그는 제 몸이 안 움직이는 상황을, 자신의 자유가 없어지는 것을 생생하게 느껴야만 했다.

    그때가 되면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짜증이란 짜증은 다 부리면서 죽고 싶다고 난리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추한 꼴을 예림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평생 이렇게 살거나, 높은 확률로 일찍 죽겠지만, 그녀는 살아야 하니까. 어차피 그녀는 그 이후에도 살아야 하니까. 그녀가 자신의 좋은 모습만 기억했으면 했다. 그리고 괜한 슬픔과 자책 속에서 살아가지 않았으면 했다.

    이 병에 걸린 건 그녀의 탓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지난 한 달 동안 수작을 부렸다. 일부러 까칠하게 대했고, 일부러 밀어냈고, 일부러 연락을 씹었다. 만나는 횟수도 줄였고, 마지막 일주일은 아예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들어갔을 때, 그는 문자 하나만을 딱 보내놓은 상황이었다.

    [헤어지자.]

    그는 그 이후로 폰을 들지 않았다. 폰에는 계속 그녀의 메시지가 왔다.

    [응? 뭐? 뭐야? 무슨 장난인데?]

    [...갑자기 왜 이래.]

    [요즙 갑자기 왜 이러냐고!]

    [이런 거였어? 요새 이상하다 했더니 이런 거였냐고!]

    위이이잉.

    전화도 왔다. 그는 그 전화를 받고 싶었다. 전화를 받고 울고 싶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내가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병에 걸렸다고, 병에 걸려서...'

    위이이잉.

    그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가장 먼저 고장 난 게 눈물샘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마음은, 손은 계속 전화를 향했고, 전화 너머에 있는 예림을 향했다.

    그걸 막고 있는 건 나였다. 막기가 힘들었다. 예지와 이름도 비슷했지만, 목소리도, 외모도 비슷한 예림의 연락을, 슬픔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정민의 마음을 보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한참을 울던 전화기가 멈추고, 다시 메시지가 왔다.

    [왜 이래... 갑자기 뭔데...]

    [전화는 왜 안 받는데.]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딨어.]

    [이유라도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정민아...]

    그 메시지에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나가려 했다. 나는 그 움직임을 다시 막았다. 전면에 나서지는 않고, 그냥 손만 조종해 다시 품으로 가져 왔다. 그는 그 움직임에 위화감과 안도와 아쉬움과, 슬픔을 느꼈다.

    "끄윽, 끅."

    위이잉.

    93번째 퀘스트는 그렇게 계속 전화기의 진동 소리와 정민의 울음을 듣다가 끝이 났다.

    다행히, 후일담에서 커플은 다시 만났다. 그녀는 직접 찾아와 정민에게 항의하고 그가 거부해도, 짜증을 부리고 욕을 해도, 그가 죽을 때까지 옆에 있었다. 잘 된 일이다. 잘 된 일인데, 썩 달갑지 않았다.

    예지도 저럴 것 같았다. 내가 죽는다고 하면, 분명 자신도 죽겠다고 나올 것만 같았다. 같은 영혼, 비슷한 성격, 그녀도 자신 혼자 행복해지는 일을 선택할 것 같지 않았다.

    + + +

    94번째 퀘스트도 비슷했다. 이번엔 목숨을 내줬다.

    오랜만에 현대가 아닌 중세 판타지 세계. 평행 세계의 나, 제호키아 백작의 부인은 정체불명의 병에 걸려 있었다. 갑자기 시름시름 앓더니, 어느 샌가 부터 거동도 못하게 되는 병, 돈과 인맥을 써서 받은 대신관의 치료로도 호전이 없는 끔찍한 병이었다.

    부인은 백작에게 그냥 두라 했다. 스스로가 죽음을 느낀다고, 이제 소용없을 거라고, 다른 부인을 얻고, 그 다음 삶을 준비하라 했다.

    하지만 백작은 그렇게 넘어갈 수 없었다. 별 특별할 것도 없이, 중매로 남작 영애를 만나 평범하게 살아온 거였다. 하지만 그는 부인이 좋았다. 미치도록 좋았다. 그녀를 그렇게 보낼 수 없었다.

    돈을 풀어 네크로맨서를 찾았다. 생명에 관해서라면 신관과 쌍벽을 이룬다는 네크로맨서에겐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전과 나라의 박해를 피해 수어 있는 네크로맨서를 찾는 건 쉽지 않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결국 네크로맨서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네크로맨서는 부인을 구할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사람의 영혼을 주입하는 방법입니다."

    주술의 실행에는 딱 한 명, 그녀의 영혼과 가장 가까운 영혼이 필요했다.

    "그게 누구인가?"

    "백작님이십니다."

    이번에도 부인은 예지를 닮아 있었다. 온갖 평행 세계를 둘러본 결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내 영혼과 관련이 있는 여인들 중 70%가 예지였다. 결국, 그녀와 가장 가까운 영혼은 나였고, 나와 가장 가까운 영혼은 그녀였다. 네크로맨서의 말은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백작은 고민했다. 평소 그녀를 목숨보다 아낀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건 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며칠을 고민했고, 그러고도 답이 나오지 않아 며칠을 더 고민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햇살이 비치는 창밖에 손을 뻗으려는 부인을 보았다. 부인의 손은 그 짧은 거리를 움직이는 동안에도 수없이 떨렸다. 힘들었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부인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럼에도 부인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백작은 그 모습을 문 밖에서 몰래 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는 잘 보여주지 않는, '살고 싶다'는 속마음을.

    그는 그 장면을 보며 죽기로 결정했다.

    이기적인 결정이었다. 그의 부인이 살고 싶다 해도, 그게 그의 죽음으로 살고 싶은 건 아닐 테니까. 부인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런 선택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어떤 대책도, 설명도 없이 그냥 죽기로 했다. 그 후에 벌어지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부인이 햇살 아래에서 움직일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있겠나?"

    "네, 알겠습니다."

    "후우우."

    죽음을 맞이할 마법진 위에서 그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옆을 보았다. 그의 옆에는 부인이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흐으읍."

    이번에는 숨을 들이켰다. 죽음을 겪어 보지 못한 그에게 죽음은 미지의 것이었고, 두려운 거였다. 그녀를 위해 죽는다고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그를 끝까지 방해하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이기적이 되기로 했다. 오로지 자신만 생각했다. 그녀가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만 집중했다. 그 뒤의 일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시작하게."

    "알겠습니다."

    네크로맨서의 손짓에 따라 마나가 움직이고, 마법진이 반응했다. 그 중앙에 누워있는 그의 영혼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다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죽지 않으려는 걸 막고, 죽게 만들어야 되나 했는데, 가만히 있어도 퀘스트는 알아서 진행됐다. 내가 할 게 없었다.

    90개나 클리어한 자를 위한 보너스 스테이지인지도. 그게 아니라면, 내게 무언가를 전달하려 하거나.

    결국 백작은 죽었고, 백작 부인은 살아났다. 하지만 행복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가 원했던 것처럼 햇살 아래를 몇 번 거닐다가, 목을 매어 자살했다.

    후계자도 없는 백작의 저택은 오랜 세월이 지나 팔리기 전까지,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며 방치되었다.

    무서웠다. 예지도 이렇게 되는 건 아닐까.

    + + +

    퀘스트를 깨는 동안 검술 등의 기술을 단 하나도 배우지 못했다. 다들 그런 기술이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시스템이 아예 제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퀘스트를 깨는 것만으로도 특정 기술의 경험치를 올릴 수 있게 해줬다. 다른 후보자들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덕분에 아키로 마스터가 되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듯했다.

    그렇게 기찬의 죽음으로부터 2주가 지났고, 나는 95번째 퀘스트에 들어가 있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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