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47화 (147/160)

147화

[오늘은 나야.]

전화를 받자마자 기찬은 다짜고짜 그렇게 툭 내뱉었다. 그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도 그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앞장서서 사람들을 지키려 했으니까.

[...뭐, 오늘은 안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물러갔던 신은 언제고 다시 나타난다.

세상의 모든 후보자들은 신이 다시 나타날 것을 대비해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일단 될 수 있는 한 모여 있었다. 각 나라별로, 또 대륙별로, 최소 인원을 남겨 놓고는 한 곳에서 대기했다. 신이 나타났을 때,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로 후보자들은 순번을 짰다. 신은 강력했지만,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리고 그 '어떻게든' 안에는 후보자들의 희생도 들어가 있었다. 여차하면 희생을 통해 얻는 에너지로 신을 막아 보려는 계획이었다.

계획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원했다. 지원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사실, 거의 대부분이 지원했다. 그렇다고 누가 죽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데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신이 몇 번이나 나타날지 모르니, 빠르든 늦든 다 죽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루마다 바뀌는 순번을 짰다. 그 날 신이 나타나면 그 날 순번인 사람이 죽도록 말이다.

정의감이 넘치던 기찬은 아니나 다를까 가장 먼저 지원했고, 오늘 자기 차례를 맞았다. 오늘 신이 나타나면, 기찬은 죽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지 않으면, 아마 10여일 정도는 생이 연장되겠지.

[힘내. 어쩌면 죽을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 우리가 다 힘을 합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건 위험해. 알잖아? 자살이 더 좋다는 거.]

기찬의 말처럼 자살 하는 게 더 나았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당장은 그게 나았다. 자살하는 영혼은 신에게 흡수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신의 힘이 더 늘어나지 않는다. 이제 7000명쯤 남은 후보자들이 함께 모여 단번에 신을 죽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후보자들이 죽으면 신의 힘은 더 늘어난다. 그건 위험했다. 그보다는 어차피 죽을 후보자들이 희생해서, 신을 단번에 죽이는 게 안전하고 확실했다.

[너무 신경 써 줄 필욘 없어. 죽는 거야 많이 해봤고... 어차피 같은 처지잖아? 너도 죽어야 한다며?]

[그렇지...]

희생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 대부분은 어쩌면 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아키로 중에서도 레벨이 높은 몇몇 뿐이었다. 그 중에는 나도 있었고, 기찬은 다리아가 네게 예언의 말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뭐야, 신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아?]

[아마도. 가능할 것 같아.]

남은 퀘스트는 13개이고, 보상은 이번 것까지 14개가 남아 있었다. 이번엔 검술, 그것도 꽤 높은 등급의 검술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13개 중에 검술이 적절히 포함된다면, 아키로 마스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검술이 나온 빈도를 보면,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우와, 내 친구가 신이라니!]

[...나도 실감은 안 가. 그리고 진짜 신도 아니잖아? 게다가 신이 되면 뭐하냐? 그냥 죽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지! 신이 우리를 위해 죽는 거잖아? 무슨 진짜 종교 같네.]

[너를 위해 죽지 않아. 예지를 위해 죽을 거거든?]

[그렇게 말하면 좀 섭섭하지만, 뭐, 나도 제수씨를 좋아하는 편이니 넘어가 주지.]

[형수님이거든?]

[아무튼, 예지에게는 얘기했냐?]

[...]

신이 나타났다는 건 세상 사람들에게 비밀이었다. 예지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모든 걸 다 말해야 하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말하면, 그녀도 따라 죽겠다고 할 게 분명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무책임했다. 미룬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시켜야 하는데... 그녀가 홀로 남는 건 가슴 아프긴 하지만, 그녀가 죽는다는 건 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사람은 언제고 죽는다. 이런 일이 없더라도 그녀도, 나도 죽을 것이다.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런 죽음은 아니었으면 했다. 신에 흡수되어 죽은 건지, 사는 건지 분간할 수 없는 삶만은 막고 싶었다.

문제는 그녀를 설득시킬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그녀 없이 살아갈 수 없다고 느끼듯, 그녀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 테니까.

[아직 이야?]

[응.]

[...힘내라.]

[너나 힘내.]

[알았... 지이이잉!]

위이이잉.

수화기 너머에서 경보가 울렸고, 내 폰도 동시에 진동했다.

[젠장, 왔어! 그럼 조금 있다, 아니, 잘 살아라! 세상을 구해줘!]

나도 그도, 죽음은 익숙했다. 오늘만 해도 아침에 죽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나도 먹먹해졌다.

[알았어...]

[꼭이야!]

위이잉.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계속 진동하는 통화를 연결했다.

[강민군! 그가 왔네! 이번엔 중국이야! 어딘가?]

[오피스텔입니다. 국방부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윈디를 부르며 창밖으로 뛰어 내렸다. 예지가 아직 자고 있는 이른 아침이라 다행이다. 무슨 일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휘이잉.

바람을 맞으며 국방부로 날아갔다. 2차전의 시작이었다.

+ + +

신, 로호프.

신이 된 후에 얼마나 지났는 지는 몰라도, 그는 자기 이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중국 북부 시안 성의 하늘 위에 떠 있었다.

"...후보자들이 많군. 나를 대비해서 모인 건가? 크크큭, 재밌군. 그렇다고 막을 수 있을 거 같으냐?"

시안 성에는 후보자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중국 쪽 후보자들은 물론이고, 한국, 일본, 몽고, 동남아쪽 나라들의 후보자들도 함께였다. 대략 2000명 쯤. 전 세계 후보자들의 1/3이었다.

후보자들은 그들이 주거하던 건물에서 나왔다. 로호프가 자신의 기운을 숨지기 않아 후보자들은 그의 등장을 그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 후보자들이 더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락을 받고 각국에서 모이는 거였다. 이전 로호프의 등장 때도 빨랐지만, 지금은 더 빨랐다.

"점점 더 모여 드는 군... 어떻게 대응하나 한 번 볼까?"

로호프는 가볍게 의지를 일으켰다. 그의 의지를 따라 빛의 기둥이 하늘에서 후보자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

후우웅.

후보자들은 저마다 힘을 모아 기둥을 막았다. 철 방패나 어둠의 막, 얼음벽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순수한 마나로 만든 막이었다.

"막아야 해! 아래는 수십만 명이 살고 있다고!"

중국 후보자가 악을 썼다. 시안은 넓은 도시이고, 인구 8백만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방어가 어려운 곳이었다. 일이 잘못 되면 수많은 사람이 죽을 거고, 신의 힘이 대폭 늘어나게 될 터였다. 하지만 다른 곳에 간다고 나아진다는 보장 역시 없었다. 저번처럼 사람이 없는 곳에서 싸운 게 특이한 상황이라고 봐야했다. 그래서 후보자들은 시안을 택했다. 중국에서 인프라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대도시이고, 아시아 중심에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방어대신 기동력을 선택한 거였다. 신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니까.

"애쓰는 군. 그럼 이것도 받을 수 있으려나?"

후우웅.

빛의 기둥이 또 생겨났다. 후보자들이 재빨리 달려가 막았다. 아래, 길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게 뭐지?'나 '도망가야 해' 하며 혼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후보자들은 아직 여유로웠다. 개개인은 죽을힘을 다해 막았지만, 원래 시안에 있던 후보자도 2000명이고, 속속 도착하고 있는 후보자들도 이미 1000을 넘었다.

그건 로호프도 마찬가지였다.

"좋아, 어디까지 가나 한 번 보지."

후우웅, 후우웅.

우우우우웅.

빛의 기둥이 두 개 더 생겨나고, 이윽고 네 개의 기둥이 합쳐졌다. 시안의 절반이 그림자가 없는 이상한 상태가 됐다.

"밀리고 있군."

"...안 좋네요. 일단 막아야..."

기찬을 비롯한 한국 후보자들 일부가 도착한 건 그때였다. 그들은 시안에 오자마자 능력을 사용해 빛의 기둥을 막아야 했다. 기찬의 서퍼 보드는 방어에 탁월한 만큼, 그 주변에 있는 후보자들이 약간 편해졌다.

파아아앗!

하지만 그뿐, 로호프에게는 아직도 여유가 있었다. 여차하면 후보자들을 한 번에 휩쓸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쉬이잉!

"크아아악!"

"옆이다! 막아!"

공기의 칼날이 빛의 기둥 아래에서 생성되어 후보자들을 공격했다. 찰나의 일이었지만, 일부의 후보자들은 공격에 반응하여 막았다. 하지만 일부는 그냥 썰렸다. 썰리는 걸 피한 후보자들도, 빛의 기둥을 막는 게 늦어 빛에 그 몸을 내주고 말았다.

그걸 본 한 후보자가 결심을 했다.

[오늘 순번인 분들! 지금 입니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금방 발견됐다. 노란 빛 기둥 아래에서 녹색 빛줄기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만들어낸 빛은 로호프의 공격을 가르고 그를 직접 강타했다.

"이 빛은..."

콰아아아아아!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빛에 로호프가 만들어낸 유윳빛 막이 통째로 밀려났다. 그는 당황했다. 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두 사람이 죽는 것은 그동안에도 몇 번씩 봐 왔다. 그가 이제껏 지나온 차원에서도 자신을 막기 위해 그러는 이들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수십 명이 동시에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네 놈들이 그 자살의 의미를 잘 모르는 구나! 이 미친놈들! 내가 그걸 허용할 것 같으냐!"

그는 힘을 더 끌어내 정신 공격을 시작했다. 반쪽 아키로의 반쪽이 겨우 될까 말까한 후보자들은 정신공격에 취약했다. 그래서 그의 의도대로 대부분 자신의 삶을 놓지 못했다. '죽어야 이길 수 있다'에서 '죽지 않아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로 바뀐 것이다.

허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정신 공격을 유지해도, 그의 힘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는 빛의 기둥에 정신을 더 집중했다. 한 번에 끝내기 위해서였다. 이제껏 관찰자의 입장에 서서 대충 공격했는데, 지금부터는 진심이었다. 그는 후보자들의 밑천이 다 드러났다고 생각했고, 후보자들의 자살쇼를 계속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파아아아앗!

마나로 만든 방어막이 깨지고, 그 사이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새어나온 빛에 맞은 후보자들의 팔이, 어깨가, 다리가 타들어가는 동시에 재가 되었다. 몸에 타격을 받자 방어막은 더 약해졌고, 빛은 더 새어나왔고, 이젠 굵은 빛이 마나의 막을 깨버리고 후보자들의 몸과 머리에 직격했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는 안 되는데...'

조금 전, 기찬은 온몸의 힘을 끌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별안간 그 마음이 사라져서 모든 과정을 중단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온몸의 힘을 끌어내려 애쓰고 있었지만, 과정이 잘 넘어가지 않았고, 마음을 먹기도 힘들었다. 무언가 제지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를 조종하는 건가?'

그는 빛 너머에 있을 신을 떠올렸다. 신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생기진 않았다. 사람 같지 않다는 점에선 신이기에 충분한 외모였지만, 유약한 이미지였다. 아니다. 그래서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그는 이런 일을 장난으로 하니까. 약한 외모에서 나오는 강한 힘처럼, 신이 하는 일은 모든 게 이질적이었다.

"으아악!"

"크윽!"

주위의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방어막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이미 한참 전에 넘은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을 볼 것도 없었다. 그가 소환한 서퍼 보드도 이미 한계였으니까.

이 보드마저 깨지면 어떻게 될까? 그의 주변에는 자신의 방어막을 힘겹게 유지하며, 몸은 보드 아래로 피한 이들이 제법 있었다. 그나마 굳건해 보이는 보드가 깨지면, 그 사람들은 다 죽게 될 것이다.

싫었다. 그는 그런 게 싫었다.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의 운명은 그들만의 운명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죽으면 자신도 죽고, 이곳 중국도 부서지고,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가 박살날 테니까.

'민이, 한 소위, 예지씨, 영민이, 찬수,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 개식이, 효크, 사기꾼...'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겹쳐 보았다. 그들을 위해서 그는 싸웠다. 꿈속에서 몇 번이나 죽으면서도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다 그들 때문이었다. 살아서 그들을 보고 싶었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아니야.'

그는 마음속의 진실을 떠올렸다. 그들을 위해 싸운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싸웠다. 그들 안에 있는 자신,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자신, 그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위해서 싸웠다. 그것은 평행 세계를 사는 자신처럼, 자신과 같지만 다른 또 른 자신. 그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살고 싶다고!"

후우우우웅.

기찬의 온몸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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