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46화 (146/160)

146화

때는 가을. 황금빛으로 물들어야 할 들판은 1년을 기다려온 결실 대신 피로 얼룩져 있었다. 수도 근처 평야에서 벌어진 최후 전투의 흔적이었다. 이 전투에 참여한 인간만 이십만, 악마까지 합하면 50만이 넘는 사람이 이곳에서 반나절을 싸웠고, 죽었다.

푸욱.

밟히는 건 전부 시체였다. 땅이 시체로 덮여서 딱딱한 바닥을 디딜 수가 없었다.

'더 빨리 뛰어 줄 수 없겠나? 이대로 가면 블레이크가 죽는다네.'

루카스는 나를 재촉했다. 그는 조급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블레이크의 기운이 줄어가고 있었다. 여기 널린 시체들처럼, 블레이크도 시체로 내일을 맞을 확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빨리 가고 싶었다. 이 퀘스트를 깨길 바라는 마음은 그가 블레이크를 구하고 싶은 마음과 비슷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너도 네 몸 상태를 잘 알잖아. 이 이상은 빨리 달릴 수 없다고.'

'그렇지만...'

그의 마음엔 여전히 불안만 가득했다. 한동안, 이라고 해봐야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을 그는 천년처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10분이 안 되어 죽을 텐데, 그에겐 그런 것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천년과도 같은 1분이 지나고, 상황이 변했다.

'...안 돼!'

블레이크의 기운이 심각할 정도로 줄었다. 죽어가던 그보다 더 작은 힘이었다.

젠장, 어떻게 하지? 이대로 퀘스트를 실패하나?

그때였다.

덜컥.

삐그덕 대던 육체가, 내 영혼의 힘으로 억지로 붙들어 놓아야 했던 육체가 빠른 속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흩어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루카스의 영혼과의 연결이 하나 둘씩 끊어지고 있었다. 재빨리 그 육체를 추스르고, 루카스의 영혼에 육체를 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육체는 내 뜻대로 준비가 됐는데, 영혼이 내 뜻을 거부했다.

'루카스! 지금 뭐 하는 거야!'

'힘을 주겠네. 어떻게 하는지는 알겠지?'

그의 뜻과 함께, 온몸에서 힘이 샘솟았다. 죽어가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기운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하늘까지 올라갔다. 주변의 공기가 알아서 그 기운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며 용권풍을 만들어냈다.

'루카스...'

'그렇게 생각할 거 없네. 나는, 그가 살길 원해.'

이젠 몸이 진짜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50년 동안 그의 영혼을 지탱하던 육체가, 그 육체를 붙들고 있던 연결이 끊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100년은 더 유지될 수 있었던 연결, 근육과 신경, 분자와 원자를 잇고 있던 에너지가 해방되자, 미증유의 힘이 터져 나왔다.

"간다!"

슈우웅!

물컹한 시체를 밟고 바람을 가르며 나아갔다. 한 번 시체를 밟을 때마다 수십 미터씩 풍경이 뒤로 달려갔다.

금세 싸우는 소리, 아니 절규가 들려왔다.

"크아아아악! 너를 죽이고! 폴룩스를 죽인 놈을! 으아아아아악!"

전신에 피칠을 한 기사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기사의 몸 위에는 거대한 미노타우르스의 형상이 겹쳐 보였다. 그것 때문인지, 그 기사, 카스토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몸에 묻은 피는 절반이 악마가 흘린 푸른 피였다. 그의 검에서도 푸른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악, 큭, 허억."

카스토르의 앞에는 역시 중무장을 한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검으로 몸무게를 지탱 중이었다. 루카스의 불알친구, 블레이크였다. 그는 숨을 쉴 때마다 피를 토해냈다.

"블레이크!"

온힘을 다해 그를 불렀다. 내가 부르는 것이기도 했지만, 루카스가 부르는 것이기도 했다. 이젠 반쯤 흩어져 버린 그의 영혼이 전하는 강렬한 의지에 나는 동화됐다.

"너! 너! 너구나! 죽어라아아아!"

폴룩스의 영혼이 나를 먼저 보았고, 카스토르의 두 눈이 그 뒤를 따랐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게 달려왔고, 불투명한 적갈색 배틀 엑스와 3m 이상 길어져 있는 적갈색 검강으로 나를 공격하려 했다.

그걸 보며 나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가볍게 외쳤다.

"사라져라!"

그걸로 끝이었다.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샘솟는 막대한 힘은 내 의지를 알아서 강화시켜주었고, 의지에 동화된 공기와 마나가 저절로 움직여 폴룩스와 가스토르를 현계에서 배제시켰다. 둘은 나에게 공격하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그대로 시간이 지나면 루카스의 육체가 원자 단위로 흩어져 버리듯 그들의 육체도 흩어져 버릴 것이다.

물론 그걸 보려고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블레이크!"

"큭, 으윽, 자, 자네군... 커헉!"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본 블레이크는 말을 하다가 결국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나는 빠르게 뛰어가 그를 품에 안았다.

"멈춰! 말하지 말게. 아무 말 안 해도 되네!"

하지만 그는 말을 이었다.

"크윽, 어떻게 그럴, 이, 윽, 마..."

"힐! 힐! 힐!"

고오오오오오.

곧 있으면 사라질 방대한 힘. 어디에 쓸 데도 없었던 큰 힘을 힐에 모두 부어 넣었다. 내 힐은 그 누구의 버전도 아닌, 창조신의 오리지날 버전이었다. 효율이 좋진 않았지만, 힘을 불어넣는 대로 그 효과가 늘어났다. 제한이란 게 없었다.

"자, 자네?"

성을 한 번에 잿더미로 만들 만한 힘이 들어가자, 살아날까 싶었던 블레이크의 몸이 재생되었다. 되감기를 하듯, 부러진 뼈가 붙고, 신경이 연결되고, 살이 돋아났다. 고통을 참던 그의 얼굴엔 의문이 자리를 잡았다. 온몸에 피칠을 한 게 에러였지만, 그의 기운은 분명 싸우기 전 상태로 회복되었다.

"이, 이런 힘은 어디서 난 건가? 그리고 왜 그걸 나에게..."

"나는 이미 가망이 없어. 그래서 쓴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도 자네를 구했을 거야. 자네를 구하는 게 나를 구하는 거 잖은가?"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여기 있다...네..."

슬슬 말을 잇기가 힘들어졌다. 힘은 아직도 끝없이 솟아났지만, 육체는 내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어서, 어서 스스로를 치료하게. 아직 힘이 있지 않은가. 왜 벌써 포기하는 건가!"

"...자네도 알잖은가. 내 상태가 어떤지... 폴...룩스를 처리할 때... 이미..."

말을 다 잊지 못하고 시야가 검게 변했다.

"...루카스! 루카스! 정신 차리게! 루카스!

다시 시야가 밝아졌다. 눈은 그대로 뜨고 있는 듯했는데, 그냥 시야가 사라지다니... 신기한 경험이었다.

"루카스! 죽으면 안 되네! 루카스! 내가 어찌하면 되겠는가!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먼저 가는가!"

조금 전과 반대로, 나는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마지막일 것 같은 시야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

"...나도 목숨을 걸지! 그럼 되는가?"

"..."

말이 잘 나오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이건 어떤 힘을 불어 넣어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영혼이 흩어진 상태라,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흩어지는 영혼이 아키로이고, 살 의지를 가졌다면 또 모르지만.

"...그럼, 나도 같이 가겠네. 내 자네를 두고 혼자 살아 돌아갈 순 없네. 마왕은 쓰러졌고, 이제 이 세상엔 우리가 필요 없을 거야. 그러니 자네를 따라가겠네."

"..."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살아야 했다. 루카스의 몫까지 살아야만 했다. 계속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자네가 없는 세상에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가 살겠는가. 자네가 없는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네. 자네도 내 마음 잘 알지 않은가!"

잘 안다. 너무나도 잘 안다. 그를 위해 죽어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도 내 마음을, 루카스의 마음을 잘 알 것이다. 왜 그가 살길 바라는지.

억지로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가리켰다. 이제 거의 사라지고 없는 힘을 모아 의지를 전달했다.

[살...아... 내...몫...]

"루카스!"

시야는 깨끗한데, 장면이 머릿속으로 잘 들어오지 않았다. 블레이크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시각과 촉각이 융합되지 않았다.

"루카스!"

팔과 다리가 희미해졌다. 복부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어 시야가 다시 검게 변했다.

"루카스으!"

마지막으로 검게 변한 세상 속에서 나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지난 세월을 보았다.

응애 하고 울던 아기 때.

골목 하나를 두고 패를 나눠 싸우던 어린 시절.

촌장 딸을 두고 죽일 듯이 싸우던 소년 둘.

전쟁이 일어나 징집되어 끌려간 청년 두 명.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적으로 만나고 만 두 사람.

탈영을 결심하고, 마을로 돌아오고, 영주와 싸우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고, 다시 싸우고, 자리를 잡기까지 걸린 긴 시간들.

그 시간 동안 늘 등을 지켜두던 블레이크.

촌장 딸이 죽었을 때 위로해주던 그, 새로운 재혼 상대를 소개시켜 준 것도 그.

그의 딸과 루카스의 아들이 결혼한 장면도 지나갔다. 피로연에서 기뻐서 껄껄껄 웃는 루카스와 블레이크의 모습들.

마왕의 출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제지하며 자신이 나가겠다고 나서는 둘.

결국 같이 나가서, 다시 살아 돌아오자고 다짐하는 둘.

마지막 전투 전에 씨익 하고 웃던 그의 얼굴.

마지막으로 본 그의 눈물.

+ + +

주마등처럼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나는 눈을 떴다.

"..."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오랜만이었다. 이처럼 평행세계 속의 나와 동화되고, 깨어나서도 그 여운에 빠져 있는 것은.

"...으응, 오빠? 깼어요?"

"...응."

"울어요?"

목소리 조절을 하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정말, 눈치도 빠르다.

"조금..."

스으윽.

그녀가 내 얼굴을 자기 품에 묻었다. 따뜻했다. 그 온기에 마음을 정돈했다. 예전 같았으면 펑펑 울었을 텐데,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평행세계는 평행세계고, 이 세계는 이 세계다. 루카스는 루카스고, 나는 나다. 정말 실감나는 영화를 한 편 봤지만, 구분할 수 있었다. 이제야 '나'가 완벽히 선 것이다.

"고마워."

"뭘요."

루카스에게 블레이크가 친구 이상이듯, 나에게 예지는 연인 이상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나는 결국 죽게 되겠지.

그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스으윽.

그녀의 허리를 당기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