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유비가 내 자살을 눈치 챘을 때, 나는 예지에게 숨기는 걸 포기했다. 이미 들킨 거, 숨기고 있는 것보다는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그녀가 뒤에서 홀로 가슴 아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앞에서 울길 바랐다.
전부 얘기하자, 그녀는 늘 그렇듯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러면서 펑펑 울었다.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무슨 의미였을까?
나에 대한 걱정.
나에 대한 원망.
나에 대한 감사.
말하기 전에도 대충 알았을 것이다. 내 퀘스트 진행상황은 그녀에게 꼬박꼬박 보고했고,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나만큼 정보가 있었으니까. 나보다 머리가 좋은 그녀다. 그 정도를 모를 리 없었다.
말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리지 않은 건 나를 질 알기 때문이겠지. 말려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아니까.
내가 그녀를 생각하는 만큼, 그녀도 나를 생각하니까.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도 나를 사랑하니까.
"...미안해요. 울지, 흑, 않으려, 흐으앙!"
울음을 그친 듯하다가도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 다시 울었다. 이제 보니 얼굴이 초췌하다. 그동안은 내 정신이 없어서 못 봤는데, 그녀도 말이 아니었다.
"아니야, 울어. 울고 싶은 만큼 울어."
"흐어어엉!"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좀 진정된 거 같아 눈물을 닦아주며 얘기했다.
"약속해줘. 내 앞에서만 울겠다고."
"흑, 흑, 네. 오빠도 이제 이런 거 숨기지 마요. 흑, 뻔히 보이는데, 뭘, 흑."
"미안해..."
그녀를 꼭 껴안았다. 살도 많이 빠진 것 같았다.
"그리고 잘 먹어야겠는데? 왜 이렇게 몸이 약해졌어?"
"...다 오빠 때문이에요."
"...미안, 아니 고마워. 나 때문에 매번 고생이구나."
"...알면 됐어요."
"그런데... 부탁이 또 있어."
"뭔데요?"
"살 좀 찌워."
"...왜요? 보기 싫어요?"
"아니, 보기 좋아. 예뻐. 살이 빠져도 예쁘고, 살이 쪄도 예쁠 거야. 그런데..."
"그런데요?"
"...좀 격렬하게 운동을 해야 할 것 같거든... 너에게 밝힌 걸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해."
"그게 무슨...아..."
그녀에게 숨긴다고, 나흘에 한 번 정도, 늘 하던 주기 정도로만 잠자리를 가졌다. 그 외의 시간엔 나 혼자 삭혔다. 그나마 예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은 날은 상관이 없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국방부에서 보내야 해서 힘들었다. 사람의 온기,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함을 나누는 게 죽음을 잊는 데 가장 좋은데... 그걸 못하니 진짜 미치는 줄, 아니 거의 미친 상태였다.
"...알았어요! 먹을게요! 돼지가 될 정도로 먹죠! 그렇게 된다고 나 싫어하는 거 아니죠? 그러면 죽어서도 저주할 거예요!"
"안 해. 절대로 안 해. 그럼 뭐 좀 먹자. 너 이래선 부서질 것 같아. 평소에 살찔까봐 못 먹었던 거 다 말해봐. 내가 다 사올게. 아니면 밖에 나가자. 가게도 대부분 텅텅 비었을 텐데... 손님 있으면 좋아할 거야."
"...그,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까 떠오르는 게..."
"일단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가끔은 그것 때문에 끼니를 거를 정도로.
"네, 가요! 당장 가요! 오늘은 정말 원 없이 먹을 거예요!"
눈물이 맺힌 눈으로 밝게 웃는 그녀. 너무 아름답다. 말하고 보니 진작 이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그녀가 사라질지 모른다. 이 시간은 정말로 소중한 시간이다. 이 하루 하루를 정말 잘 보내야 한다.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소중한 추억이 될 수 있도록.
+++
"오빠... 오빠..."
이프리타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예지가 꼭 잡고 있는 왼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오빠!"
내가 눈 뜬 걸 알았는지, 이프리타의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예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뜨거웠다. 나를 깨우느라 뜨거워진 이프리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몸도 벌겠다. 화상을 입은 것이다.
그녀를 안으며 힐을 썼다.
"예지야,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
"흑, 그래도, 그래도, 흐윽,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요. 끄윽."
그녀에게 알린 지 5일 째. 그녀는 내 방에서 아침을 맞았다. 이런 상황도 5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녀에게 고통을 주어야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긴 하지만, 나 때문에 화상을 주저하지 않는 그녀가 너무 사랑스럽다.
"왜 할 수 있는 게 없어. 이렇게 하면 되지."
화상이 가라앉은 걸 보고 그녀를 번쩍 들어 내 몸 위로 올렸다.
"흐윽, 꺄악."
내 거기는 벌써 성이 날만큼 나 있었다.
"잠깐만요, 아직, 준비가..."
"알아."
알몸인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내 물건을 비볐다. 그녀의 음부도 같이 마찰 되었다.
"..으응."
"갑작스러워서 미안, 그런데 참을 수가 없어.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것은 생존본능, 종족번식의 욕구에 가까운 듯했다. 죽음이 눈앞에 있으니까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건가? 그리고 그냥 예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참으려면 참겠지만, 그러면 죽음이, 죽음이 나를 좀 먹는다. 그건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좋지 않다.
"아응. 괜찮아요. 저도, 응, 오빠가 좋은 걸요. 하아..."
"그럼 넣을게."
"흐으윽!"
아직 빡빡했지만, 저런 고백을 듣고 나니 허벅지론 만족할 수가 없었다. 개미지옥에 발을 디딘 사람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몸도, 정신도 그녀에게 빨려 들어갔다.
"하으윽! 괘찬ㅎ앙, 좋아요, 하아앙!"
그게 요즘 내 방 아침 풍경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화상을 입는 걸 계속 보고 잇을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항해야 했다.
+ + +
대응이라고 해도, 대응할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죽음을 겪는 동안 내 정신은 그로기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금 나아지긴 했다. 혼란스러운 정신과 뒤죽박죽한 감각, 그러면서도 홀로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상태 속에서도 내 존재를 어느 정도 유지했다. 정신력이 좋아진 건지, 익숙해진 건지, 죽음에 들어가고서도 한동안은 괜찮았다. 그 시간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죽음은 비웃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무한함을 뽐냈다. 내 정신력이 좋아져서, 존재를 일정 시간 유지할 수 있으면 뭐하는가? 수백만 년을 유지할 수 있다면 ‘수천만 년’으로 나를 밀어붙이고, 수천만 년을 버티면 '수억 년'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대신 회복력은 좋아졌다. 연속해서 40번쯤 죽었을 때, 나는 뭔가가 변한 걸 느꼈다.
"예지야, 오늘은 집에 있어도 될 것 같아."
"네?"
"오늘은 혼자 나가겠다고."
"오빠?"
예지에게 말 한 이후로, 그녀와 함께 국방부에서 대기했다. 그녀와 함께 휴게실에서 대형 몬스터가 나타나는 것을 대비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봤지만, 상관없었다. 그게 안정이 됐다.
아침에 그녀와 있는 것으로 죽음을 거의 잊을 수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수도 없이 많았다. 길을 걸어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나는 그럴 때마다 죽음에 눌려 고통 받거나, 분심으로 마음을 분리해야 했다.
특히나 몬스터를 볼 때마다 떠올랐다. 내가 죽을 일은 거의 없지만, 그녀가 죽을 것이 두려웠다. 그녀가 혹시 사라지지나 않을까, 그래서 나처럼 죽음을 겪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옆에 있으면 그런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 내가 죽음에 빠지지 않게 해줬다. 그녀의 온기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걸 옆에서 20일을 본 그녀였다.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는 게 정상이었다.
"괜찮아. 오늘은 괜찮은 거 같아."
"...진짜예요?"
"응. 괜찮아. 그런 것 같아."
갑작스럽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차 소리만 들어도 움찔하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죽음이 내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했다. 물론, 아침부터 예지와 한바탕 했기 때문이겠지만.
"진짜, 진짜예요?"
"응. 진짜야. 오늘부터는 보모역할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래도 옆에 있으면 안 돼요? 어차피 할 일도 없고..."
그녀는 이번 학기 휴학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어다. 그녀 말고도 휴학한 이들이 태반이라, 학교는 텅텅 비어 있었다. 대형 몬스터 등장 이후, 사회는 아직 냉각되어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래도 되지만, 오늘은 한 번만 시험해 보자. 시험해 보고 결정하는 거야. 하루만 심심해도 참아줘."
"...알았어요. 참죠, 뭐. 보모 없다고 울지나 마요."
그녀도 진짜 심심해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내가 걱정되는 걸 테다. 그러나 나는 진짜 괜찮고, 그건 오후에도 드러났다. 나는 종일 죽음에 위협받지 않았다.
+ + +
"..."
눈을 떠니 이프리타가 보였다. 그녀는 막 내 가슴위에 온 듯했다. 그녀의 온도가 슬슬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 옆에는 예지나 나를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한 달, 직접 고통을 겪지 않는 그녀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예나 지금이나 반응이 같았다.
[...정신을 차린 건가?]
"오...빠?"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마음은 허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허했다. 그러나 눈은 금방 떠졌다. 이프리타가 내 피부를 태우면서 깨우지 않았는데, 금방 깨어난 것이다.
[정신 차렸어.]
[조금 좋아졌지만, 상태는 그대론가?]
[아마.]
[그럼, 나는 가지.]
[고마워.]
이프리타는 그걸로 사라졌다.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기에 예지도 그걸 알았다.
"이프리타님...?"
스윽.
일어나서 예지를 안았다. 따뜻했다.
"...일어나는 건 이제 괜찮은가 봐."
"...정말요? 정말? 오빠, 잠깐만 이거 좀..."
그녀가 내 품을 벗어나려고 했다. 내 얼굴을 마주보고 싶은가 보다. 하지만 나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를 더 끌어당기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아직은 추워... 이러고 있고 싶어."
"...알았어요. 괜찮아요."
그녀도 손을 들어 나를 마주 안아 주었다. 그게 51번째, 전부 다해 71번 죽은 후의 일이었다.
+ + +
"..."
눈을 뜨니 이프리타가 보였다. 나와의 연결이 회복되자마자 찾아온 거였다. 그녀는 나를 보다가, 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니 사라졌다.
"흐음..."
옆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예지였다. 이프리타가 몸을 데펴 나를 깨울 땐 그녀도 깨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이프리타는 나를 깨우기 전에 예지를 먼저 깨웠다. 하지만 내가 그냥 일어날 수 있게 된 이후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모른 채 자고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손으로 살짝 쓸어 내렸다.
"으음..."
그런데 좀 세게 한 모양이다. 그녀가 몸을 뒤척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오빠? 일어났어요?"
"응. 좀 더 자도 돼."
"...?"
눈을 치켜뜨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살포시 그녀를 안았다.
"이러고 있어도 되지?"
"...네..."
그냥 그러고 있었다. 온기가 편안했다. 그런데 그녀는 불편한 듯 꼼지락꼼지락 거렸다. 자세가 불편한 걸지도 모르겠다. 으음, 마주보고 있던 그녀를 뒤로 돌리곤 등 뒤에서 안았다.
"이러면 좀 편해? 잘 수 있겠어?"
"...아, 아니, 그게..."
"왜?"
"...오늘은 안 해요?"
"...아."
그제야 그녀가 몸을 배배꼬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 매일 아침마다 해댔더니, 몸이 절로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매일 해야 했던 나는 오히려 괜찮았다. 오늘은 마음이 춥지도, 공허하지도 않았다. 다른 무엇으로 채울 필요도 없었다.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리고는 그녀의 가슴에 손을 가져가는데, 그녀가 제지했다.
"잠깐,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괜찮은 거예요?"
"응? 아... 응, 괜찮아. 오늘은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아."
"축하해요!"
"...이게 축하할 일인가?"
"...그렇지만... 일단은요."
"그럼, 이제 안 할 거야?"
"...아..."
"다시 잘래? 읍."
그녀가 먼저 입을 맞춰 왔다. 달콤한 입술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눈곱이 낀 얼굴도 아름다워 보이는, 정말로 두꺼운 콩깍지가 씌어 있으니까.
그게 연속으로 64번 죽었을 때의 일이었다.
+ + +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죽음에도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다. 기뻐해야 할 일일까? 물론 익숙해진 건 현실세계에서만이다. 안에서는 여전히 생사를 오갔다. 죽음은 언제나 나를 한계까지,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한계까지 나를 몰아갔다.
그리고 총 87번의 자살을 하고 나서야, '실드'가 개발됐다. 진심으로 기뻤다. 이제 예지가 사라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자살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한 몫했다. 급한 불은 껐으니 더 죽을 필요는 없었다. 퀘스트와 후보자의 정체는 아직 몰랐지만, 이 퀘스트를 깨는 수밖에 없다는 건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억지로 멈추는 건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그 방편이라도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몰려 있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 후로 6개월이 흘렀다.
============================ 작품 후기 ============================
1년 -> 6개월로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