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37화 (137/160)
  • 137화

    42번째부터 50번째까지, 9개의 퀘스트를 깨는 동안 나는 세 번 죽었다. 자살 퀘스트가 2개였고, 한 번은 실패하면서 죽었다.

    지금까지 20번을 죽었지만, 죽는 건 여전히 두려웠다. 몇 천, 몇 만, 혹 몇 백만의 시간 동안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보낸다는 건... 가까스로 미치지 않을 뿐이었다.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받으세요! 100개의 퀘스트를 깰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시작'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51번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익숙한 메시지가 보였다.

    늘 하던 것처럼 시작이라고 말하려 하면, 내 정신은 내 몸이 아니라, 퀘스트 속 인물을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엔 퀘스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겠지. 만약 한 번에 성공한다면 퀘스트 속 인물의 기술 하나를 배울 것이다. 아마도 검술을 올릴 것 같다. 메시지 너머엔 전장이 펼쳐져 있었고, 내 손엔 검이 들려 있는 듯하니까.

    그러나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시작'이라고 외치는 건 같겠지만, 그다음부터는... 다를... 거였다...

    그다음부터 할 일을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정신이 거부했다.

    ...

    손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손을 벌벌벌 떨지 않았을까?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을지도 모르겠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뛸 거고, 눈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제자리를 찾지 못하겠지.

    왜냐하면, 나는 '자살'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30번째 퀘스트를 깼을 때, 현실에서 몬스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40번째 퀘스트를 깼을 때, 현실에서 마나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50번째 퀘스트를 깼을 때, 현실에서 대형 몬스터가 나타났다.

    이쯤되면 내가 세상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분명했다. 30번째, 40번째 퀘스트를 깼을 때도 의심은 했다. 하지만 '설마...'하고 넘어갔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 번쯤 반복되었으면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내가 퀘스트를 깨는 것과 세상의 변화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나, 내가 중요한 '키'가 되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걸까?

    답은 간단했다. 퀘스트 진행을 멈추면 된다. 그러면 세상의 변화도 멈출 것이다.

    작은 몬스터의 하루 침공 횟수나 침공시 등장하는 개체수가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형 몬스터의 침공 횟수나 그 강함도 커지지 않을 것이다.

    자연히 사람들이 사라지는 횟수도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예지와 부모님, 내 주변 사람들이 사라질 확률도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처음 퀘스트에 들어왔을 때는 마냥 기다렸다. 잠을 자는 내내 '시작'이라고 외치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을까 싶었다. 예전에 잠깐 들어왔다 나간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을 기대했다.

    그러나 시스템은 내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시스템이 메시지를 보내준 것이다.

    [1시간 뒤에는 강제로 시작합니다.]

    [...안 하는 선택지는 없는 거야?]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신의 진행 속도는 느립니다. 더 늦추는 건 권장하지 않습니다.]

    결국, 오늘 거대 흑곰을 본 순간 직감했던 대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자살自殺

    시스템이 뭐라고 하든, 퀘스트 안에서 죽으면 퀘스트는 진행되지 않고 끝난다. 자살용 퀘스트라도, 퀘스트가 제시하는 목표에 따라 죽지 않으면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으니, 어쨌든 스스로 죽으면 퀘스트는 끝날 수 밖에 없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시작을 말하고, 바로 죽으면 된다. 마침 칼도 들고 있으니, 그 칼로 바로 목을 찌르면 될 것이다. 그럼 칼이 살을 파고, 목의 동맥과 정맥을 자르고, 뼈도 갈라 버릴 것이다.

    결과도 예측하기 쉬웠다. 무지 아프겠지.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싶어지겠지만, 목을 잘랐으니 그러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은 10초 정도 갈 것이다. 그다음엔 '죽음'이 찾아오겠지. 죽음의 무게가 나를 짓눌러, 비명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쉽사리 할 수가 없었다. 시스템이 경고 메시지를 날린 것도 벌써 한참이 지났지만, 섣불리 들어갈 수도, 자살을 시도할 수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죽음이 주는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그게 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아는데. 경험해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매번 겪을 때마다 상처만 잔뜩 입는 일인 것을 너무나 잘아는데.

    어떻게 스스로 죽으란 말인가...

    하지만 해야 했다. 적어도 다리아와 알리나 자매가 방법을 찾아내기 전까진 해야 했다. 이대로 있으면 언제 예지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사라지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보고 슬피 우는 게 낫다. 여기서 죽으면 적어도 시간을 끌 수 있을 테니까.

    연속적으로 죽음을 겪는 게 힘들까, 그녀를 잃고 후회하거나, 슬퍼하는 게 힘들까?

    ...솔직히 말하면 연속적으로 죽음을 겪는 게 더 힘들 것 같다. 그래서 여기서 자살하고 싶지 않다.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면 되지 않을까? 내가 왜 굳이 죽어야 하는 걸까. 왜?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예지를 잃어 버리고 사는 게 사는 걸까?

    수십 개의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내 정신 상태는 누더기가 되었다. 누구의 기억인지도 모를 것들이 머릿속에 들어와, 내가 누구인지 헷갈리는 상태였다. 그런 나를 구원해주는 게 예지였다. 그녀가 나를 기억해주니까, 내가 존재했다는 증명을 해주니까. 그래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변화를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를 잃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녀가 사라지면, '나'란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나'는 사라지고, 퀘스트 속의 '나들'만 남아서, 그냥 숨만 쉬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그게, 살아 있는 걸까?

    ...

    직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면서 알게 된 건 무엇인가? 죽음은 지독히도 외롭다는 것이다. 나는 그 외로움에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았고, 그 부름이 응답되지 않는 것에 실망했다.

    '같이'라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 건지 알았다.

    그런 '죽음' 안에서 내가 그토록 바라던 건 누구인가? 예지였다. 부모님도 찾았고, 동생도 찾았고, 아냐 누나도 불렀고, 기찬이도 만나고 싶었고, 이프리타도 몇 번이나 소환했지만, 결국 내가 부르고 불렀던 이름은 예지였다.

    부모님의 생각도 사라지고, 동생도 사라지고, 아냐 누나도 희미해지고, 기찬의 얼굴은 지워지고, 이프리타와 연결되었던 영혼의 허전함도 원래 그런 거라고 여기면서도, 예지의 이름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부르고 또 불렀다. 목이 터져라 불렀고, 피를 토하면서 불렀다.

    그토록 바라던 그녀인데, 그런 그녀를 잃고서 내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보통 사람처럼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사랑을 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다.

    20번 정도밖에 안 되는 '죽음'이었다. 하지만 체감 시간은 20번이라는 작은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 번에 최소 수백만년 씩, 대충 1억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예지를 부르고, 또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런 그녀를 잊을 수 있다고? 말도 안 된다. '죽음'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있고,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있는데, 그녀가 죽은 이후의 삶은 그런 희망조차 사라져 버린 세계다. 나는 그걸 견딜 수 없다. 좋게 되면 '미친 후보자'가 되어 버리겠지.

    ...시작.

    챙챙챙!

    "쿠아아악!"

    "죽여!"

    "죽이라고!"

    정신은 맑았고, 검끝은 의외로 떨리지 않았다. 날카로운 끝이 내게로 서서히 다가오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내 차가움이 목젖에 느껴졌다가, 보호되어야할 속살이 공기중에 드러났다.

    푸욱.

    푸시식!

    눈앞에서 솟아오르는 피를 보았다. 귀에서 이 몸의 주인을 불리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뭉개졌다. 목에서부터 통증이 느껴지다가, 목 아래의 감각이 순간 사라졌다.

    내 피로 물들은 핏빛 하늘은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 작품 후기 ============================

    조금 짧네요...

    다음 편은 길게 쓰든지, 빠르게 올리든지..... 둘 중 하나는 해보겠습니다.

    **수정했습니다.

    조금 전엔 이상한 걸 올렸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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