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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129화 (129/160)
  • 129화

    회의가 끝나고, 중령이 나를 붙잡았다.

    "약소하지만, 가르칠 때마다 수당을 주도록 하겠네."

    "수당 말씀이십니까?"

    생각지도 못해서 되묻고 말았다.

    "왜 그렇게 놀라는가? 그럼 공짜로 내놓으라고 한 줄 알았나?"

    "그건 아니지만..."

    뭘 받을 생각은 없었다. 알렉스를 시작으로 일련의 퀘스트를 겪으면서 이런 문제엔 기대를 걸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돈? 명예? 권력? 별로 원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검귀에 가까웠다. 관심 있는 건 검보단 안전이었지만.

    "시간당 천만 원 어떤가? 큰돈은 아니지만, 재정상의 문제로 이게 최선일 것 같군."

    "주신다면 거절은 안 하겠지만... 위에서 그만큼 주겠습니까?"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게 내 교육은 허무맹랑하게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침공 이후 겨우 한 달 반쯤, 사람들은 도망 다니는 것에만 익숙해졌을 뿐이다. 우리가 가진 힘에 대해서도, 몬스터들이 가진 힘에 대해서도 실감할 수 없을 것이다.

    "정신 조작을 해서라도 하게 만들어주지."

    "...사양하겠습니다. 중령님께서 꼭 필요한 곳에만 그 능력을 쓰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굳이 저 때문에 깰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남발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대단한 사람이다. 한 번 사용하면 두 번 사용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능력을 절제하다니. 그는 처음부터 저랬던 걸까. 아니면, 말도 안 되는 퀘스트를 경험하고 있는 걸까.

    "이건 중요한 일이네. 꼭 필요한 일이지. 돈밖에 줄 수 없어서 오히려 미안하네."

    중령이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겠지.

    "정 그러시다면 받죠."

    "그래. 받아두게.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휴짓조각이 될 수도 있지만, 그다음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도움이 될 거야."

    중령은 밝게 웃었다. 중년의 웃음이 밝아 보이는 건 또 신기한 경험이다.

    '그다음'이라...

    모르겠다. 생각해보지 않았다.

    매일 밤마다 다른 세계에 가서, 죽음의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고통스럽다. 하루하루를 겨우 넘기고 예지와 얼굴을 맞대는 게 유일한 낙일 뿐... ‘그다음’은 아직 내게 먼 이야기였다.

    그런데 중령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일, ‘100개의 퀘스트’ 다음의 일을.

    세계가 앞으로 몇 번 더 바뀔지 모르는 이때에도, 분명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럽게 웃는 눈에서 빛이 반짝이는 것 같다.

    나이 먹은 아저씨의 얼굴에서 그런 걸 보는 건 뭔가 이상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나도 웃으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다음, 그때 제가 한 번 사죠."

    "하하하. 그래, 기대하고 있겠네. 그럼 가르치는 일은 맡기겠네. 나도 배우고 싶지만, 오늘은 자네 수업료를 책정하러 가야겠구먼."

    그 길로 중령과 헤어져 국방부 지하에 있는 무도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먼저 간 김천수 중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 +

    라이트닝 소드의 전수.

    무턱대고 다 모아놓고 할 순 없었다. 나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감도 안 잡혔고. 그래서 처음엔 1 대 1로 가르치기로 했다. 선택된 건 마나가 가장 필요한 김천수 중위.

    그의 능력은 텔레포트로, 신속한 대응을 위해선 꼭 향상이 필요했다. 지금도 한국, 일본, 중국을 오갈 수 있지만, 거리도, 회복력도, 힘도, 앞으로를 생각하면 전부 부족했다.

    그리고 그가 라이트닝 소드를 배우면, 퀘스트를 좀 더 잘 깰 수 있다. 그럼 텔레포트 능력 자체도 좀 더 강해질 것이다.

    검도나 유도, 태권도를 수련하기 위한 다목적 무도장에 김천수 중위가 서 있었다.

    "안녕."

    "어, 준비는 다 됐어?"

    동갑인 그는 나와 작은 인연이 있었다. 예전에 영화관 골목으로 들어가 사라졌던 남자가 바로 그였다.

    "됐지. 그런데, 많이 힘드냐?"

    "으음... 육체 쪽은 하나도 안 올렸어?"

    "한두 개? 체력 정도만 찍었지."

    유비랑 비슷했다. 다들 시스템이 충고해 주는 대로만 찍은 건가? 나는 어떤 가이드도 없었는데... 왜 나만?

    "체력만 있으면 될 거야. 고생은 좀 하겠지만."

    "그래? 다행이다. 잘 배우면 너처럼 검기를 막 뽑아내고 그러는 건가?"

    천수의 목소리가 살짝 들떴다. 내가 라이트닝 소드를 처음 익힐 때와 같은 반응이다.

    "어려울 거야. 검에 대한 이해가 같이 이어야 하니까."

    "...쳇."

    "일단 시작해 보자. 나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은 안 오지만..."

    "안 오지만?"

    벽 쪽에 모여 있는 운동 도구 중에서 죽도 2개를 꺼냈다. 하나를 천수에게 던지고, 그 앞에 가서 기수식을 취했다.

    "이렇게 해 봐."

    그는 내 자세를 보고 대충 따라 했다. 엉망이었다. 손목은 구부러졌고, 검 끝 약간 내려가 있었다.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면 한 걸음 내디뎌 훤히 보이는 그의 명치를 찔러 버릴 뻔했다. 발의 위치나 어깨의 방향, 가슴이 열린 정도까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어때? 이렇게 하면 돼?"

    "..."

    "뭐가 잘못됐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잘못됐지..."

    "...그, 그럼 어째?"

    내 반응이 충격적이었을까? 그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러나 그게 당연한 거다. 그는 육체 쪽 능력은 하나도 올리지 않은 초보자 중의 초보자고, 나는 검술 그랜드 마스터니까.

    "괜찮아. 애초에 기대도 안 했어. 네가 배울 건 검술이 아니라 호흡법이니까. 동작이 완벽할 필요는 없을 거야. 아마도..."

    "잘 됐... 아마도는 대체 뭐야?"

    "안 해봤으니까, 나도 잘 몰라. 그래도 죽지는 않겠지. 잘못되어 봐야 기혈이 꼬여 사지가 마비되는 수준일까."

    "...진짜야?"

    놀라서 묻는 그는 재빨리 자세를 풀었다. 사지가 마비되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보통사람이라면. 그러나 너 정도면 그렇게는 안 되겠지. 마스터에는 오른 거지?"

    "응."

    "그럼 알아서 컨트롤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 퀘스트 내에서 마나를 다룬 적도 있을 거 아냐?"

    "그렇지. 윽, 그럼 괜히 놀랐잖아. 그 말 먼저 하라고."

    "사지가 마비되면 안 배울 생각이었어?"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자세를 취했다. 나는 아까부터 기수식 상태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하니까."

    재능이 있는 걸까? 그의 자세는 조금 전보다는 나았다.

    "좀 전보다는 낫네. 그럼 시작해보자고. 일단 내 동작을 대충 외워. 호흡은 그다음에 가르쳐 줄게."

    "좋아. 가보자고, 셔틀 동지!"

    그는 나를 셔틀 동지라고 불렀다. 요즘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게 우리 둘이라서 그렇다.

    "야, 매번 말하는 것 같은데, 그건 좀 아니잖아?"

    "그런가? 아무렴 어때."

    다음에 또 이야기해야 할 것 같군.

    + + +

    재능이 있긴커녕, 자세를 제대로 외우지도 못하는 천수에게 자세만을 겨우 가르쳐 주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김없이 퀘스트가 시작됐고, 나는 학자의 몸에 들어와 있었다.

    유언 우드(Ewan Wood).

    그는 다일럼 왕국의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별다른 일이 없었으면 그 마을에서 농사일하다가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촌장의 심부름을 하다가 천재성이 드러났고, 촌장의 배려로 영주성에 가서 일할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변하기 시작했다. 시종으로 일하다가 똘똘함을 인정받아 소영주의 공부 친구가 되고, 거기서 가정교사의 눈에 띄어 대륙 아카데미까지 가게 되었다.

    대륙 아카데미는 대륙 제일의 학교로,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꽤 파격적인 간판을 내민 곳이었다.

    '실력이 있는 자는 누구나 오라. 배움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진짜 아무나 올 수는 없었다. 국경을 통과하는 것도 문제고, 학비도 문제였다. 애초에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와서 공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언은 한 단계, 한 단계씩 올라가며 기본을 다졌고, 대륙 아카데미에 가서도 뒤처지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그의 재능은 활짝 피었고, 끝내 그는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기에 이른다.

    최초의 평민 출신 교수.

    그의 재능만으로 된 건 아니었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추천해준 촌장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가정교사의 청을 들어준 영주의 배려가 있기에 가능했고, 평민 출신 교수를 만들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민 출신이라 학계에서의 영향력도, 학교에서의 영향력도 떨어졌지만, 교수로서 그는 평민이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 그가 조국 다일럼 왕국의 멸망 소식을 들었다. 백 년 이상 국소적인 전쟁이 이어지던 옆 왕군, 아크랑 왕국과 큰 전쟁을 치렀고, 그 전쟁에서 져 모든 영토를 빼앗겼다고 했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에게 기회를 준 조국을 좋아했다. 다른 나라에 다혈질 바보라고 놀림 받는 조국이었지만, 그만큼 호탕했고, 그래서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는 조국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배웠고, 교수까지 되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뭔가를 이루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뭘 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아크랑 왕국과 싸울 무력이 없었고, 아크랑 왕국에서 땅을 살만한 금력도 없었다.

    대신 그에게는 학문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학문을 나누고,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일개 평민을 교수의 자리까지 오르게 한 공부. 실제적인 도움은 안 될지 모르나, 의식의 변화는 일으킬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변화가 행동까지 이어질 것이라 믿었다.

    상대가 제국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아크랑 왕국은 원래 비슷한 국력의 국가였다. 가능성은 있었다. 아크랑 왕국이 백 년 간 크고 작은 전쟁으로 얽히고설킨 다일럼 왕국을 제대로 흡수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게 분명했다. 그전에 사람들의 뜻을 모아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는 암중으로 왕국에 접촉해서, 반쯤 노예가 된, 이등 국민이 된 그들을 가르쳤다. 다일럼 왕국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역사를 가르쳤고, 아크랑 왕국이 얼마나 악랄한지, 그들이 저지르는 만행, 현재를 가르쳤다.

    실용적인 학문도 가르쳤다. 야금술, 무기술 등. 그의 전문분야는 아니었지만, 대륙 아카데미에는 없는 게 없었다. 그는 각종 정보와 기술을 훔치다시피 해서 왕국에 전달했다.

    그러기를 10년.

    그는 반란군의 정신적 지주가, 살아남은 왕족의 스승이 되었다.

    지금 내 상황과 비슷한 건가? ...그 목적은 조금 다르지만.

    내게도 인류 전체에 대한 마음이 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그 자체로 인류를 위한 건 아니다. 그보다는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예지를 위해선 '인류'가 필요하다는 것에 가깝다. 우리끼리만 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우리만 살아남아 뭘 할 수 있을까?

    결국, 남는 건 사람뿐이다.

    아무튼, 반란군의 정신적 지주로 암중 활약하던 그는 현재 위험에 처했다. 아크랑 왕국에서 드디어 그의 존재를 파악한 것이다. 아크랑 왕국에서 암살자를 아카데미로 보냈다고 한다.

    소식은 그 움직임을 파악한 다일럼 부흥군에게서 들었다. 그들 역시 아카데미로 오는 중이었다. 문제는 파악이 늦어 이틀의 시간차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식솔 몇과 함께 대륙 아카데미를 나왔다. 그리고 이틀 동안은 험한 길을 골라 다니며, 행적을 숨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결국 그의 일행은 아크랑 왕국의 암살자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그의 몸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 작품 후기 ============================

    지금까지 보셨으면 이 소설이 돈을 모아 세력을 이룬다든가, 회사를 차린다든가, 힘으로 군림한다든가 하는 소설이 아니라는 걸 아실 줄 알았는데....

    그래요.

    제가, 제 글 솜씨가 별로라서 그렇습니다....

    짜놓은 흐름대로 분위기를 맞춰 썼어야 했는데, 그날그날 멘탈이나 생각에 영향을 받은 부분이 좀 많은 듯....ㅠㅠ다음 소설에는 좀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밝히는 거지만, 이건 아포칼립스, 인류 종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두 푼 문제가 아니에요. 매일 죽는 주인공은 물론이고, 퀘스트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후보자들은 다들 본능적으로 인류의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 부분이 일상이나 퀘스트에 가려 잘 표현되지 않았네요. 앞서 말씀 드렸지만, 제 글 솜씨가 미흡한 탓입니다.

    좀 더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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