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26화 (126/160)
  • 126화

    '죽이면 안 되네!'

    '알았다고!'

    병사들 사이를 빠르게 움직이며 주먹과 발로 타격을 가했다. 의지가 더해져 영혼이 실린 타격은 보기엔 가벼워도, 위력은 셌다.

    "윽!"

    "크헉!"

    병사들은 다리나 복부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어디 한 군데 부러졌을 것이다.

    "잡아! 잡으라고!"

    지휘관이 계속 호통을 치지만, 허공에 외치는 소리일 뿐이다. 일반 병사들이 나를 상대할 가능성은 없었다. 유일한 기회는 처음 포위망을 형성했을 때였다. 그러나 포위망은 내 기세에 눌려 풀렸고, 병사들은 지금도 내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검은 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다수 대 혼자의 상황일 때, 일반적으로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건 위험했다. 공중에서 방향 전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중에 뜬 나를 공격해야 할 병사들은 둔해져 있었다. 나를 보고서도 공격하지 제때 공격하지 못했다. 내 뒤를 따르는 창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병사들의 머리를 밟으며 창의 숲을 빠져나갔다.

    "뭐하는 거야! 공격해!"

    지휘관의 무리한 요구가 이어졌다. 병사들은 무작정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 눈먼 공격에 맞을 내가 아니었다. 그들의 공격은 내 뒤를 겨우 쫓아오는 거로 모자라, 아군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크아악!"

    "아악! 내 눈!"

    고통에 찬 비명이 왕궁 앞뜰을 채웠다.

    '...마음이 아프군.'

    '이것까진 방법이 없어.'

    '알고 있네.'

    백작은 병사들을 죽이기 싫어했다. 그건 지금 달려오고 있는 애송이 그랜드 마스터와 마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는 원래 그가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었다. 죽어야 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왕.

    아니, 사실 그는 왕에게도 크게 분노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그는 인간에 대해서 믿음이 적었고, 그만큼 실망도 안 했다. 그는 지금의 왕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자신을 내칠 것으로 생각했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니까.

    알렉스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대응은 많이 달랐다. 알렉스는 상실감과 분노에 미쳐 버렸지만, 그는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기대를 낮추고, 사람보다는 검에 집중하여 자신을 지켰다.

    두 사람은 양 극단에 존재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는 말을 못 하겠다. 둘 다 비등비등했다.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인리히 백작 쪽이 삶을 지킬 가능성이 높아 보였지만, 너무 삭막한 거 같다.

    아무튼, 지금은 애송이 그랜드 마스터를 상대해야 했다. 애송이라곤 해도, 백작과 비슷한 60대였지만.

    그랜드 마스터와 마스터가 다가오자, 내 주변에 병사들이 썰물이 물러가듯 빠졌다. 나는 땅으로 내려왔고, 다섯 사람이 내 사방을 점했다.

    "항복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겠지요."

    "그런가? 가능할 것도 같지 않나? 물론, 항복하는 건 내가 아니라 자네겠지만."

    창날을 들어 그랜드 마스터를 겨눴다. 검은 날이 빛을 빨아들이며 좀 더 길어졌다. 그들도 검을 들어 자세를 갖췄다.

    "무슨 기술인지 모르겠지만, 저희 다섯을 상대로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그거야 겪어 보면 알겠지."

    먼저 왼쪽의 마스터에게 돌진했다.

    휭-

    역시나 마스터는 마스터였다. 체내에 마나가 있으니 나와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내 주먹을 피하고, 공격을 해왔다.

    스걱.

    그러나 마스터의 검은 내 검기에 반쯤 잘린 다음 빠졌다. 무리한 동작으로 인한 빈틈은 다른 마스터들이 채웠다. 그랜드 마스터가 소리쳤다.

    "검과 직접 부딪히지 마! 몸을 직접 공격해!"

    빠른 판단이었다. 그랜드 마스터답지 않게,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걸로 이길 수 있을까?

    휭- 휘익, 쉬이익.

    여섯 명이 뒤엉켜 싸우는 데도, 바람 소리만이 났다. 밖에서 보기엔 대등해 보일 것이다. 5대1이 대등하다는 것에서 이미 상황을 끝난 것 같지만, 일단은 그렇게 보이겠지.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그들은 내 검을 피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상태였고, 나는 어떻게든 그들의 연계를 깨기 위해 집중했다. 작은 차이였지만, 그 차이가 싸움을 갈랐다.

    "윽."

    마스터 중 한 명이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속도를 위해서인지, 갑옷도 갖춰 입지 않은 그는 이 한 번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의 배에서 피가 꿀렁꿀렁 솟아 나왔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알고 있네.'

    한 명이 빠지자, 안 그래도 급조한 티가 나던 그들의 연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한 명씩, 한 명씩, 내 검에 어디 한 군데가 고장 나서 나가떨어졌다.

    애초에 힘과 속도에서 내가 우위에 있었다. 그들이 체내 마나를 사용한다지만, 나는 거기에 영혼을 더할 수 있으니까.

    그랜드 마스터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애송이는 애송이다. 내가 쓰는 기술을 어렴풋이 아는 것 같았지만, 경험치가 모자랐다. 나야 현실에서 매번 써야 하니, 그 위력이 다를 수밖에.

    캉, 카강.

    반 토막 난 그랜드 마스터의 검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검은 검기는 그의 목 앞에 멈춰 있었다. 그의 표정은 복잡했다. 의아함과 억울함, 분노가 뒤섞인 상태였다.

    "설마, 밖에서 싸웠으면 달랐을 거로 생각하는 건가?"

    "..."

    "우습군. 밖에서 싸웠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이제 막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으면서..."

    "..."

    검을 이루던 의지를 거뒀다. 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숨겨 놓은 패가 있으면 지금이야."

    "...없습니다."

    천천히 대답한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할 것이다. 자신보다 강자라고 생각은 한 거 같지만, 이렇게 준비를 많이 했는데도 이기지 못했으니.

    "그래? 그럼 나는 가겠네. 쫓아오려면 쫓아와도 좋아. 결과는 다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무슨 수가 있다면 언제라도 환영하네."

    땅에 누워 상처를 부여잡고 있는 마스터 넷과, 멍하니 서 있는 그랜드 마스터를 뒤로하고 결계를 벗어났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은 내가 움직이자 알아서 길을 열어 주었다.

    지지지직.

    결계를 벗어나자, 마나가 다시 내 수중으로 들어왔다. 가볍게 정신을 집중하니 스피리추얼 소드가 내 손에 잡혔다.

    반투명한 검은색 롱소드.

    현실에서는 만들지 못한다. 마나의 도움이 없으니까. 가볍게 휘두르니, 바람 소리도 나지 않았다. 왤까? 물리적인 게 아니라서?

    마법사들을 처리할까 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는 모양새를 보고 그냥 뒀다. 그랜드 마스터를 제어하기 위한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이제 어떻게 하지?'

    '밖으로 나가. 왕궁 밖으로 쭉 나가면 내 공관이 있다. 일단 거기로 가서 짐을 챙겨야 해.'

    '그렇게 하지.

    아마 거기까지 가진 않을 것 같다만...

    + + +

    그 뒤로, 비슷한 퀘스트가 이어졌다. 유비의 말대로였다.

    37번째 퀘스트는 마족 침입을 막아낸 이가 주인공이었다. 그는 초장부터 자신을 배신할만한 자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리고 힘을 나누지도 않았다. 약간의 반발과 권력 다툼이 있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38번째는 자살 퀘스트였다. 알렉스와 비슷했다. 아니, 좀 더 심했다. 이번에 배신한 건 동고동락한 동료들이었다. 10년 이상 동고동락하며 몬스터를 잡았던 동료들이 그를 배신했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 악귀가 되었고, 이번엔 진짜로 자살을 해야 했다. 쉽지 않았다. 망가진 정신에 가득 찬 복수심은 강했다. 육체를 차지하는 게 힘들었다. 그전에, 자살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스스로 목을 찌르는 일...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39번째는 하인리히 백작과 비슷했다. 은거 기인의 제자가 주인공이었다. 그는 스승처럼 은거하여 지내다가, 세상의 위기에 밖으로 나왔다. 그가 상대한 건 악룡. 머리에 화기를 맞아 미쳐 버렸다는 악룡은 인간을 괴롭히고, 대륙을 정복하는 데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그 혼자 상대한 건 아니었다. 인간 세계의 모든 강자가 모여, 악룡과 일대 혈투를 벌였고, 끝내 악룡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는 그 후 귀신처럼 사라졌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역사서에만 찾아볼 수 있었다.

    40번째. 40번째 퀘스트의 주인공은 야망이 가득한 자였다. 그리고 능력도 출중했다. 억압하는 제국에 맞서 나라를 세운 주인공과 친구들은 힘을 모아 제국의 절반을 빼앗고, 제국에 버금가는 나라로 만들었다. 다들 나이가 먹고, 이제 나라의 성장이 둔해질 수밖에 없는 시점이 되자, 그는 가장 먼저 개국공신들을 처리했다. 나는 그때 그의 몸에 들어가, 그가 하는 일을 보고, 또 지시해야 했다. 단순히 야망 때문에 오랜 동료들을 처리하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부패한 자도 있었고, 반란을 준비하는 자도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냉혹해 보였다. 다른 퀘스트와 달리 그 퀘스트에서 그의 힘은 막강했기 때문이다. 그가 원한다면, 죽이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처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죽여 후환을 없애는 걸 택했고, 퀘스트의 목표도 같았다.

    어쩌면, 이게 왕의 자질일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 사회를 사는 나에겐 약간 공감이 어렵지만. 권력은 집중되면 부패하긴 마련이잖아?

    그렇게 40번째 퀘스트를 깼다.

    타다다다당!

    시가지에선 총격전이 벌어졌다. 경찰차와 군용 트럭을 엄폐물로 삼은 경찰과 군인들이 고블린과 오거를 한쪽으로 몰아넣고 총을 쏘았다.

    "크아아아악!"

    고블린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젠장, 대이능부대는 언제 오는 거야?"

    "방금 전에 보냈다고 합니다!"

    "그건 다행이군. 그때까진 버티겠지."

    밀리고 있는 쪽은 고블린과 오거였다. 하지만 불안해하는 쪽은 경찰과 군인이었다. 고블린은 괜찮았는데, 오거가 문제였다.

    수십 고블린 사이에 거인처럼 서 있는 오거 다섯 마리. 오거는 총알을 맞고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 일부 오거들은 고블린을 들어 방패로 삼았다.

    지금은 총으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고블린이 다 죽으면 공간이 생기고, 오거가 움직일 것이다. 그러면 경찰이나 군인으로서는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오거는 빨랐고, 군인들의 공격은 스치는 게 고작일 테니까. 물론 인원이 좀 더 많았다면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시가지에 배치된 신속대응반은 그 정도의 인원이 안 됐다.

    오거 한 마리에서 다섯 마리까지 고작 한 달 반. 빠르게 느는 몬스터를 보면서 정부도 배치를 서두르고 있지만, 전국 곳곳, 서울 구석구석까지 다 챙기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발에 땀이 나게 움직이는 건 우리 부대였다. 그중에서도 날 수 있는 나와,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김천수 중위가 가장 많이 불려다녔다.

    언제나처럼 바람의 정령에서 내려 경찰차의 뒤에 착지했다.

    "대이능부대 소속 강 민 중위입니다. 총격을 멈춰 주시겠습니까?"

    "오오! 얘들아, 사격 중지! 검은 검사가 오셨다!"

    "검은 검사다!"

    반겨주는 경찰들과 인사하는 군인들에게 슬쩍슬쩍 고개를 숙이며, 라인을 넘어갔다. 화약 냄새가 대로변에 가득했다. 피 냄새도 그 사이사이에서 느껴졌다. 깔끔해야 할 아스팔트 위는 고블린의 시체와 총알 세례에 너덜너덜해진 차들 때문에 어지러웠다.

    "크아아앙!"

    "끼아악!"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고블린과 상처 입은 오거 다섯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대로를 달렸다. 품에서 단검을 꺼내 검기를 형성했다. 검은 검기가 단검 위로 쭈우욱 뻗었다.

    위이잉.

    좀 더 시간을 들이면 검령 검강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냥 검기만으로도 충분하고, 그게 더 편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땅을 울리는 진동도 잊고서 단검을 바라봤다. 검은색의 날은 짙었고, 형태도 뚜렷했다. 검강? 그러나 그 순간에 다시 일렁이는 검은 불꽃의 모양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콰아앙!

    오거의 나무 몽둥이, 총알이 몇 개나 박혀도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기둥을 피하며 검으로 그 다리를 베었다.

    일단 이놈들부터 상대해야겠다.

    "크아악!"

    "끼앙!"

    "와아아! 우리 편 잘한다!"

    "역시 검은 검사가 짱이다!"

    "헉..."

    오거와 고블린들은 낙엽처럼 쓰러졌다. 구경하던 경찰과 군인들은 대부분 기뻐했다. 하지만 그중에는 나를 괴물 보듯이 쳐다보는 시선도 분명 존재했다.

    처음부터 그런 시선은 존재했지만, 2주 전 폭발 테러범을 잡고 나서는 확실히 늘었다. 일선의 군인까지 그렇게 볼 정도니. 아니지, 일선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으니까 더 실감하는 건가?

    하여튼, 그보단 좀 전에 본 게 더 중요해.

    다시 검기를 형성했다. 이 검기는 본래 검강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 세계에 마나가 있었다면 검기가 아니라 검강이 형성된다. 하지만 마나가 없어서 기본 뼈대를 이루는 의지, 내 영혼의 힘만 표출되어 검기 같은 검은 불꽃이 검에서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에 보이는 건 분명 검은 불꽃 같은 검기가 아니라, 완벽한 검의 형상을 한 검강이었다.

    이건!?

    또 금방 사라졌지만, 그건 분명 검강이었다. 그제야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머릿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마나.

    묵직한 공기 같은 느낌을 주는 마나가, 현실에서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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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드디어 이번 챕터가 끝났네요...

    조금 길었죠?

    다음 화는 어떻게 될지....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ㅋㅋㅋ

    댓글과 추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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