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25화 (125/160)
  • 125화

    검귀 하인리히 백작.

    그는 변방의 백작 자제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검에만 매진했다. 신동 소리를 들으면서 시작했지만, 단순히 검이 좋아서였다. 다행히도 그의 노력, 사랑은 헛되지 않았다. 신동으로 그치지 않고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21살에 최연소 소드 마스터 기록을 갈아치웠고, 마흔이 되어서는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는 소드 마스터로서 짧은 군 복무를 한 후, 변방의 땅에서 수련에만 매진했다. 신동이 망가지는 일은 흔했고, 중앙은 변방의 일에 신경 쓰기엔 너무 바빴다. 그는 잊혔고, 스스로도 자신을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런 것보다 그는 그다음을 보고 싶었다. 그랜드 마스터 다음, 검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그랜드 마스터 이상은 없다고 알려졌었지만, 그는 그다음이 있다고 믿었다. 정확하게는 검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게 끝이 아닐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20년. 그의 실력을 세상이 알게 된 건 그때였다.

    큰 전쟁이 벌어졌다. 제국이 두 명의 그랜드 마스터를 앞세워 그가 있는 왕국을 쳐들어온 거였다. 왕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랜드 마스터가 없으니,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소식은 그에게도 전해졌고, 그는 칩거를 깨고 전면에 나섰다. 아버지, 할아버지, 그 윗대가 만들었고, 섬겨왔던 나라를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왕국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전쟁에서 두 명의 그랜드 마스터를 베었고, 열 명의 마스터도 베었다. 그의 활약으로 왕국의 마스터들은 전장에서 날아다녔고, 병사들의 사기도 회복되었다. 왕국은 쳐들어온 적을 다 물리쳤다.

    그리고 거기에 멈추지 않고, 기세를 모아 거꾸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넓디넓은 제국엔 그랜드 마스터가 두 명 더 있었지만, 왕국의 반대쪽을 지켜야 해 대응이 어려웠다. 결국, 왕국은 승리자의 입장에서 휴전을 맺었고, 제국의 땅을 일부 받아 영토도 넓히게 됐다.

    "하인리히 백작 만세!"

    "백작님이 우리를 지켜 주셨다!"

    백작은 백성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취급받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던 나라였다. 그런 나라를 혜성처럼 나타난 그랜드 마스터가 구했다. 인기가 넘칠 수밖에 없었다.

    "국왕 폐하 만세..."

    "국왕 폐하도 뛰어나시긴 하지만, 역시 하인리히 백작님이..."

    "예끼, 그런 소리 하다가 잡혀간다네."

    백작의 인기가 올라간 만큼, 왕의 인기는 줄어들었다. 인기 뿐 아니라 힘도 줄었다. 백작의 옆에 귀족들이 모였다. 그가 전쟁 공로로 관직을 받고, 중앙에 머물게 되자, 자연스럽게 세력이 만들어졌다.

    성군이라기보단 폭군에 가까운 왕이 그를 시기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처음엔 구세주처럼 바라보다가, 제국이 물러가자 눈엣가시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백작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이가 먹을 대로 먹었고, 변방의 영지에선 자기네들끼리 끊임없이 싸웠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지금의 왕처럼 권력에 목숨을 건 사람이었다. 왕과 같은 사람들을 많이 봐온 그는, 왕을 보자마자 나쁜 일이 있을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왕궁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권력에 관심도 없었고, 부귀영화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오직 맘 편히 검을 휘두를 수 있는 환경이었다.

    바로 떠나지는 않았다. 전쟁을 치르면서 생긴 인연들이 있었다. 적어도 그들의 앞을 조금 닦아 놓고 떠나야 했다. 말년에 작은 즐거움을 선사한 젊은이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는 그를 위한 몇 가지 일이 끝나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 예상보다 빠르군.'

    하지만 왕의 움직임이 빨랐다. 새로운 그랜드 마스터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곧 일이 있겠구나 짐작은 했다. 그래도 조금은 시간이 있을 거라 여겼는데, 전격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이다.

    '이건... 많이도 몰려왔군.'

    왕이 베푼 만찬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 왕궁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그의 주변에서 어마어마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마스터 넷에 그랜드 마스터 하나인가? ...마법사도 있는 것 같군.'

    주변을 둘러싼 수백의 일반 병사들을 제외하고서도 이 정도의 힘이 모여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죽을 게 확실한 포진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머리가 나쁜 건지, 질투에 미친 건지.’

    끽해야 이상한 누명을 씌워 좌천을 시키겠거니 했는데, 암살이라니? 게다가 그 장소가 왕궁? 그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허무맹랑한 일이었다.

    ‘이 정도 일 줄은 몰랐군. 역시 사람 보는 눈은 아직 모자란가.’

    그는 왕의 질투와 권력욕을 너무 쉽게 봤다. 검만 파온 그에게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대신 왕은 그랜드 마스터를 너무 쉽게 봤다. 그는 이 상황에 놀라긴 했지만, 두려워하진 않았다. 그는 그랜드 마스터니까.

    ‘애송이 그랜드 마스터를 믿는 모양인데, 작별 인사로 수준 차이를 가르쳐 줘야겠군.’

    그랜드 마스터. 인간으로서는 더 오를 곳이 없다는 위치다. 물론 인간인 이상 약점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랜드 마스터로서, 검에 일생을 바친 자로서 그는 당당했다.

    ‘그래도 내가 수적으로 열세니, 내가 먼저 시작해 볼까.’

    그는 손을 앞으로 뻗어 정신을 집중했다. 허공에 검을 만들어 내려고 했다. 그랜드 마스터만이 만들 수 있는 스피리추얼 소드(Spiritual Sword, 무형검)였다.

    찌이잉--

    그때였다. 그의 주변 마나가 격하게 요동치더니, 갑자기 정지했다. 그리고 그가 만들던 스피리추얼 소드가 흩어졌다.

    '마법...'

    그는 무섭게 피어오르는 마나 기둥 네 개를 느꼈다. 좀 전, 마법사들이 있던 자리였다.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랜드 마스터가 한 세대에 한두 명씩 꼭 제국에는 그들을 제어하는 방법이 있었다. 수십 명의 마법사가 수명을 깎아가며 만드는 일회용 아티팩트. 그걸 사용하면 그랜드 마스터를 일반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주변 마나가 말을 안 들어.'

    완전히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그의 뜻에 동조해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형상이 완전해지지 못했다. 만들어지다가 흩어졌다.

    '이래서야, 검을 쓸 수가 없는데...'

    입궁할 때 검은 반납했고, 그의 몸엔 날붙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스피리추얼 소드를 만들 수 있는 그에게 만약을 대비한 물품들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일 뿐이었으니까.

    쿵. 쿵.

    그가 고민하는 사이, 병사들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긴 창을 앞세운 그들은 한 발짝, 한 발짝씩 접근 중이었다. 그가 처음에 느꼈던 그랜드 마스터와 마스터 넷은 멀찍이 떨어진 채, 접근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나 동결 범위 밖에 머물렀다.

    '저기까지만 가면 되는 모양이군... 쉽진 않겠지만, 못할 건 없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창날을 바라보며 그가 막 움직이려는 찰나, 내가 그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 + +

    [서른여섯 번째 퀘스트, 하인리히 백작을 도와 왕궁을 탈출하세요!]

    상황은 명료했다. 나는 마음껏 날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전에, 하인리히 백작을 상대해야 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내 존재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육체의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상대하기는 쉬웠다. 분심과 동화가 있으니까. 60대 남자의 정신과 하나가 되는 건 거부감이 들었지만, 여전히 안주하지 않고 검을 쫓는 그 정신은 배울 만했다.

    그 과정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났고, 곧 나는 육체를 통제하며 첫 공격을 시작했다. 포위당했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기세.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했다.

    콰아앙!

    백작이 익힌 검술은 온전한 검술로, 체술 따위는 붙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트닝 소드엔 간단한 체술이 붙어 있었다. 간단한 체술이지만, 몸에도 의지를 더할 수 있는 그랜드 마스터가 펼치면 상상할 수 없는 위력을 보이게 된다.

    "크아악!"

    내 발 한걸음에 바닥에 깔린 대리석이 깨지며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병사들은 제자리를 지키려 노력했지만, 돌이 투구 틈새로 들어가 얼굴을 때리는 데도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진형은 흐트러졌고, 병사들의 정신은 분산되었다. 그에 따라 주변을 촘촘히 막고 있던 창의 대열에도 흐트러짐이 생겼다. 그중 하나의 창을 잡아 대를 부러뜨리고, 창날은 병사에게 던져 버렸다.

    우지끈. 푹!

    "크아악!"

    창날은 병사가 입은 갑옷을 뚫고 들어갔고, 병사는 넘어지며 대열을 흩트렸다. 이어 나는 몇 개의 창날을 더 부숴 던지며 혼란을 더 키웠다. 대열의 뒤에서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붙어! 밀어붙이라고!"

    "마나 동결 결계의 안이다! 저 자식도 일반인이랑 다를 바 없어!"

    하지만 완벽한 일반인은 아니지. 게다가 마나가 동결된다고 해서 검기를 못 쓰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위잉!

    마지막으로 부순 창날은 대를 좀 길게 부숴서, 손잡이 대용으로 삼았다. 그걸 두 손으로 잡고, 창날에 의지를 집중했다. 검은 기운이 날에 맺히더니, 이윽고 일반 롱소드 정도로 길어졌다.

    "속임수다! 그냥 밀어붙여!"

    속임수라니. 이건 좀 더 고급스러운 검기라고. 이 세계에선 쓸 필요가 없어 아는 자가 없는 것 같지만, 내 세계에서는 그 효과를 톡톡히 본 기술.

    퀘스트 내에서도 이걸 쓸 줄은 몰랐다. 마나가 있는 퀘스트 안에서는 이런 게 아니라, 검강을 만들면 되었다. 그게 훨씬 편하고, 위력도 좋았다.

    창날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나 그 효과는 가볍지 않았다. 검은 날이 지나가는 공간에 있던 건 전부 두 동강이 났다.

    투투투둑.

    병사들이 들고 있던 창이 두 동강 나며 땅 위로 비처럼 떨어졌다.

    "..."

    좀 전부터 굳어 있던 병사들은 물론이고, 뒤에서 호통치던 지휘관도 말이 없었다.

    "자, 어서 오시게나!"

    하지만 동강 난 나무 막대기만 들고 있는 그들이 먼저 올 리가 없었다.

    "그럼 내가 가지!"

    병사들의 대열로 뛰어들었다. 일차 목표는 이 포위를 뚫고, 마나 동결 결계 밖으로 나가는 것!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sonage 중대한 영향을 끼친 차원이 대부분입니다.

    @알리 의견 감사합니다. 최대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래미 70화...ㄷㄷㄷ 본 계획은 확실히 그랬습니닼ㅋㅋ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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