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알렉스 사후, 대륙엔 전쟁이 일어났다. 마왕으로 대륙이 한 번 뒤집어졌고, 알렉스 때문에 한 번 더 뒤집어졌다. 공포로 대륙을 억누르던 알렉스가 사라졌으니, 전쟁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명분은 다양했다.
"마왕 알렉스를 처단한 건 우리다!"
"여기 알렉스가 용사일 때 낳은 아들이 있다. 그는 유일한 용사의 자손이다!"
"마왕으로 몰아 성왕 알렉스를 죽인 이들을 몰아내자!"
"신궁 그라시어스의 주인, 엘레나를 따르라!"
수많은 귀족이 저마다의 이유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서로 연합하고, 반목하며 계속 전쟁을 벌였다.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20년, 전쟁이 그치고 몇 개의 나라가 세워졌다. 그중에서 가장 큰 나라는 엘레나를 앞세운 그라시어스 왕국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엘레나는 없었다. 엘레나라 주장하는 인물과, 그라시어스라고 여겨지는 활은 있었지만, 실제 엘레나와 활은 다른 곳에 있었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듀플렉시온 산맥. 그 산맥의 깊숙한 계곡,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험한 곳에 두 사람이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와 완숙한 미를 뽐내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아줌... 아니, 언니. 이건 뭐예요?"
어린 여자아이가 무심코 말하다가 중년 여인의 눈빛에 말을 바꿨다. 아이는 은색 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검이지."
"피잇, 그건 나도 알아요. 왜 여기 이렇게 있냔 말이에요!"
주변엔 돌덩이가 너부러져 있었다. 먼지와 넝쿨로 뒤범벅인 돌덩이의 표면에는 문양이 희미하게 보였다. 큰 건물이 있었던 흔적 같았다. 그 중심부, 지름 1m 정도 되는 평평한 공간에 검이 절반 정도 박혀 있었다. 검도 먼지와 넝쿨로 인해 본래의 빛을 잃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문양이 예사롭지 않았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단다."
"주인이요? 이런 산골에서 무슨 주인이에요? 여기 오는 데만 한 달이나 걸렸는데... 진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아이는 지난 한 달간의 고생을 떠올렸다. 절벽을 오르고, 계곡을 건너고, 울창한 숲을 통과해 왔다. 위험한 지역은 언니의 등에 업혀 지났지만, 대부분을 제 발로 걸어야만 했다. 이제 막 수행을 시작하는 아이에게는 죽을 맛이었다.
"잘 알고 있지. 하지만 그걸로 힘들어하면, 이 활은 다룰 수 없어."
"알아요. 잘 아니까 꾹 참고 왔잖아요. 그런데 여기 왜 온 거예요? 이 검 찾으러 온 거예요? 주인 찾아 주려고?"
아이 딴에는 열심히 생각한 결과였다. 이런 산속에 처박혀 있으면 주인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으니까, 언니가 대신 찾아 주려는 게 아닐까? 자신이나 언니가 이 검의 주인이란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자신은 언젠가 언니의 활을 물려받아야 하니까. 저런 볼품없는 검의 주인 따윈 될 수 없었다.
"아니, 그냥 보러 온 거야."
"헉... 그냥 보러 이런 곳까지 와요?"
"중요한 검이란다. 그리고 네 훈련도 겸해서 온 거지."
"치, 그거 지금 그냥 생각한 거죠? 막 갖다 붙인다고 제가 모를 줄 알아요? 저 다 컸거든요?"
행동이나 말투가 어른 같은 건, 전쟁고아라서일까. 중년 여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에서 아이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아이는 아직 아이였을 뿐이다.
"...쳇, 또. 언니, 나중에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언니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저 거든요?"
"괜찮아. 나는 착한 동생을 믿으니까."
"....바보!"
아이는 능글맞게 웃는 언니를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언제나 아름다운 언니지만, 저럴 때는 술집에서 주정하는 아저씨 같았다. 아이는 삐졌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뒤로 돌아 계곡의 입구, 짐을 풀어놓을 곳으로 걸어갔다.
"..."
중년 여인, 엘레나는 다시 검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듀플렉시온..."
성검 듀플렉시온. 검신의 색은 검은색에서 은색으로 변했지만, 모양은 변한 게 없었다. 알렉스 사후, 성검은 스스로 날아 이 자리로 돌아왔다. 이곳은 마왕이 있을 때, 알렉스가 성검을 처음 발견한 자리였다.
'이런 곳에 있었네... 그라시어스, 날 왜 여기로 데리고 온 거지?'
이곳에 온 건 그녀의 뜻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세상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여기에 온 건 그라시어스의 수작이었다. 활이 그녀의 무의식에 이런저런 영향을 준 탓이었다. 그러나 그라시어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좋아. 오랜만에 보니까, 나쁘지 않네.'
20년.
그녀는 수많은 일을 겪었다. 대부분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에게 가장 힘든 일은 알렉스와 지낼 때였다. 희망이라곤 없었던 절망의 나날, 악으로 폭력을 견디며, 스스로 희망이 있다 세뇌시켰던 시간들.
하지만 20년,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옛날 마검을 보면서, 그녀의 마음속에는 분노보다 안타까움이 먼저 떠올랐다.
'당신이 잘못한 건 없었겠지.'
자세한 사정은 몰랐다. 그렇지만 그녀도 영웅 취급을 받으며 다양한 일을 겪었다. 그가 겪었을 일을 대충은 추측할 수 있었다.
'당신을 용서할 순 없지만, 고마운 점도 있어. 덕분에 나는 이렇게 도망쳤으니까.'
그녀는 마지막으로 검을 한 번 더 보고는 아이를 따라 계곡을 나섰다.
'다음 주인은 행복하길 바랄게, 듀플렉시온.'
+ + +
[축하합니다. 서른다섯 번째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셨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왕 알렉스'의 능력 중 하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걸 선택하시겠습니까?]
씁쓸했다. 퀘스트를 끝마쳤는데도 씁쓸했다. 어제오늘은 씁쓸한 일뿐이었다. 알렉스의 죽음도, 후보자 남자의 죽음도, 도망쳐야만 하는 엘레나도...
[S급 [이프리타 소환 Master]의 경험치 40%를 S급 [이프리타 소환 lv.7 92.39%]에 더합니다. 경험치가 상승하여 [이프리타 소환 lv.9 27.44%]가 됩니다.
이프리타를 배웠다. 이제 이프리타를 24시간 내내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가진 본래 힘 전부를 현실로 가져오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강해져 봐야 무슨 소용일까. 저런 끝이라면... 모르겠다. 예지가 있는 게 오늘따라 정말 다행으로 느껴졌다.
+ + +
칠곡에서 일어난 폭발사고. 몬스터에 의해 도시가스 관이 터져 폭발한 것...
기사 아래에는 댓글이 꽤 달려 있었다.
[젠장, 그게 말이 되냐? 도시가스가 수십 번 폭발해? 내가 그 근처에 살았는데, 무슨 전쟁 일어난 줄 알았다니까.]
[전쟁이라니, 무슨 북한이라도 쳐들어 왔나?]
[땅꿀이 칠곡까지... ㄷㄷㄷ]
[내 친적이 기잔데, 압박받았다는데? 사진 다 삭제됐데.]
[내가 듣기로는 후보자들끼리 싸웠다던데...]
[걔네들이 왜 싸워?]
[우리 검은 기사님 그럴 리 없어!]
[누가 검은 기사가 그랬데? 빠순이는 끼어들지 마삼.]
[빠순이 아니거든!]
[후보자들도 사람인데 싸우기도 하겠지.]
[걔네들이 무슨 사람이냐. 괴물이지.]
탁.
같이 보고 있던 노트북을 예지가 말도 없이 덮어 버렸다. 예지를 쳐다봤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거 보지 마요. 볼 필요 없는 거 같아요."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난 괜찮아."
"그게 뭐예요? 전 잘 모르겠어요."
'괴물'이라는 것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냐...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 앞에서 굳이 들출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기사가 몇 개 없네요. 반응도 적고."
"중령님이 한 기자회견이 효과가 있었나 봐."
중령은 사건 직후인 어제, 바로 기자 회견을 열었다. 그는 그 장소에서 정신 조작을 동원해가며 사죄했다. 이 일은 우리의 부주의로 인해 일어난 일이며, 앞으로는 주의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며, 국가와 부대를 믿어달라고 호소했다.
"그런 말이 효과가 있어요? 나중에 봤지만... 그냥 말뿐인 느낌이었는데."
"생방으로 봐야 해. 그래서 내가 생방으로 보지 말라고 한 거고."
솔직히 그가 한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방송을 통해 퍼진 그의 힘, 정신을 조작하는 힘이었다. 그의 힘은 사람들의 정신을 파고들어, 그들이 가진 의문과 불만, 두려움을 강제로 억눌렀다.
그 덕에 세상은 아직 조용했다. 물론, 이전보다 대이능부대에 대한 불만이 불거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구나. 어쨌든 다행이네요. 시끄러워지는 것보다는 낫겠죠. 지금은 인력도 빠듯한 거죠?"
"응. 요즘 몬스터들이 더 자주 나타나서..."
위이잉.
"또 왔다. ...나도 정식으로 부대에 들어가야 할까 봐."
"피이, 그거나 지금이나 무슨 차이에요? 들어가도 어차피 바로 옆인데... 아, 오빠가 부대에 들어가면 저도 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녀의 말대로 들어가거나 말거나 거의 차이가 없다. 요 며칠은 특히나 그렇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불려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부대에 들어가는 걸 반대했다. 막연한 걱정이었다. 나도, 그녀도 정체를 모르는.
"...알았어. 그냥 자택 근무로 만족할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폰을 들었다. 역시나 김철곤 중령이었다.
"조심해요. 꼭이에요."
"응."
쪽.
걱정스러운 눈을 한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나는 방을 나섰다.
+ + +
오거 네 마리와 오크 열 마리. 신촌 근처에 나타난 놈들을 처리하고 돌아왔다. 쉽지 않았다. 놈들을 죽이는 건 쉬웠지만, 사람들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하는 게 어려웠다. 따로 지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 조심했다. 대이능부대와 후보자의 일은 나의 일.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오피스텔로 돌아와서 올라가려는 데, 1층으로 내려오는 유비와 마주쳤다. 편의점에 가는 길인 것 같았다. 이 편의점은 만남의 장소인가? 사람을 자주 만난다.
우리는 물끄러미 서로를 쳐다봤다.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그녀를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미안."
"뭐가?"
"엘레나..."
엘레나는 유비였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모든 걸 해결하고 싶었는데, 나는 이번에도 그녀의 모든 것을 봤다. 물론 미안하다는 건 그런 것 때문은 아니다. 그냥, 그녀를 때리다시피 한 게 마음에 걸렸다.
"엘레나? 아... 아직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어?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뭐, 그냥 인사말이야. 어쩌다 만났고, 머리에 떠올랐으니까 하는 거지. 일부러 찾지는 않았잖아?"
"그래..."
그러고 나니 대화가 끊겼다. 당연했다. 우리 사이에 할 대화가 없으니까.
"너는 그런 퀘스트가 많았어?"
"나? 뭐가?"
"자살 퀘스트..."
"아아... 그건 몇 개 없었어. 하지만 비슷한 내용의 퀘스튼 많았지."
"응?"
"뭐, 이제부터 시작하는 거 같으니, 하다 보면 알 거야."
"..."
또 끊겼다. 그냥 올라갈까 하다가, 궁금한 게 있어 물어봤다. 그나마 우리 사이에 공통된 화제라고 할 만한 사람에 관해서.
"누나는 잘 있어?"
"그래."
단답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더 믿음이 갔다. 누나는, 잘 있구나.
"그럼."
유비가 나를 지나쳐 편의점 쪽으로 움직였다. 그 등에 대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부대에 들어올 생각은 없어?"
"아냐를 지켜야 해."
그녀는 아직 부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대에서도 그녀의 존재를 몰랐다. 처음에는 그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대를 믿을 수도 없고, 그녀가 예지나 아냐 누나, 사장이나 미영 누님을 지키는 게 좋아 보였으니까.
그런데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몬스터들은 점점 늘어만 갔다. 대침공 이후 후보자들도 곳곳에서 나타나 이제 총원 51명이지만, 그것으로도 한국을 커버하기가 버거워졌다. 앞으로는, 더더욱 그렇겠지.
"그래도, 앞으로는 필요할지도 몰라. 그때는 도와줄 수 있어?"
"...그래, 필요하다면."
"아, 몇 번째야?"
"60번째..."
빠르다. 나는 이제 겨우 36번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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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Pia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