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22화 (122/160)

122화

"삐졌어?"

"..."

예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누워 있다. 좀 전까지 분명 좋아라 했으면서, 대체 왜 그러는지.

"예지야?"

"...말 걸지 마요."

물론 좀 갑작스럽긴 했다.

"미안해."

"..."

그런데도 예지는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너무 심했나? 이불을 조심히 내리는데, 몸도 돌아가 있었다. 등만 보였다. 등에는 키스 자국이 잔뜩 이었다. 보고 있자니 하나하나 기억이 났다. 저건 처음에 했던 거, 저 위치는 예지가 특별히 움찔했던 거, 예지가 교성을 질렀던 곳...

그러고 있으니 예지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걸로 끝이에요?"

"응? 아니, 미안.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터는 이렇게 안 할게."

"...후우..."

깊은 한숨과 함께 그녀가 몸을 돌렸다. 얼굴이 굳었다. 눈빛이 무서웠다. 이번엔 내가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녀가 내 머리를 잡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

"...말해 봐요. 강민 어린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어요?"

"풉."

"웃지 말고 말해 봐요. 선생님이 다 들어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좌우로 그녀의 가슴이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숨쉬기도 힘들고, 말할 때마다 자극이 심했다.

"벌이에요."

"웁."

그녀가 내 머리를 더 끌어당겼다. 이건 벌이 아니라 상인 것 같은데...

"...그게 아까..."

천천히 퀘스트 동안 있었던 일을 꺼냈다. 매일 하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사실을 알린 이후로, 날마다 그녀에게 퀘스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해 왔다. 오늘은 그 장소가 조금 달랐을 뿐.

"...그렇게 된 거야."

말을 하는 동안 자세는 역전이 되었다. 이제 그녀가 내 품에 안겨 있었다. 가슴이 축축했다. 그녀는 좀 전부터 울고 있었다. 손으로 그 눈물을 훔쳤다.

"왜 이렇게 자주 울어. 예전에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았는데..."

"흐윽, 제가 언제 그랬다고... 이게 다 오빠 때문이에요. 흑."

애써 밝게 말을 하려고 하지만, 그녀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미안. 내가 다 잘못했어."

"...오빠가, 윽, 뭘 잘못 했어요. 오빠도 피해잔데... 윽."

"알았어. 알았어..."

"흐아아앙."

그녀를 품에 안고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울음이 그쳤고, 그녀와 나는 그 상태로 계속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막 잠이 드려는 무렵에, 분위기를 깨는 소리가 들렸다.

위이이잉.

내 폰은 방에 두고 왔으니, 예지의 폰이었다.

"...예지야?"

"으응, 왜요..."

"전화 오는 것 같은데?"

"...이런 때 무슨 전화예요... 나중에 다시 걸겠죠..."

그러나 폰은 계속 울렸다.

위이이잉.

"아, 진짜..."

울다가, 웃다가, 화도 낸다. 볼에 눈물 자국이 한가득이라도 내 눈엔 예뻐 보인다. 예지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녀는 상체를 일으켜 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끊을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전화를 끊지 못하고, 의아한 얼굴로 폰을 내밀었다.

"왜...."

"...오빠 전화인 거 같아요."

폰엔 김철곤 중령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왜 이사람 번호가 너한테 있는 거야?"

"저번에 연락받았어요.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하겠다고요. 저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내 표정이 살짝 굳었나보다. 예지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때문 아니니까 괜찮아. 일단 받아 볼게."

전화번호가 있는 건 상관없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예지도 전화할 때는 있어야 하니까. 지금 문제는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찾을 상황이 발생했다는 거다. 무슨 일이지?

"중령님?"

"역시 거기 있었군. 미안하네. 너무 급한 일이라..."

"대체 무슨 일입니까?"

"도와주게나. 정중위가 위험에 빠졌네."

"기찬이가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렇다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할 테니 일단 부대로 올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가죠."

전화를 끊고는 옷을 찾아 입었다. 예지가 옷 입는 걸 도와줬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해 줄게."

"...꼭이에요."

"응. 기다리고 있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방을 나왔다.

+ + +

오피스텔에서 국방부는 코앞이라 바로 도착했다. 중령은 이미 건물 앞에 나와 있었다. 나는 바람의 정령을 움직여 그 앞에 내렸다.

"무슨 일입니까?"

"가면서 얘기하지. 나도 태워줄 수 있겠지?"

"가능은 합니다만."

"그럼 빨리 가게나."

왼손으로 중령을 안고, 오른손으로는 정령의 다리를 잡았다. 보기에 썩 좋은 자세는 아니지만, 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어디로 갈까요?"

"용산역으로."

용산역도 근처였다. 역에 바로 내리지 않고, 중령의 인도에 따라 플랫폼까지 갔다. 그곳에는 유선형으로 생긴 한 량의 기차와 군인들이 모여 있었다. 기차는 KTX의 앞 차량을 개조해 놓은 것 같았다. 멋있었다. 흰색 바탕에 푸른색이 들어간 배색도 나름대로 멋이 있었다. 국방색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판인데, 군대치고는 꽤 세련된 느낌이다.

플랫폼에 있던 군인 중 장교 한 명이 중령에게 경례했다.

"충성!"

"충성. 준비는 다 됐겠지?"

"네! 완료됐습니다!"

"좋아. 그럼 타지."

영문도 모르고 기차에 올랐다. 안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얼마 전에 부대에 합류한 김창수 중위였다. 김창수 중위는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으로, 이능도 비슷한 계열이었다. 그는 발을 철갑으로 두를 수 있었다.

"충성!"

"충성. 일단 앉게. 자네도 빨리 앉고. 이 기차는 빠르니까."

중령이 말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바로 기차가 출발했다. 한 량 뿐이라서 그런가, 가속이 엄청났다. 순식간에 최고속도에 도달했고, 그 속도를 계속 유지했다.

어라?

"눈치가 빠르군. 이 기차는 안 선다네. 선로는 다 비워뒀어. 이대로 30분이면 대구에 도착하지."

"그렇군요. 기찬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대치 중이네."

"몬스터입니까? 벌써 처리하기 힘든 몬스터가 나왔습니까?"

기찬이의 서프보드는 공격형은 아니다. 같이 다니던 한소위도 공격형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가는 건지도.

그러나 중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상대는 인간이야."

"인간이요?"

인간이 어떻게... 설마!?

"그래, 상대는 후보자지. 누군가가 폭주하고 있네. 능력도 좋아. 폭발형일세."

"..."

대구와 폭발. 예전에 읽었던 기사가 떠올랐다.

대구서 원인불명의 건물 붕괴... 8명 사망.

그렇다면, 사람을 죽여야 하는 건가? ...현실에서?

"상황이 어떻습니까? 저격은 불가능한 겁니까?"

김창수 중위는 그런 고민 따윈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총격은 일단 보류해 놓았네. 우선 목표는 회유야."

"회유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앞일을 위해선 후보자는 그 무엇보다 중요해. 그자가 악인이든 말든 상관없네."

"설득이 가능한 상황입니까?"

"불가능. 그래서 내가 가고 있지 않은가."

중령의 말에 그제야 그의 능력이 떠올랐다. 정신조작.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면, 후보자에게도 통하는 모양이다.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럼, 저희는 어째서 가는 겁니까?"

"회유 다음에는 제압이지. 자네와 강민군은 대인전 최강 아닌가? 자네들이 힘을 합하면 제압하는 건 가능할 거야."

"알겠습니다."

김창수 중위는 그걸로 물러났지만, 나는 할 말이 있었다.

"그보다는 마취총 같은 게 낫지 않습니까? 그리고 기찬이가 위험하다면서요?"

"마취총은 어려워. 접근이 어렵네. 그리고 정중위는... 말로 하는 것보다는 보는 게 낫겠지."

중령은 내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중위에게도 손짓해서 같이 보라고 했다.

펑펑펑펑

멀리서 찍고 있는 것 같은 화면은 계속 터지고만 있었다. 일반 주택가로 보이는 주변은 이미 다 폐허로 변했다. 잠깐씩 폭심지에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이래서야 접근은 무리겠습니다. 폭발의 위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자네나 강민군이라면 충분히 견딜 정도일 거야. 저렇게 팡팡 터트려서 그런지 위력은 약하다고 하는군."

침착한 목소리의 질문과 답변. 그런데 그 전에 물어야 할 게 있는 거 아닌가?

"...사람들은 얼마나 죽은 겁니까."

"...100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네."

"언론은 반응은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난리도 아닐 것 같습니다."

"전력을 다해 통제 중이네. 어떻게 됐든, 내가 한 번 나서야 할 것 같지만..."

"..."

이해할 수 없었다. 100명이 죽은 게 저렇게 일상적인 일인가? 물론 몬스터 대침공 이후에 사람이 죽는 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그리고 저들은 꿈속에서 이보다 더한 상황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그래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다는 게...

"저게 정중위입니까?"

김중위가 가리키는 곳에는 은색 반구가 있었다. 반구는 폭발에도 끄떡없이 제자리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간혹 폭발이 멈출 때마다 반구에서 흰빛이 폭심지로 향했다.

"맞아. 안에는 한소위가 같이 있어. 견제하면서 주의를 끌고 있네. 지금은 폭주 상태라 그냥 마구잡이 공격에 떠날 생각도 없는 모양이지만, 언제까지 갈지..."

"빨리 가야 되겠습니다."

"그래야지."

중위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중령은 나를 보았다.

"강민군, 상황은 대충 알겠나?"

"...네. 일단은."

"좋아. 이제 20분이면 도착할 테니, 좀 쉬고 있게나. 그때까지 정중위가 다칠 일은 없을 걸세. 그래도 위험하긴 하니, 내가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다고 하면 섭섭하다네."

중령은 내 굳은 표정을 그렇게 이해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보다는 둘의 침착한 반응에 놀랐을 뿐이다. 자세히 보다 보니 마냥 침착하기만 한 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가만히 감상에 젖어 있는 것보다는 앞을 생각하는 데 익숙해 보였다.

나도 오늘만 아니었으면 그랬을지 모르겠다. 퀘스트를 하면서 내 감성은 죽었다고 해야 할 만큼 사라졌다.

그러나 오늘이니까. 오늘은 모든 게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100명이나 죽었다는 것도, 기찬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도, 내가 그놈을 죽여야 할지 모른다는 것도.

아침에 겪은 죽음의 기억을 머리가 저 혼자 재생 중이었다.

휙휙 지나가는 기차 밖 풍경을 보며, 나는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예지가 보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후원해주신 HerbPia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제 빼먹었더군요.

그밖에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쪽은 아이디가 안 나오니...ㅠㅠ어제 선작이 갑자기 늘었더군요... 무슨 일일까요...?

추천과 코멘트를 기다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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