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밤.
광란의 저녁을 보낸 알렉스는 잠이 들었다. 옆에는 몇 시간 전까지 그의 폭력을 견뎌낸 여인이 기절해 있었다. 삽입만 했을 뿐, 삽입 이외에 그 어떤 행위도 남녀 간에 맺는 관계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 덕에 여인의 몸 곳곳은 푸르게 변했다.
"쿠우우."
알렉스가 코를 골았다. 그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그의 검은 바닥에 내팽개쳐졌고,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옆에 쓰러져 있는 여인이 일어나 그의 심장을 찌르기만 하면, 그는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 이 여인은 그런 목적으로 그의 옆에 누워 있었다.
스르륵.
여인이 조용히 일어났다.
자박, 탁, 스르륵.
알렉스가 자고 있어서 보이진 않았다. 들리는 소리로 미루어 보면, 여인은 마검 듀플렉시온을 검집에서 꺼낸 듯했다. 알렉스의 머릿속에 있는 어젯밤의 기억처럼.
으스스.
듀플렉시온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위에 한기를 내뿜었다. 알렉스가 그걸 느끼곤 이불을 당겨 몸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그녀의 행동이 빨랐다.
화르르륵.
불꽃이 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 앞이 따뜻해졌다. 따뜻함이 한기를 밀어내자 알렉스는 더 편한 자세로 누웠다.
"죽어! 죽어! 죽어!"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알렉스는 그제야 잠에서 깼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차분히 살폈다. 여인, 마리나가 쓰던 신궁의 사용자인 엘레나가 그의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듀플렉시온을 양손으로 잡고 내려찍는 중이었다. 다만 검은 그의 앞에 생성된 불꽃 방패를 뚫지 못했다. 마검 듀플렉시온은 그의 검, 그를 제외한 사람들에겐 그저 날이 잘 선 검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아직도 포기를 못 했군."
"죽어! 죽어! 죽으란 말이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내가 왜 죽어야 하지?"
"너 때문에! 너 때문에!"
화르륵.
방패는 알아서 반응하며 엘레나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녀는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공격했다. 온몸에 푸르게 멍이 들었고, 검을 잡은 손에서 피가 났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말해 봐. 나 때문에 뭐?"
"너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친구들이! 데이빗이! 죽어! 제발 좀 죽으라고! 왜, 왜 안 죽는데! 죽일 수 있다며, 죽일 수 있다며... 말 좀 해보라고! 그라시어스!"
그라시어스는 신궁의 이름이다. 그러나 듀플렉시온에 봉인된 그라시어스가 대답을 해줄 리 없었다.
“으아아아악!”
그녀는 더 강하게 검을 내려쳤다. 그러나 그녀의 분노는 어떤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방패는 변함없이 알렉스의 앞을 막았다.
"크크크큭."
그녀의 사정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높은 세금에 도망치다가 죽은 그녀의 부모.
병사들에게서 그녀를 지키다가 죽어간 그녀의 연인 데이빗.
도망치지 못하고 노리개로 잡혀간 그녀의 친구들.
지금은 그저 그녀가 더 절망하도록 스스로 말하게 했을 뿐이다.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다. 그녀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몽글몽글 솟아나 듀플렉시온으로 들어갔다.
"죽으라고!"
"크크킄, 어디, 계속 재롱을 피워 보아라!"
그녀만 그런 일을 당한 건 아니었다. 마왕 제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도망치다가 죽었고, 왕의 옛날 이름을 들먹이다가 죽었고, 가만히 있는데도 죽었다. 제대로 사는 사람들이 없었다. 모두 두려움에 떨며, 알렉스의 눈에서 보이지 않는 삶만을 바랐다.
이런 나라가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알렉스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뛰어난 검사와 마법사는 다 전 마왕 바알의 손에 죽었다. 마왕을 물리쳤던 신의 무기들은 주인을 만나기 전에 현 마왕 알렉스가 다 부숴 버렸다. 유일하게 남겨 둔 신궁 그라시어스는 듀플렉시온으로 봉인했다. 그 탓에 듀플렉시온도 흡수만 가능할 뿐, 방출은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힘이 있었다.
이프리타.
그는 마족을 죽이는 와중에 정령술을 익혔다. 처음, 그의 정령술은 보잘 것 없었다. 하급 정령을 겨우 소환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령술은 쑥쑥 늘었다. 듀플렉시온이 사람들의 영혼과 감정으로 강해지는 것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중급 정령, 상급 정령, 최상급 정령... 끝내 그는 정령왕을 불러내는 데 이르렀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마왕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도 이프리타였다. 이프리타가 없었으면, 이 대륙은 여전히 마왕의 지배하에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 이프리타가 지금 그를 지켜주고 있다. 그런데 누가 그를 막겠는가? 그가 의식을 잃고 있어도, 이프리타 스스로 알아서 방어해 준다. 그랜드 마스터가 와도 성공할지 의문인 상태다.
"죽어! 죽으라고! 아니면 나를 죽이던지!"
그녀는 의미 없는 동작을 멈추고 듀플렉시온을 자신의 목으로 돌렸다. 하지만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알렉스가 듀플렉시온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
그녀는 다시 듀플렉시온으로 알렉스를 찔렀다. 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그녀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이프리타가 만드는 불꽃 방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좋아! 좋아! 더 찔러 보라고!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또 죽을 것 같으냐! 크하하하하!"
이 일도 지난 몇 달 동안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녀는 이미 미쳐 있었고, 그걸 보고 즐기는 알렉스도 정상은 아니었다.
퀘스트를 깨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프리타를 막기만 하면 되니까.
[그만해! 이프리타!]
[...자살엔 동조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이 상황이 자살이 아니고 뭐지?]
[...정신을 차렸으면 해결할 생각을 해라. 죽으려 들지 말고. 그리고 난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정도는 네가 받은 배신감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겠지.]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역사는? 이건 마왕이나 다름없잖아!]
[언제부터 사람들의 눈을 신경 썼나. 죽은 이는 죽은 이. 중요한 건 현재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지금부터라도 바꾸면 된다. 왜 죽으려고 하지? 너는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았다. 뭐든지 할 수 있다.]
요지부동.
엘레나가 검을 찌를 때부터 시작된 대화는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이프리타의 뜻이 확고했다.
‘자살’은 용납할 수 없다.
알렉스의 행동은 정당하다.
그 뜻 꺾으려면 내 뜻이 확고해야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 뜻을 계속 흔들렸다.
먼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자살’ 퀘스트라지만, 죽음의 고통은 그대로일 것이다. 그걸 알고 있으니까 말은 ‘죽여 달라’고 했지만, 무의식은 ‘살려 달라’고 했다. 영혼으로 연결된 이프리타가 그 마음을 못 느낄 리 없다.
그리고 나 역시 알렉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정당해서, 지금과 같은 행동도 안타깝기만 했다. 거부감은 들지만, 잘못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절망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런 나의 설득에 힘이 실릴 리 있겠는가?
...그래도, 퀘스트는 깨야 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하지?]
[이프리타.]
화르르륵.
마음으로 부른 건 이 세계의 이프리타가 아니었다. 내 부름에 나타난 건 내 세계의 이프리타, 불꽃 여우였다.
[뭐, 뭐지? 넌?]
[이프리타, 이프리타를 막아 줘!]
[뭘...?]
긴 시간 말로 전달할 시간은 없었다. 엘레나의 체력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 시간을 넘기면,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다. 관련된 기억을 통째로 이프리타에게 전했다.
[...알았다.]
한번에 알아들은 그녀. 생각의 통로로 복잡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알렉스의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 이어질 게 뻔하니까, 그녀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 세계의 이프리타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하는 거냐, 알렉스!]
[알렉스는 예전부터 네 말 따윈 듣지 않아. 너도 잘 알잖아?]
[...]
그 순간, 엘레나가 다시 한 번 검을 찔렀다. 불꽃 방패가 어김없이 알렉스의 가슴을 막았다. 하지만 이번엔 이전과 달랐다. 불꽃 방패 일부가 흐릿해졌다. 듀플렉시온은 정확하게 흐릿해진 부분에 닿았고, 방패를 뚫었다.
푸우욱.
"크헉!"
[알렉스!]
[...돌아가자, 이프리타.]
[강민...]
"죽어!....?"
오랜만에 죽음을 맞았다
+ + +
"..."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운 건 어느새 나타난 이프리타가 어느 정도 해결해줬다.
"..."
부족했다.
잠옷차림으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옆 옆방이 예지의 방이었다.
삑삑삑삑. 띠리링.
예지는 아직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문소리에 깬 모양인지, 그녀는 반쯤 눈을 떴다.
"오...빠?"
"..."
그녀의 머리를 한쪽으로 넘겼다. 민낯이라도 예뻤다.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나인 걸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스으윽.
이불 안으로 들어가, 모로 누운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따뜻했다. 이프리타로는 부족했던 게 조금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등에서는 나를 편하게 해주는 향기가 났다.
"코오, 코..."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그녀도 내 품 안에서 안정을 찾은 걸까?
한동안은 그러고 있었다. 모든 걸 잊었다. 퀘스트도, 죽음도, 알렉스도... 그녀의 온기와 그녀의 존재만이 온몸을 채웠다.
그런데, 내 아래는 그걸로 성이 차지 않았던 것 같다.
"예지야, 예지야?"
"...으음, 왜요?"
"그게..."
"..."
차마 말할 순 없었다. 내 분신은 스스로 의지를 표현했다. 예지도 등 뒤에 닿는 딱딱한 걸 느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괜찮아요. 오빠...윽, 아니, 그래도, 하윽."
참을 수 없어서 달려들었는데, 다행히도 그녀의 안은 적당히 젖어 있었다.
"기대했던 거야?"
"하응, 무슨 말을... 윽, 너무 하잖아요. 이건. 하읏."
"몸이 말하는 건 다른데?"
"윽, 몰라요. 하앙. 끝나면, 으응, 가만 안 둘, 하아앙."
"기대하고 있을게."
아침에 하는 것도 좋구나. 이불을 던져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도 온몸으로 호응해 왔다. 내 것을 물고 놓지 않으려는 그녀를 보며, 나는 좀 더 허리를 열심히 움직였다.
절망과 죽음을 잊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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