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17화 (117/160)
  • 117화

    일단 이름은 올리기로 했다. 그러나 부하는 아닌 걸로. 앞뒤가 안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김철곤 중령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군인으로 중령을 달았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좀 특이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거랑 상관없이 그는, 그리고 나는 특이한 사람이다. 퀘스트를 하는 것 자체가 상식과 먼일이니까.

    대충의 협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상세 일정과 행정 절차, 가족의 이동 같은 건 내일부터 천천히 하기로 했다. 그와 부대는 바빴다. 갑자기 세상에 드러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고, 나처럼 새로 부대에 들어오려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나 역시 동의했다. 부모님과 예지, 다른 사람들 근처에만 있을 수 있다면, 크게 급한 건 없었다. 내가 지킬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 두었으니 이 이상 호들갑 떨 건 없었다. 남은 건 퀘스트를 더 열심히 깨는 것뿐이다.

    "데려다줄게."

    기찬의 서프보드를 타고 사장의 오피스텔로 갔다. 오피스텔은 10층 건물…… 이다. 이 사람, 대체 얼마만큼 부자인 걸까?

    "그럼, 앞으로 종종 보자고."

    "어, 그래. 대구를 잘 지켜줘."

    그는 지금부터 다시 대구로 가야 했다. 대구와 그 주변은 그와 한소위가 담당하고 있는 지역이고, 자리를 비울 수 없다. 내일도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른다.

    "걱정 마! 너나 잘해."

    "아, 너 퀘스트 몇 번째야?"

    "나? 60번째였던가? 아마 그럴 거야. 너는?"

    역시나, 나를 제외하고는 다 퀘스트에 재도전할 수 없는 듯하다. 그러니 거기에 대고 31번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비밀. 너보다는 느리네."

    "누가 많이 하고 적게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아무튼, 다음에 보자고!"

    "응.“

    그는 손을 크게 한 번 흔들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저 서프보드의 능력은 뭘까? 단순히 하늘을 나는 것만은 아닐 텐데……. 보드가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바람에, 좀 전엔 기린부대에 관해서 물어볼 시간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능력에 대해서 모르고, 그도 나의 능력에 대해서 모른다. 그게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이 있는 방은 6층에 있었다. 나 하나, 동생 하나, 부모님 하나. 이렇게 3개를 내줬다. 그런데 안을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거실에 방이 따로 두 개나 있는 큰 곳이다.

    거실 안은 각종 가구로 잘 꾸며져 있었다. 따로 채워 준 걸까? 아니면 원래 비치되어 있었을까? 그렇게 돌아보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사람이 나왔다. 예지였다.

    "아, 오빠, 왔어요? 갔던 일은 잘 됐어요?"

    "응, 잘 됐어.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야? 너는 다른 방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표정을 굳히고 나를 흘겨봤다. 아무 일 없는 듯이 받아줘서 그냥 넘어가나 했는데, 역시나…….

    "그러고 보니, 오빠. 오늘 제게 무슨 일을 한 건진 알고 계시겠죠?"

    "응? 아, 음, 알고 있지."

    "잘못하신 것도 알고 계시죠?"

    나지막한 목소리와 서슬 퍼런 눈빛이 나를 찌르는데, 무의식적으로 변명부터 흘러나왔다.

    "그, 그게 급해서 그랬어. 좀 당황하기도 했고. 친구가 대이능부대원이라는데, 이 기회에 알아봐 두는 게 좋잖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그녀의 눈빛은 여전하다. 그 눈빛을 받고 있자니 내가 왜 그런 건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리 급하지도 않았는데……. 왜? 아……!

    "그래, 유비가 없어서 그랬어. 혹시 갔는데 이상한 단체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유비가 들키면 안 돼서……."

    물론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갑자기 만난 기찬을 어떻게 믿을 것이며, 면식이라고는 없는 대이능부대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하지만 왜 여전히 스스로도 설득력이 없게 들릴까.

    그녀가 미간을 모으고 쳐다보는 게 너무 무서운지도.

    "미안,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

    "……알면 됐어요. 오빠가 없는 사이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한바탕 쏟아내고 싶지만, 다들 주무시니 참을게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그녀의 표정은 평소보다 확실히 굳어 있다. 저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그런데, 주무신다고?

    "미안, 진짜로 미안. 그런데 다 주무신다고?"

    "네. 무슨 일을 겪으신 건지 모르겠지만, 방에 들어오고 잠시 뒤에 잠이 드셨어요. 오빠 동생도 마찬가지고요."

    그녀의 손짓을 보니, 한 방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또 다른 방에는 동생이 자는 듯했다. 피곤했을 것이다. 시속 5-600km 정도는 나오는 것 같은 서프보드 위에서 주변이 휙휙 지나가는 걸 눈으로 보고 있었으니.

    "그래서 혹시 깨어나면 당황하실 것 같아 대기 중이었어요. 이제 오빠 왔으니, 저는 가 봐도 되겠네요."

    "고마워. 내가 할 일이었는데……. 너희 부모님은?"

    "집에 계세요. 제가 차근차근 이야기했는데, 안 통하네요. 객관적으로 보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해서……, 더 이야기하진 못했어요."

    "그래……."

    그게 정상이다. 서울에선 오늘 또 오크가 나타났지만, 이번에도 거의 피해 없이 제압했다고 하니까. 주의와 경계는 해도, 집을 옮겨 피신한다는 둥의 일을 하진 않겠지.

    "이 현상이 심해지면, 저희 부모님의 생각도 바뀌시겠죠. 그전까지는……."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고마워요."

    "뭐, 네 부모님이면 내 부모님이나 마찬가진데."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오늘은 좀 심했어요. 처음으로 뵙는 자리인데 그러는 게 어딨어요?"

    "그,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너에 대한 선입견은 없으셨잖아? 안 그래?"

    그렇다. 아들이 서울에서 뭘 하고 사는지 잘 모르는 부모님은 심지어 예지의 존재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러나 나는 예지네 부모님에게 완전히 찍혀 있었다. 잘 나갈 딸의 앞길을 막는 놈팡이라고. 그래서 그녀의 부모님이 이 오피스텔에 안 오시려 하는 걸 수도 있다.

    "……바보예요? 아버님은 몰라도, 어머님이나 동생은 그게 아니라고요. 오빠가 몰라서 그렇죠……."

    울상을 지으며 하는 그 말의 내용에 수긍하면서도, 나는 입꼬리가 계속 올라갔다. '아버님', '어머님'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기분 나쁘게 웃지 마요. 지금 웃음이 나와요? 잘못했다고 말한 사람은 어디 간 거죠?"

    "……아니야. 내가 언제 웃었다고 그래. 나 지금 반성 중이야. 반성 중이라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서 허리를 깊게 숙여 사과했다. 목적이야 어쨌든 성의를 다한 자세에도 그녀는 쉽게 풀어주지 않았다.

    "흥, 됐어요. 저는 이만 갈 테니까. 아버님, 어머님 깨어나시면 말씀이나 잘 드려 주세요. 제대로 된 인사는 나중에 다시 드리겠다고. 동생 분에게도요."

    그러면서 방을 나가는데, 이거 참, 쫓아갈 수도 없고……. 게다가 좀 있으면 밤인데……. 아, 밤엔 밤에 할 일을 해야지. 그녀도 6층 이랬던가?

    사장의 제안을 수락한 건 역시 잘한 일이었어.

    + + +

    부모님과 동생이 예지와 마주한 건 잠깐이었다고 들었지만, 할 이야긴 다 하고, 파악은 다 끝났나 보다. 깨어나신 아버지는 '됐다'고 한마디만 하셨고, 어머니는 어디서 그런 참한 처자를 구해왔느냐며 극찬을 쏟아내셨다. 동생은 신비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한참 모자란다는 뜻이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가족에게서 그런 시선을 받으니……. 나도 이제 후보자인데……, 쳇.

    어쨌든, 예지는 잘 넘어갔는데, 나는 어쩌지? 예지네 부모님을 아직 뵌 적은 없지만, 이미 미운털을 잔뜩 박혀 있고. 들은 대로라면, 굉장히 날카롭고, 차가우실 것만 같은데…….

    생각을 하며 오피스텔 1층 편의점으로 향하던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민아!"

    아냐 누나다. 누나는 편의점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유비. 누나의 표정은 복잡하고, 유비의 얼굴에는 불쾌감만이 가득하다.

    "아, 누……나."

    반갑게 인사를 하려다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유비는 이제껏 누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나의 정체,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숨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누나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유비의 일도, 나의 일도 다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이 오피스텔로 왔겠지.

    누나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아냐?"

    "……먼저 갈래? 나도 금방 올라갈게."

    "……알았어."

    누나의 말에 유비는 나를 지나치면서 낮게 말했다. '울리면 죽인다, 진짜 죽인다'하고. 살기도 느껴졌다. 반문하고 싶다. 그게 진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인지.

    일단 평소처럼 대하기로 했다.

    "누나, 별 탈은 없어요? 유비가, 아니 유비 누나가 잘 지켜줬겠지만요."

    "……내 앞이라고 누나라고 할 필요 없어……."

    누나는 그 말을 하곤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다시 들어갔다. 누나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안아 주고 싶은데, 그럼 예지가 싫어할 테고…….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

    "수고했어."

    누나는 참 착하다. 예지도 그랬지만, 왜 이렇게 내 주변에는 나를 먼저 생각해주는 사람만 있는 건지…….

    "그리고 힘내. 알았지?"

    퀘스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앞날은 막막하다. 그런 와중에도 누나의 말이 내게 와 힘이 된다. 이건 평행세계에서 만난 나의 잔재가 반응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냥, 누나의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다.

    "……네. 고마워요."

    누나도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좋아. 마지막으로 할 말이 하나 있어."

    "뭔데요?"

    "나는 독신으로 살기로 했어."

    독신? 갑자기 무슨?

    "에? 왜요?"

    "유비가 그러던데? 너랑 안 맺어지면 창녀로 살 거라고. 그러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독신으로 살 거야. ……너는 부담가질 필요 없어. 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아니, 그러면 그걸 왜 제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럼 볼일 봐. 우리 잘 지켜줘야 해."

    "네?"

    누나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라졌다.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었다. 충격적인 소리에 당황하면서도, 그게 또 반가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포보스 왕국 총리대신 네밀 후작의 집무실에서 애쉬튼은 열변을 토했다.

    "어째서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소식은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거 말인가? 키르카우스 제국이 요즘 고생 좀 한다지?"

    태연하게 대꾸하는 후작의 말에 애쉬튼은 불안을 느꼈다.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10년 전 제국의 야망을 눈치채고 약소 왕국들을 돕는 데 앞장선 사람이니까. 그러나 지금의 저 반응은……. 재상이었던 지난 10년간의 경험이 그를 무디게 한 걸까.

    "그걸 아시고도 어찌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는가? 야만족이랬나? 그들이 키르카우스 제국을 괴롭히면 우리에겐 좋은 일 아닌가."

    "그 상황이 괴롭히는 수준이 아님을 후작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 괴롭히는 수준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제국은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여 있다. 황권 다툼과 갑자기 나타난 야만족들의 발호로 나라가 쪼개지다시피 한 것이다.

    "제국이 쪼개지든 박살이 나든 지도에서 사라지든 그쪽 사정이지. 우리 사정은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다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국이 저 혼자 나뉘거나 자멸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그거야말로 우리에게 이득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저 혼자 그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야만족입니다, 야만족. 편의상 야만족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저희와, 인간과는 다른 종입니다. 덩치도 훨씬 크고, 힘도 세고, 무엇보다 공격적이지요. 그들과 국경을 맞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봅니다. 할 수 있다면, 제국의 영토에서 그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

    후작은 언성을 높이는 애쉬튼을 제지하려다가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잠자코 듣기만 했다.

    "저는 왜 후작님께서 가만히 계시는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10년 전, 제국을 막기 위해 왕국을 돕자고 나섰던 분이 왜 지금의 상황은 보지 못하시는 겁니까? 이건 같은 상황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후작님…….“

    애쉬튼은 후작이 말을 알아듣길 간절히 바랐다. 생각에 잠기는 걸 보니 예전의 식견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순 없는 일이었다. 후작은 그가 오기 전까지 이 일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

    "……."

    "……좋아, 그럼 자네가 좀 나서주겠나? 이 일은 우리나라만 참여해서는 안 될 일 같은데? 워즈 왕국도, 3 왕국도 함께 해야 하지 않겠는가.“

    긴 침묵이 끝나고 후작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말이었다. 거기에 애쉬튼이 이어 말하려고 했던 제안도 덧붙여져 있었다. 역시 후작이다. 그는 기분 좋게 대답했다.

    "당연합니다. 맡겨만 주신다면, 제가 다른 나라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그동안 나는 우리 왕국부터 군대를 준비하고, 제국에 의사를 전달해 보지.”

    "역시 후작님이십니다!"

    "……자네가 아니었으면,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뻔했지. 자네는 나보다 훨씬 높은 사람 같구먼. 이른바 대륙 총리? 대륙의 모든 사람을 걱정하다니, 감탄했네.“

    대륙 총리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제 살길을 마련할 뿐입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길게 볼 뿐이죠."

    "그게 그거 아닌가.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내가 제정신일 수 있도록.“

    후작을 만난 건 참 다행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남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만나는 건, 그게 윗사람이라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역사는 바뀌었지만, 그는 이런 사람과 함께라면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후작의 부탁에서 그는 그런 희망을 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워즈 왕국부터 가겠나?"

    "아닙니다. 3왕국을 돌면서 먼저 여론을 형성하고, 워즈 왕국에 압박을 넣겠습니다. 그게 훨씬 일이 빠를 것입니다."

    "역시. 내 자네만 믿겠네."

    + + +

    [축하합니다. 서른한 번째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셨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대륙 총리 애쉬튼’의 능력 중 하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걸 선택하시겠습니까?]

    ============================ 작품 후기 ============================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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