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16화 (116/160)
  • 116화

    기찬이는 손가락을 나를 가리킨 채 말을 잊지 못했다.

    "진, 진짜 강민이네? 너, 너, 너!"

    "죽은 사람 쳐다보듯이 보지 마."

    그러다가 갑자기 서프보드에서 내려 내게 달려왔다.

    "우하하! 드디어 내 친구 중에도 떴다!"

    "야, 갑자기 뭐……. 떨어져! 떨어지라고!"

    8년, 9년? 아무튼, 그 정도만인데도 그는 거리낌이 없다. 안겨오는 걸 내칠 수도 없고…….

    "저게 대이능부대원인가?"

    "저 서프보드는 뭐지? 공중에 떠 있는데?"

    "이능이겠지. TV에서는 불 피우던데, 저 사람은 다른 건가?"

    "그런데 왜 껴안고 있데?"

    찰칵, 찰칵.

    폰의 카메라가 마구 찍히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건 예지의 얼굴이다. 이런! 이런 게 인터넷에 돌아다니게 되면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몰라!

    진심으로 기찬이를 밀어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리를 옮겨야 되는 거 아냐?"

    "아? 아, 그래, 그게 좋겠지. 잠깐 그전에……."

    그는 주위를 살피다가 오크와 오거의 시신에 눈이 고정되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려고 했다. 그때,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소녀가 튀어나왔다. 베레모에 군복을 입은 그녀에게선 기찬이와 마찬가지로 특이한 느낌이 났다.

    "중위님!"

    "아, 마침 잘 왔어. 한소위. 여기 정리 좀 부탁할게."

    "네?"

    한소위는 주위를 한 번 쭉 둘러보고는 다시 반문했다.

    "네?"

    "그럼 부탁해. 나는 새로운 후보자를 만나서. 지금 바로 본부로 가야 할 것 같아."

    "어, 어?"

    "민아, 그럼 바로 가자, 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것 같은 키 작은 소녀를 두고, 기찬은 어느새 보드 위에 올라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밖에 가족이 있어. 같이 가야 하는데?"

    "그래? 그럼 그렇게 하면 되지. 일단 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얘기하는 그의 말에 일단 보드 위에 올라섰다. 보드 위는 신기했다. 보이는 건 얇고 좁은 판인데, 마치 거대한 판 위에 올라선 듯한 느낌이었다. 안정적이었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신기한 건 또 있었다. 사람들 머리 위를 날아 밖으로 나가는데도,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중위님!"

    우리 뒤를 한소위라는 분의 목소리가 따랐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역 밖에는 어디서 몰려온 건지, 군부대가 잔뜩 와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야."

    "어, 그러게, 알 것 같아. 아버지랑 어머니랑, 지희였나? 많이 컸네?"

    기찬은 금세 우리 가족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때 제법 들락날락한 터라 기억하는 모양이다. 보드가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동시에 빛을 발하면서 순식간에 변형되었다. 커졌다. 사람 너덧은 탈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거기에 난간 같은 것도 생겼다. 보드의 기능으로 보아 필요는 없겠지만, 일반인인 내 가족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신기하네."

    "뭐, 별거 아냐. 같이 타고 가면 되겠지?"

    "어머니나 동생이 크게 반발하지 않는다면……. 본부는 어디야?"

    "당연히 서울이지!"

    ……기절이나 안 하면 다행이려나.

    + + +

    대이능부대, 속칭 '기린'의 본부는 국방부에 있었다. 다행히 사장님이 내어준다는 오피스텔도 용산 부근이라, 본부에 가기 전에 가족을 내려줄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기찬과 함께 국방부로 갔다.

    그 말인즉, 비행기 수준으로 빠르게 나는 서프보드 위에서 기절을 비롯해 온갖 두려움에 직면해야했던 가족을 예지에게 떠넘기다시피 하고 왔다는 이야기다.

    ("오, 오빠…….")

    떠나기 전에 그녀가 울 듯한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외면했다. 대이능부대가 나왔을 때부터 관심이 있었고, 기찬은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있으면서 가족과 예지 포함 다른 사람들 사이를 중재할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유비가 없는 이 때에 혼자 먼저 가서 상태를 살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혹시 모르니까.

    "자, 여기가 우리 부대의 본부야. 온 걸 환영해."

    국방부에 내려 이것저것 절차를 거친 뒤에 기찬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층수 표시도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눈앞에는 기대와 달리 평범한 복도와 유리문이 나타났다.

    "평범하지? 나도 처음엔 비밀결사 같은 걸 기대했는데, 생각해보니까 굳이 그런 걸 만들 필요가 없겠더라고. 그렇잖아? 어차피 과학으로 측정되는 힘도 아니고,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연습은 다 꿈에서 하고……. 그나저나 이제 부대가 밝혀졌으니 위로 이사해주면 안 되나? ……자, 여기가 우리 부대장실이야."

    평범한 것도 그렇지만, 너무 사람이 없었다. 기찬이 가리키는 방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거야?"

    "아, 어제 사건 발생하면서 뿔뿔이 흩어졌으니까. 지금은 네 명밖에 없어. 그것도 아까 들으니 서울에서도 그놈들이 나타난 모양이라……. 대장님을 제외하곤 아마 거기에 가 있겠지. 이제 들어가도 되겠지?"

    "아, 응."

    기찬의 서핑보드를 타고 오면서, 대이능부대에 합류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물론 부대장과 이야기를 하고 나서 생각이 바뀔진 모르겠다만.

    큰 책상, 노트북, 접대용 소파와 테이블……. 방안은 일반 집무실과 다를 게 없었다. 책상에는 어제 TV에서 본 대이능부대의 부대장, 김철곤 중령이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당신이 정 중위가 말하던 새로운 후보자입니까?"

    후보자.

    오면서 기찬에게도 들었던 말. 부대원 중 하나가 퀘스트 속 고문서에서 발견한 거라고 했다. 뭐를 위한 후보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일을 경험하는 이들을 그 문서에서는 '후보자'라고 지칭하고 있었다나.

    부대에 들어오는 건 이런 부분 때문이기도 하다.

    유비와 알게 된 이후로, 정확하게는 죽음을 겪고 난 이후로, 나 역시 이 퀘스트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움직였다. 대구의 사고 현장에도 몇 번이나 갔고, 텔레포트하는 이를 보았던 영화관 옆 골목에는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퀘스트 내에서도 도서관에 다니는 건 필수 코스였고, 경우에 따라 마법사나 신관, 역사학자들을 불러놓고 이런 일들에 관해 묻기도 했다.

    그러나 알아낸 게 하나도 없었다. 현실에서 능력자의 흔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퀘스트 내에서도 나와 같은 이들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간혹 비슷한 상황이 있을 걸로 짐작되는 퀘스트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퀘스트 흐름상 따로 뭘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처음 만난 대이능부대원은 바로 '후보자'니 어쩌니 하고 있으니. 기찬이 아니었더라도 끌렸을 거다. 역시 조사는 물량인가?

    "들은 대로라면, 아마도 맞을 것 같습니다. 그쪽과 같은 일을 겪고 있는 모양이니까요."

    부대장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부대장에게서, 기찬이나 역에서 만났던 소녀와 같은 느낌이 느껴진다. 퀘스트 진행자, 이 사람들의 용어를 따르면 ‘후보자’의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기찬이나 부대장도 나처럼 내 존재에서 특별한 느낌을 받는 모양이다. 조금 전 나에게 곧바로 향했던 기찬의 모습이나, 지금 능력의 확인도 없이 내 말만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부대장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는 건 둘 다 자신의 기술이 마스터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유비는 그녀의 기술 ‘얼음’이 마스터에 올랐을 때부터 그럴 수 있었다. 나 역시 이 감각은 라이트닝 소드가 마스터에 오르고 나서부터 느꼈다. 그때부터 유비의 존재감이 그전과 달리 강하게 다가왔었다.

    "그렇다면 환영입니다. 일단 앉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정 중위, 차 좀 내와 주겠나?"

    "알겠습니다!"

    좀 전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어디 갔는지, 기찬은 어느새 군인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으음, 다 좋은데, 저걸 보니 이 부대에 합류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이…….

    "정 중위의 소꿉친구라고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상황이라 좀 놀라셨겠습니다."

    "조금 정신이 없습니다. 기찬이가 저와 같은 일을 겪고 있었다니, 전혀 몰랐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든 연락을 시도했을 텐데요."

    "한 번 끊어진 연락을 하지 못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인 중에서 한두 명은 꼭 있는데, 신경 쓰지 못한 건 저희의 불찰이라고 봐야 합니다. 당신, 아,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강민입니다."

    "강민, 좋은 이름입니다. 어쨌든, 강민씨께서는 그런 정보가 없었겠지만, 저희는 가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기찬이의 말에 의하면, 대이능부대원은 대부분 지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A, B, C가 있으면, A와 C는 친구가 아니지만, A와 B, B와 C는 각각 친구관계인 식이다. 그 사이에서 기찬이만 유독 지인 중에 부대원이 없었는데, 나를 만남으로 그게 아니게 되었다. 그가 나를 처음 봤을 때 유독 반가워한 이유였다.

    "정 중위에게 우리와 함께하실 의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길게 뺄 것 없이 묻겠습니다. 부대에 들어오시겠습니까?"

    "……."

    살짝 긴장했다. 그가 어제 TV에서 선보인 능력을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함께하는 게 나을 테니까. 내 정신을 조정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편하겠지. 하지만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날을 세우고 있거나.

    그에게는 그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 기찬이 들어와 커피 두 잔을 내려놓았다. '커피로 괜찮지?'하는 물음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 중위, 친구 분께는 우리 부대에 들어올 때 주어지는 특권에 대해 다 설명해 드렸나?"

    "네, 복지혜택과 급여, 업무량 등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해 주었습니다."

    "좋아. 그럼 밖에서 잠시 기다려 주겠나?"

    "네, 알겠습니다."

    기찬은 이제 아예 밖으로 나갔다. 물론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만.

    "설명이 더 필요하신 부분이 있으십니까?"

    있다.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없었다. 기찬은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설명해 주었으니까. 그러나 둘의 대화를 듣고 나니까, 질문이 생긴다.

    "굳이 부대에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 말씀은……?"

    "정보와 안전 가옥. 그게 된다면 저도 부대나 정부의 움직임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직접 부대원이 되는 건 조금 부담스럽군요."

    그래, 앞에 앉아 있는 저 중령에게 꼬박꼬박 대답하기가 부담스럽다. 대부분 퀘스트에서 내가 위에 있었기 때문인가? 이래서 군대는 어떻게 가려는지……. 세상이 바뀌어서 군대에 징병될 지도 의문이지만.

    "말투를 제외하면 보시는 것과 같이 딱딱한 분위기는 아닙니다. 정 중위가 유독 저를 잘 따라서 이러는 것뿐입니다."

    눈치가 빠르다. 혹시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건 아닌가? ……주변 기운은 변한 게 없으니 그럴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게 부담스러우시다면, 협력하는 느낌으로 함께 하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약할 방법도 없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오셨다면, 그리고 가족의 안전을 신경 쓰신다면 당신도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보이는 이 일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 그 말대로다. 잘 알고 있다. 어제는 오크, 오늘은 오거. 내일은 뭐가 나올지 알 수 없다. 드래곤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다. 뭐, 드래곤까진 나와도 괜찮다. 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까. 나 말고도, 여기 부대원이라면 대충 그 정도는 할 거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걸로 끝날 것인가?

    그의 눈빛을 보니, 우리는 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럼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죠."

    "좋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내민 손을 잡으며 가볍게 악수를 했다.

    "그런데 군에 어차피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니십니까? 정 중위 친구라면 아직 미필이실 테고……. 그럼 이름이라도 올려놓는 건 어떠십니까? 군 면제가 자동으로 될 텐데……."

    “네? 아…….”

    ============================ 작품 후기 ============================

    후원해 주신 판타지메니아님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일은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과 추천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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