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15화 (115/160)

115화

회의가 끝난 건 늦은 밤이다. 그럼에도 애쉬튼은 바로 잠들지 않고 서재로 향했다. 왕국 제일의 상단주이자, 총리대신의 보좌로서 쉼 없이 일해도 할 일이 쌓이기 때문이다. 지난 삶도 만만치는 않았지만, 이번 삶은 강도가 그 배에 달했다. 평소라면 그도 약간의 짜증과 함께 의무적으로 서재로 들어섰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의 발걸음이 가볍다.

'좋아.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어! 이제 굳히기만 하면 된다.'

책상을 가득 채운 서류도 반갑다. 그는 빨리 끝내고 이 기쁜 소식을 아내에게 전하기로 마음먹고는, 빠르게 일을 처리해갔다.

그렇게 한 시간.

8년 동안 애쓴 일의 결과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해서일까. 긴장이 풀려 그는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를 틈타 어둠 속의 암살자가 움직였다. 조금 전, 한 10분 전부터 지붕 위에 대기하고 있던 놈이었다. 조금 더 늦었더라면 내가 먼저 움직이려고 했는데, 마침 때맞춰 애쉬튼이 잠들어 주었다.

암살자는 창문을 조심스레 따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귀로는 움직임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라이트닝 소드 마스터에 오르면서 확장된 감각, 영혼을 다루는 감각이 그 존재를 알려 주지 않았다면, 솔직히 움직이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꽤 실력이 있는 자다. 애쉬튼의 기억 속에 암살 시도는 없었는데, 처음으로 맞은 암살자가 이런 수준이라니. 그냥 애쉬튼만 있었다면 꼼짝없이 당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가 있으니 그럴 일은 없다.

서재 안으로 들어온 암살자가 빠르게 내 뒤를 점한다. 목이 베려는 단검이 번개처럼 올라오는 순간, 몸을 돌려 그 팔을 잡는다. 암살자의 눈이 잠깐, 아주 잠깐 흔들리다가 원상태로 돌아온다. 그는 손에서 단검을 돌리며 내 팔을 찍으려 하는 한편, 발로 내 머리를 차려 했다. 그러나 내가 빨랐다. 내 왼손이 그 복부를 찌른다. 그의 눈이 다시 흔들리며 몸이 기역 자로 꺾였다.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 머리에 발차기를 제대로 꽂아 버린다.

회리리릭.

암살자의 몸이 공중에서 몇 회전하다가 철퍼덕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즉사다. 꽤 강한 암살자이긴 했지만, 암살자는 암살자. 라이트닝 소드에 딸린 간단한 체술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이후에는 좀 더 강한 놈들이 올 거다. 그러나 그에 따라 애쉬튼의 방비도 올라가겠지.

지금까지는 한 일에 비해서 주목받지 못한 감이 컸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암살을 주한 것으로 보이는 저쪽, 후작도 한 번 쓸어줄까 생각했다. 그러면 애쉬튼의 미래가 좀 더 편안하고 안전할 테니까.

그런데 그러면 하루, 즉 8시간이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가 이미 이 세계에 들어온 지 대충 6시간이 지난 시점이었으니까, 후작 저택으로 가서 깽판을 놓다 보면 넘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에겐 은밀히 잠입할 재주도 없고, 나와 같은 마스터가 있을지도 모르고, 돌아와서 이 집에 숨어든 암살자도 잡아야 했다. 이 암살자에게 후작 저택 붕괴 소식은 들어가지 않았을 테니까, 암살 위험을 제거하려면 결국 이 암살자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누가 암살을 사주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후작일 가능성이 높지만, 아니라면? ……아니어도 겸사겸사 장애물 제거 차원이니 상관은 없지만, 내 시간이 날아가는 건 똑같았다.

하루도 아까웠다. 세계에는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 진행은 늦으니까. 유비만해도 벌써 55번째 퀘스트를 진행 중인데, 나는 고작해야 31번째……. 무조건 성공해야 넘어갈 수 있는 건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 암살자의 등장이 조금 늦어, 이 모든 게 내일로 넘어갔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거다. 내 맘대로 깽판을 놓았을 확률도 높다. 하지만 모든 건 오늘 안에 끝났다. 넉넉하게.

나는 퀘스트를 나와, 잠에서 깨어났다.

+ + +

동대구역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경찰과 군인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소총으로 무장한 그들 덕에 동대구역은 평소와 다르게 조용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문을 닫고 집안에만 있거나, 필수품을 사재기하는 등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전 일상이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었다.

"오빠, 이거 괜찮은 거야?"

여동생, 지희의 말은 가족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아니,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대놓고 소총을 든 채 순찰 중이다. 그 광경을 보고 괜찮을 리가 없겠지. 하지만.

"일단은. 너무 무서워하지 마. 저기 봐봐. 저 사람들도 지금 떨고 있지?"

내가 가리키는 곳에는 폰을 꺼내려다가 땅에 떨군 경찰 한 명이 있었다. 그 소리에 주변 경찰 몇이 그 경찰을 가볍게 책망했다. '깜짝 놀랐잖아!', '긴장했냐? 나도', '쏴 버릴 뻔했네……' 등이다. 지희가 그 소리를 듣진 못했겠지만, 상황은 대충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경찰이나 군인들도 지금 긴장 상태야. 우리를 지켜주려고 말이지. 그러니까 총이 무섭다고 생각하기 전에 그 사실을 먼저 봐줘. 알았지?"

"아, 알았어."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하는 동생이 조금 귀여웠다. 집에 있을 때는 그렇게 싸웠는데, 지금은 어릴 때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다.

"민아, 그 뭐냐, 너네 사장님 댁에 꼭 가야 하느냐? 그냥 삼촌네 가도 되잖어?"

"제 생각에는 사장님 댁에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삼촌 가족도 오늘내일 안에 직접 찾아뵙고 부를 거고요."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빈손으로 찾아가도 되냔 말이지."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그 순간 내 감각에 무언가 잡혔다. 고개를 뒤로 돌렸다. 보이는 건 없는데,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민아?"

"아버지, 어머니, 지희야. 저쪽, 저쪽으로 가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뭔데 그러냐."

"오빠, 무슨 일인데?"

감각은 좀 더 선명해졌다. 지금 있는 곳과 조금 떨어져 있긴 했지만, 안심되지 않았다. 가족들을 재촉했다.

"빨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우리를 제외하고 이상 현상을 감지한 이는 없었다. 당연하다. 이건 영혼을 다룰 수 있어야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니까. 밖에는 아무런 징조가 없었다. 그대로 이 자리를 뜰까도 생각해 봤다. 안에는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과 군인이 있으니까. 웬만한 일은 별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좀 전 긴장이 역력한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버지. 여기서 잠깐 계세요. 사람들이 당황해서 도망치더라도 멀리 가시면 안 돼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부르세요. 제가 바로 올 테니까요. 아시겠죠?"

"그래. 아, 알았다."

아직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는 내 기세에 눌려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쓰고 온 모자를 좀 더 푹 눌러썼다. 이걸로 완벽히 가려지는 건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건물 안은 좀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건 달랐다. 두 사람의 몸 위에 오크와 오거의 형체가 겹쳐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내 감각이 받아들인 정보가 머릿속에서 그렇게 형성될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 두 사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오크와 오거가 나타났다. 집중하고 있던 나조차도 그 변화의 순간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오크와 오거는 그 공간에 자리 잡았다.

"응? 이게 뭐야!"

"꺄아악!"

"도망쳐!"

오크와 오거는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슬슬 눈을 뜨는 것 같지만, 좀 더 시간이 흘러야 되는 모양이다. 이래서 여의도와 부산에서 희생자가 없었군.

그런데, 경찰과 군인은 뭘 하고 있는 거지?

"……."

"저, 저게 뭐야."

"……뛰어, 빨리 사람들을 지키라고!"

"뭐야, 어떻게 갑자기……."

군인 쪽은 분대장으로 보이는 사람부터 멍하니 서 있기만 했고, 경찰은 서로 미루고 있는 듯 보였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제대로 대응했을지 모르겠다. 지금의 반응은 일단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인 것으로 보이니까. 몬스터의 등장 자체가 현실적이지 않으니, 손발이 제대로 움직일 리 없다.

문제는 그 짧은 시간이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간이라는 거다.

"취이익!"

"크와왕!"

오크와 오거의 괴성에 몇 사람은 도망가다가 쓰러지기도 했다. 그만큼 그들이 뿜어내는 존재감은 무시무시했다. 특히나 오거의 표적이 된 사람은 쓰러지지도 못하고 굳어 버렸다.

물론 나에게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지만!

품속에서 과도를 두 개 꺼내 양손에 들었다. 모양새는 안 나지만, 방법이 없었다. 집에 마땅한 쇠붙이가 없었으니까. 달려가면서 왼쪽 과도에 의지를 담아 오크에게 던졌다. 검강이나 검기가 형성되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저 상태라면 철도 두부처럼 잘라 버릴 수 있다.

오른쪽 과도엔 좀 더 의지를 담는다. 그리고 사람을 막 내리치려는 오거의 앞을 막고선, 그 앞에서 의지를 폭발시킨다. 순간 검이 쭈우욱 늘어나며 오거의 목을 뚫어 버렸다. 오거는 자신이 무엇에 당한 건지도 모를 것이다. 검은색, 내 영혼이 만들어낸 검은색 검기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쿵, 쿵.

과도에 목을 뚫린 오크와 오거는 그대로 쓰러졌다.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치채고 다른 소리를 냈지만,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혼란이 그리 쉽게 진정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책임은 없다. 위험은 사라졌으니 남은 일은 알아서 할 것이다. 다른 몬스터가 나타날 조짐은 없어 보였고, 밖의 가족들은 괜찮을까 싶어 나가려는데, 큰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 대이능부대 기린이 왔습니다! 제가 다 구해드리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매우 컸다. 패닉에 빠져 있던 사람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그 소리의 진원지를 봤다. 거기에는 디지털 군복을 입고, 은색 서핑보드를 탄 남자가 있었다.

"대이능부대?"

"어제 TV의 그건가?"

"와아, 이제 살았다!"

"도와줘요!"

"저기 저……, 어?"

"뭐야, 죽었잖아?"

사람들은 그제야 오크와 오거를 쓰러져 있음을 발견하고, 웅성 웅성거렸다. 내가 한 것임이 드러나진 않았다. 나는 이미 그 주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들어온 대이능부대원에겐 바로 들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를 본 순간,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으니까.

그는 내 쪽으로 곧장 다가왔다. 나도 피하지 않았다. 대이능부대에도 관심이 있었고, 무엇보다 아는 얼굴이었다.

"당신도 후보자입니까?"

모자를 벗고 고개를 들었다. 상대방의 얼굴이 놀라는 게 보인다.

"강민?"

"역시 기찬이었네."

그는 러셀을 시작으로 퀘스트에 몇 번 등장했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연락해야지’하고는 까먹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이야. 세상이 좁은 건가, 아님 원래 이런 건가?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퀘스트는 이걸로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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