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07화 (107/160)
  • 107화

    예지가 돌아가고, 일단 가게로 갔다. 사장에게 한바탕 혼이 났다. 이번엔 진짜로 혼이 났다. ‘형으로서 충고하는 건데…….’로 시작하는 긴 설교를 들어야 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이번엔 미영 누님도 도와주지 않았다. 하긴, 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어야지 도와주든지 하지, 일주일씩이나 무단결근한 사람에게 무슨 도움을 주겠는가. 사장이 돈 많은 갑부라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크게 욕먹고 알바자리도 잃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만나러 오지 않았겠지. 나 역시 사장을 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온 거다.

    그 후, 언제나처럼 혼자서 가게를 지켰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떠나 힘들 줄 알았는데, 그냥저냥 괜찮았다. 일주일을 방 안에서 술만 먹다 보니, ‘죽음’의 기억이 조금은 희미해진 모양이었다. 물론 한 번씩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띠링띠링.

    그렇게 혼자만 있을 것 같던 카페에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아냐 누나와 유비였다. 유비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친구를 아프게 해서 인가? 누나가 걱정을 많이 한 것 같긴 했다. 누나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였다.

    “...”

    “...민아! 이제 괜찮은 거야?”

    누나로부터 전해져오는 따뜻함에 내 속에 있던 기억들이, 그 기억과 섞인 부분들이 반응했다.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전과 같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건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까지.

    “네, 괜찮아요.”

    “진짜?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네, 진짜 괜찮아요.”

    미소를 띠며 반갑게 누나를 맞았다. 누나는 고마운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해도 된다. 그러나 그 이상의 감정은 안으로 눌렀다. 이건 내 감정이 아니었다. 마음속에서는 그런 구분이 안 됐다. 그냥 죄다 내 감정이었고, 그 감정의 시작과 끝을 구분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렇지만 머리는 구분할 수 있었다. 차가운 이성으로 감정을 누르고, 행동을 통제했다. 예지가 말해 준 내 이전의 생활에 비추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의 반응을 계산하고, 그대로 연기했다.

    “거 봐, 예지가 있으니까 직빵이잖아. 왜 헤어지려고 그래? 이제 둘이 화해했지?”

    누나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감정들, 덧씌워진 감정들이 알아서 반응했다. 누나는 지금 나를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포기하고 있었다. 누나의 눈동자에서 그걸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본래 이 세계의 나는 그런 걸 알 수 없을뿐더러, 안다고 해도 반응하지 않을 녀석이었다. 게다가 누나도, 알아차리는 걸 좋아하진 않겠지.

    “아직이요.”

    “와, 그래도 많이 발전했다. ‘아직’이잖아? 전에는 아무 말도 없더니... 빨리 화해 해. 그러다 누가 채간다?”

    “...그럼 뺏어올 거예요.”

    “...못 뺏으면?”

    “...그 남자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죠, 뭐.”

    내 말은 아마도 누나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지 않았을까. 한 마디 할 때마다 누나의 눈에 맺힌 물방울이 커져갔다. 그게 아니라도 알 수는 있었다. 누나 옆에서 유비가 나에게 살기를 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와... 나는 어디 그런 남자 없을까?”

    “누나라면 곧 나타날 거예요. 걱정하지 마요.”

    “...아무튼, 그럼 잘 좀 해. 누나 걱정시키지 말고. 알았지?”

    “네! 걱정해줘서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누나는 시계를 한 번 쳐다보더니, 갑자기 바쁜 척을 했다. 그리고 나오는 누나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 맞아. 그럼, 민아 다음에 올게.”

    “벌써 가시게요?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시지...”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약속 있는 걸 까먹었어.”

    “...할 수 없죠. 그럼 다음에 봬요!”

    “응, 예지에게 안부 전해 줘.”

    “네, 조심히 가세요.”

    누나의 눈물은 떨어질락 말락 하다가 결국 떨어지지 않았고, 누나는 일단 눈물을 쏟지 않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유비는 뒤따라 나가면서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녀를 향해 최대한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쳇.”

    누나, 미안해요. 제가 다 나쁜 놈입니다.

    + + +

    유비는 아냐를 보았다. 아냐는 밖에 나오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유리창 너머 강민을 째려봤다. 아니, 그를 째려보는 게 아니라, 모든 걸 째려봤다. 스스로 화를 못 이겨서, 그렇게 모든 것을 째려봤다.

    유비는 아냐의 어깨를 붙잡고, 천천히 이동했다. 어느 정도, 아냐의 울음소리가 강민에게 들리지 않을 지점에서 유비는 입을 열었다.

    “...이제 됐어.”

    “흐아아아아앙.”

    아냐는 그녀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유비는 서글퍼졌다. 그리고 미안했다. 이게 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괜한 바람을 넣어서 일이 이렇게 된 거다.

    한참 동안 수분이란 수분은 전부 눈으로 쏟아낼 기세이던 아냐의 울음이 멈췄다. 유비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면서 물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

    아냐의 목소리는 갈라졌고, 심하게 잠겨서 본디 그녀의 목소리가 아닌 것만 같았다. 유비는 그 음성에 또 한 번 울컥했고, 자책했다.

    “미안해.”

    “왜?”

    “네가 아니었나 봐.”

    “뭐가?”

    “운명의 우선순위. 다 내 탓이야. 미안해.”

    유비가 본 세계에서, 아냐는 항상 두 가지 상태로만 존재했다. 창녀나 요부가 그중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순종적인 아내였다. 그리고 그 상태를 결정하는 건, 강민의 존재였다. 강민을 만난 아냐는 항상 그의 아내로 있었다. 심지어 창녀나 요부였다가 강민을 만나도,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삶에도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아냐와 강민이 만났다면 이미 게임이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아냐가 주저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혹시 창녀의 길로 빠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게 그녀가 술 취한 강민 앞에 아냐를 데려다 놓은 이유였다. 그녀에게 술도 먹이고, 또 바람도 넣은 다음에.

    ‘남자는 몸으로 쟁취하면 되는 거야.’

    “아니야, 괜찮아.”

    아냐는 고개를 들었다. 유비의 화난 눈이 보였다. 성실한 자신의 친구는 분명 스스로 화를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유비까지 슬프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유비의 말은 잘못되었다. 부추김을 당한 건 맞지만, 그러든, 그러지 않든,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결국 아무 일도 없었는데 뭘.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같은 일을 겪었을 거야. 민은 예지를 좋아하니까... 나에게 준 신호는, 그냥 한 순간 변덕 같은 거였겠지. 아니면, 내 착각이었거나...”

    “그래도…….”

    “그 이야긴 그만…….”

    “…….”

    유비는 아냐의 강한 제지에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냐의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아예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아냐...’

    + + +

    저녁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혼자 가게를 보고 있었다. 뭔가 반가운 느낌이었다. 예전, 퀘스트를 시작하기 전 그때 같았다. 그냥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알바생. 손님이 없어서 흐리멍덩하게 있던 알바생 말이다.

    물론 그러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분심을 써서 한쪽에선 계속 어떻게 하면 퀘스트를 깰 수 있을까 생각 중이었다. 주인격만 편히 쉬고 있을 뿐이다.

    그런 주인격의 눈에 가게 밖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보였다. 예지였다. 양손에 종이가방을 잔뜩 들고 있는 걸 보면, 쇼핑이라도 하고 온 모양이다. 재빨리 뛰어나가 가방을 낚아챘다.

    “뭐, 뭐예욧! 깜짝 놀랐잖아요.”

    “헤헤, 안녕.”

    “기분 나쁘게 웃지 마요.”

    “미안.”

    “시무룩하지도 말고요.”

    쳇, 뭘 할 수가 없잖아, 그럼.

    “그런데 뭐예요. 어서 가서 가게나 봐요.”

    “나 있잖아, 아직 기회가 있어?”

    그 말에 예지가 움찔했다.

    “언니는요?”

    “그건, 그 때 잠깐... 아니, 이것도 이상한데... 아무튼,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어. 나는 네가 좋아.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내 말에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감돌았다.

    “그런다고 내가 받아줄 것 같아요?”

    “몰라. 하지만 연인이 아니라도 친구는 괜찮겠지? 이제 네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

    보통 ‘사랑합니다.’ 대신에 사용되는 말이지만, 나는 정말로 이제 예지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내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니까.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녀는 몹시 당황했고, 얼굴이 빨개졌다.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다.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표정. 수없이 본 표정이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얼굴. 그래, 이 얼굴이다. 내가 이 얼굴을 보면서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거 같다. 그건 파이레스의 몸에 들어가기 전, 그녀가 나에게 고백을 했을 때.

    이 표정을 놓칠 수는 없다. 이것만큼은 나의 마음이 분명하다. 평행 세계를 다니면서 100명의 삶을 다 경험한다 하더라도, 이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떤 관계든 좋아. 나와 이야기해줘. 내가 누군지 매일 알려줘.”

    “네?”

    “그게,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야. 그걸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수 있어.”

    “…….”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뜬금없을 거다. 도대체 이어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그녀다운, 망상 소녀다운 면모를 보였다.

    “이거 설마, 프러포즈예요?”

    “풋, 비슷할지도…….”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으로 나왔다. 그러나 작은 소리라 그녀는 못 들었나 보다.

    “뭐라고요?”

    “아니, 그냥 친구라도 되어 달라고.”

    그렇게 넘기려는데, 이번엔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괜찮을지도…….”)

    “응? 뭐라고?”

    하지만 그녀도 나처럼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에 명을 내려줬다.

    “일단, 이 짐부터 옮겨 주시면 생각해 볼게요.”

    “알겠습니다. 마님.”

    가게는 열어둔 채, 난 예지를 따라갔다. 가게야 뭐, 방범 시스템이 알아서 하겠지.

    이제 퀘스트만 남았다.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투척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102편 코멘트만 39개ㄷㄷㄷ 쓸 때는 이렇게 까지 논란이 될 줄 몰랐는데, 쓰고 보니 이해가 가긴 합니다. 저는 강간씬을 정말 리얼하게 적는 것 같습니다. 강간따윈 해본적도 없는데.... 그리고 도망갔다는 게 많이들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는 보류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큰 차이는 없지만, 주인공 입장에서는 큰 차이입니다. 자신이 자신이 아닌 상황에서야 막 말하고 다닐 수는 없잖습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다들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없으시군요...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공감하는 분들이 이렇게나 적다니.... 아니, 그보다 아냐에 대한 애정이 넘치시는 건가.... 아니, 그보다는 제가 글을 엉망으로 쓴 탓이겠죠.

    아무튼 그 논란을 보고 나니, 후다닥 넘기는 게, 그것도 한 번에 넘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열심히 썼습니다. 회현 에피소드 때부터 계속 생각하던 거라 빨리 적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네요.

    결과는 보시다시피 주인공은 그대로 나쁜 놈이고, 아냐는 정말 불쌍해지고, 예지는.. 음, 아무튼 셋다 별로군요..... 왜 이런 에피소드를 썼을까, 난....ㅠㅠ 여러 노림수가 있기는 했지만,다 적고 나니 아냐만 너무 불쌍하고... 주인공 커플도 별로 공감 못 받을 거 같고.... 주인공은 가루가 되도록 까이겠고.... 하하하하.

    모르겠습니다. 이왕 적은 거 일단 가보죠.

    그리고 이 진행과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것과는 별개로, 이해가 안된다거나, 이런 장면이 더 추가되야 진행이 매끄럽게 된다거나 결과가 자연스럽다거나 하는 의견 있으면 마음껏 주세요.

    급하게 쓰느라 오타도 많고, 빼먹은 장면도 좀 있고.... 일단 수정을 하긴 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취향(한 사람이라도 맞는 사람이 있을까 의문이지만....어쨌든)은 만족시키지 못할 테니까, 글이 앞뒤가 맞고, 이해는 잘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족한 작가의 눈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이니, 보완할 점이 있다면 가르쳐 주세요. 여러분의 도움은 작가를 더 키울 겁니다. 이번 소설을 이렇게 가도, 다음엔 여러분의 의견이 제 피와 살이 될 테니까요.

    그래서 늘 댓글, 댓글 하는 겁니다ㅎㅎㅎ(그리고 뜨끔하는 댓글들 정말 감사합니다! 제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간 거 같은 댓글들 정말 환영합니다!)댓글과 추천에 감사를 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50412 완전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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