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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106화 (106/160)
  • 106화

    네 번째로 그 세계에 들어갔을 땐, 아예 처음부터 도망갔다. 악마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죽으면, 정말 미쳐 버릴 수도 있었다. 죽음 하나하나는 갈수록 익숙해졌다. 하지만 전 죽음이 낫기도 전에 다시 죽는 건 진짜 참을 수가 없었다. 왜 퀘스트 사이에 3일의 쉼이 필요한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럴까. 내 능력이 그렇게나 대단한가? 그래서 이런 페널티가 필요한 건가?

    하지만 도망치는 것도 실패였다. 5시간쯤 말을 타고 황궁 밖을 달려 마을을 두 개나 지나쳤는데, 내 앞에는 어느새 악마가 나타났다. 2m 50cm의 그 악마 대장이 아니었다. 그보다 몸은 작지만, 날개는 훨씬 큰 악마였다. 검강, 나름 연습한 검강을 일으켜 덤벼들었지만, 악마의 마나 역장에 검강이 풀리고 검기만 희미하게 남아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내 공격은 피해를 주지 못했고, 적이 쏘아내는 검은 레이저 같은 건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타들어 갔다. 결국, 나는 또 죽고 말았다.

    + + +

    "……."

    [강민!]

    "……."

    [강민!]

    "……."

    [강민! 일어나! 강민!]

    "……헉."

    나는 살아 있는 건가? 품에서 느껴지는 이 따뜻함이 진짜인가? 내 손을 내가 움직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귀에 들리는 숨소리가, 내 숨소리가 맞는가? 온몸이 아플 정도로 뜨거운 게, 환상은 아니겠지?

    [괜찮다. 강민. 괜찮다, 괜찮아.]

    "……."

    [그래, 괜찮다. 너는 여기에 있고, 나도 여기에 있다.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다. 무서우면 울어라. 소리쳐도 된다.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 걸 다 해라. 나는 너의 친구다.]

    추웠다. 실제로 추운 게 아니건만, 실제로 추운 듯 몸을 덜덜 떨었다.

    "……추워."

    [추운가? 그럼 내가 불을 피워주지.]

    그녀의 몸이 좀 전보다 따뜻해졌다. 전해오는 그녀의 마음은 아까부터 따뜻했다. 그런데도 부족했다.

    "……추워."

    [하지만 이 이상 올리면 몸이 상한다.]

    "……알아, 견뎌 볼게."

    춥다. 이프리타도 하루 종일 소환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녀도 없으면 어떻게 버티지?

    + + +

    술을 마셨다. 이프리타가 돌아가기도 전에, 추워서 견딜 수 없었다. 술을 마시면 속이 따뜻해지니까, 속에서 불이 나니까. 그래서 괜찮을 거로 생각했다. 그 생각대로였다. 속에서 불이 나며, 추위를 잊게 해줬다. 더 마셨다. 더, 더, 모든 것을 잊을 때까지.

    + + +

    술을 마시고, 잠이 들고, 깨고, 또 술을 마시고, 잠이 들고, 깨고, 또 술을 마시는 상황이 반복됐다. 중간에 사장의 전화를 받은 것 같은데,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날짜 감각도 사라졌다. 하루 이상 지난 건 확실한 데, 대체 얼마나 지난 걸까?

    원래의 내 몸이라면, 이미 탈이 나도 났겠지만, 무한 체력에 자잘한 근육으로 단련된 몸은 말도 안 되는 폭음을 버티게 해줬다.

    아냐 누나도 전화를 몇 번 걸었던 것 같다. 역시 누나가 뭐라고 한 건지, 내가 뭐라고 한 건지 잘 기억이 안 난다. 하나는 확실히 기억난다. 누나에게 오지 말라고 극구 당부한 거다. 술 취한 상황에서도, 이런 상태에서 누나를 만나면 안 된다는 생각은 했다. 그건 트라우마처럼 박혀 있었다. 이렇게 술을 마시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마시지 않을 거다. 내가 무슨 일을 할지 나도 잘 몰랐다.

    이프리타는 잠에서 깨어날 때만 잠깐씩 불러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망가져 가고 있는 걸 유일하게 보고 있는 사람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술에 취해 떡이 될 때까지 같이 있다가, 다시 정령계로 돌아갈 뿐이다.

    꿈을 꾸었다.

    퀘스트가 아니라, 진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베르트랑이 되었다가, 파이레스가 되었다가, 또 요한이 되었다. 그다음엔 테디오가, 존이, 회현이, 그레이가, 루이스가, 해리가, 마지막으로 리온이 또 되었다.

    11명의 삶을 살았다. 그들의 태어남과 죽음을 함께 했다. 루이스를 제외하면, 내가 없으면 다 죽었을 인물들이다. 그들의 절박함이 내 안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꿈으로 꿔도 생생할 정도로.

    또 꿈을 꾸었다.

    이번엔 죽음이었다. 이건 꿈을 꾸는 건지, 그냥 기억에 휘둘려 허우적대는 건지, 그냥 죽은 건지 도대체 구분이 안 되었다. 셋 다 감각은 비슷했다. 나는 혼자만의 세상에서, 누군가를 찾아 무작정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다가 만난 건 퀘스트 속의 사람들, 평행 세계의 나였다. 베르트랑부터 리온 까지. 그러나 그들과도 소통할 수 없었다. 내 소리가 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었다. 아니, 있긴 한 건가?

    깨어나면 이프리타의 존재만이 늘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를 붙잡아 주었다. 그녀의 온기만이 내 추위를 잊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를 붙잡아 줄 게 필요했다. 그녀는 죽음에서 나를 꺼내줄 수는 있지만, 내 존재를 규정해 주기엔 부족했으니까. 그녀는 나를 모른다. 그녀가 나의 소환을 받은 건 내가 받아온 존의 흔적 때문이지, 정확하게는 나 때문이 아니다.

    술을 또 들이켠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는 시점에, 문이 또 철컥하고 열렸다. 예지가 올 일은 없을 테고, 누나는 오지 말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

    마침 숙취에서 깨어나고 있던 시점이라, 머리는 아프지만 정신은 제법 멀쩡했다. 열린 문 사이로 밖이 밝은 걸 보니, 낮인가 보다. 언제부터인가 낮과 밤의 구분이 없었다. 폐인 다 됐다.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나타난다. 요 몇 개월간, 가장 많이 본 얼굴이다.

    전예지.

    꿈속에서 아냐 누나가 많이 나오긴 했지만, 예지에 비할 바는 아니다. 현실에서 예지를 매일 몇 시간씩 봤으니까. 그 정도면,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그러고 나니, 내 마음에 살짝 확신이 생겼다. 나는 아직 예지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 시작이 어떻게 됐든, 그냥, 좋아하는 모양이다. 낮의 밝음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얼굴이 정말로 예쁘게 보인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 큰 눈으로 원룸 이곳저곳을 살핀다. 방은 엉망이다. 술병이 굴러다니고, 굴러다니고, 또 굴러다닌다. 과자 부스러기와 봉지도 한몫했다. 그 사이에서 내가 침대를 기대고 거의 누워있다시피 있었다.

    "뭐하는 거예요!"

    목소리가 높다.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다. 화? 화가 난 건가? 왜…… 라고 하기엔 짐작 가는 이유가 너무 많다. 예지에게 잘못한 일만 잔뜩 이다.

    "오빠가 차 놓고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

    그래, 내가 차 놓고 왜 이러는 걸까.

    "오빠가 힘들어할 게 뭐가 있어요! 참는 건 다 내가 참았는데, 내가 참고, 참고 또 참아서 여기까지 온 건데, 왜 오빠가 힘들어해요."

    "……."

    그녀가 뭘 참았지? 아냐 누나에 관련된 이야긴가? 그래, 그녀가 좀 대인배이긴 했다. 나는 웃음을 실실 흘리는 바람둥이에 가까웠고.

    "그때도, 그때도, 그때도!"

    "……."

    "잘못한 건 다 난데, 나를 조금만 더 늦게 만났으면 됐는데, 왜 오빠가 이렇게 우는데요……."

    그녀가 문 앞에서 주저앉아 운다. 펑펑 운다. 그 감정은 나에게도 전이된다. 마음이 아파져 온다.

    착한 사람이다. 자기를 찬 사람과, 자신의 남자 친구가 마음 상태를 걱정해 주다니. 찬 나나 아냐 누나를 원망하지 않고,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고생했다고 생각하다니.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지만,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던 걸까? 나도 모르게 아냐 누나를 보던 눈빛이 달랐던 건가? 그래서 그녀가 매번 상처를 입었고, 이런 생각마저 하게 한 건가?

    "……."

    "오빠는 여자 친구한테 잘하는 사람이라면서요. 그래서 좋아했던 건데, 이러면 어떡해요... 진짜, 이 나쁜 새끼야!"

    욕인데, 왜 이렇게 귀엽게 들릴까. 눈물이 범벅된 상태로 욕을 하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마구 박힌다.

    그런데,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 좀 전까지 술에 절어 있었는데, 지금은 좀 멀쩡해졌다. 왜? 예지가 와서? 아니야, 아니다, 그게 아니다. 그보단 그녀가 방금 한 말이 내 무의식을 움직였다. 분명 뭔가 있는데?

    "예지야."

    "흑, 왜요."

    "아까 한 말 다시 해봐."

    "……뭐요?"

    "다시 해봐."

    "……이 나쁜 새끼야!"

    음, 이게 아니다.

    "이거 말고, 그 전에."

    "나를 두 번 죽일 셈이에요? ……누나한테 잘하라고요! 오빠는 여자 친구한테 잘하는 사람이라면서요."

    그거다. 그녀의 말과 함께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 여자 친구에게 잘하는 사람이라서라고 한 날. 그때 그녀는 그 이야기를 내가 사장이랑 대화할 때 들었다고 했다.

    "그 때, 내가 사장한테 뭐라고 한 거야? 기억하고 있어?"

    "갑자기 왜 이래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주섬주섬 치우고는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만들고,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나도 그 앞에 앉았다.

    "중요해. 중요하니까, 말해주면 안 돼?“

    그녀는 당황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설명할 정신이 없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를 쳐다보니까, 그녀가 ‘울다가 이게 무슨 짓인지.’ 하며 그 당시의 일을 꺼냈다.

    "그러니까……."

    그녀의 말을 들으니까, 내가 그 때 무슨 말을 한 건지 다 기억이 났다. 그래, 그랬었어.

    "너는 나를 기억해?"

    "……그렇죠. 6개월은 넘게 봐왔는데요."

    "아니, 가을이 되기 전의 나를 기억하냐고."

    "당연하죠. 그때도 6개월은 봤잖아요?"

    "나는 많이 달라졌어?"

    "……많이 달라졌죠. 요즘은 눈물도 많아졌고, 말수도 줄었고, 예전에 비하면 나아진 것도 있지만, 못나진 것도 많죠. 특히나 요 며칠은……."

    아아.

    "그러면, 내가 예전에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수 있어?"

    "……그게 왜 필요해요?"

    "필요해. 필요해. 그게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나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어."

    이유를 설명하라면 할 수도 있다. 파이레스나 그레이의 이야기도 할 수 있다. 그녀가 상처를 받든 말든, 지금은 내가 사는 게 더 중요하다. 이기적이다. 그래, 이기적이다. 하지만 그녀만이 내 구원이다. 나, 원래의 나, 20년을 살아왔던 나를 온전히 기억해주는 인물은 그녀밖에 없다.

    "……후, 알았어요. 어디부터 얘기할까요?"

    "처음부터,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야기해줘."

    "그게 그러니까……."

    그녀가 얼마나 나를 관찰한 건지, 그리고 그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그녀가 말하는 것만 들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바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부모님이라도 이 정도로 나를 잘 알 것 같지는 않았다. 솔직히 커서는 부모님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 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카페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내 혼잣말이나, 사장과의 대화만 엿들은 것 같았다. 스토커다. 어쩌다 이 예쁜 아이가 이렇게 된 건가 싶은 안타까움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아주 반가웠다. 그 덕에 나는 기준을 잡을 수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시간 속에서, 나는 원래의 나를 찾았다.

    나는 그녀 안에 있었다.

    "……크흠, 그렇게 고백을 한……, 더 해야 해요?"

    "아니, 그 정도면 될 것 같아. 예지야, 고마……."

    진짜 고마워서 안으려고 하다가, 멈췄다. 우리는 이제 이런 사이가 아니다. 헤어지기로 했으니까.

    “……왜인진 모르지만, 정신 차렸으면 언니에게도 연락해요. 언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죠? 나한테 맨날 전화 와서 그게 아니다, 오해다, 그날은 아무것도 없었다, 민이는 바보니까, 네가 좀 져줘라... 언니랑은 대체 어떻게 된 건데요? 저보다 더 좋아한다면서요? 왜 이러고 있어요? 언니는 어쩌고.”

    “아... 그, 그게...”

    그때는 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있다. 좋아하는 건 누나가 아니라 너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어쨌든, 일어났으면 전 갈게요. 한마디 하니까 시원하네요. 이제 오빠 따윈 깨끗이 잊어버릴 테니까, 오빠도 알아서 잘 사세요. 폐인 됐다고 찾아오는 건 이걸로 끝이에요.”

    “어? 하지만, 그런...”

    그리고 그녀는 내 당황스러움을 무시한 채 바로 일어났다.

    “그렇게 알고 저는 가요.”

    원룸을 나서는 예지의 뒷모습엔 장난기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미련 따윈 없는 홀가분함이 보이기도 했다. 내가 한 짓이 있기에, 나는 어느 쪽인지 확신하지도, 그녀를 붙잡지도 못했다.

    “...다시 이러지 마요. 슬퍼지니까...”

    그녀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녀의 심정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기뻤다. 기준은 잡혔으니까. ‘나’를 찾았으니까.

    ============================ 작품 후기 ============================

    이 다음 편도 정리 중입니다. 대략 30분 안에는 올라갈 것 같습니다.

    150412 완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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