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05화 (105/160)

105화

"……."

[강민, 괜찮은가? 정신이 드나?]

"……괜찮아. 괜찮은 거 같아."

사실 전혀 괜찮지 않다. 그래서 지금 이프리타가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우니까. 그녀가 실제 몸이 있었다면 굉장히 아파했을 것이다. 그녀가 없이 내가 이 과정을 버틸 수 있을까?

[정신을 가다듬어라. 아직 너의 정신이 날뛰고 있다.]

[알았어.]

길게 심호흡을 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는 이게 최고다. 절규했고, 분노했고, 슬퍼했고, 우울했고, 실의에 빠졌던 마음이 차츰 제자리를 찾아간다. 모든 게 완전하진 않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는 된다. 다행이다.

[오늘은 몇 시에 나가는가?]

[오후에. 그때까지는 그냥 아무 생각 안 할 거야.]

사실은 생각할 게 많다. 정체성 문제도 그렇고, 아냐 누나에 대한 것도 그렇다. 실수, 아니 범죄를 저질렀으니 처분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걸 생각할 정신이 아니다. 무언가 떠올리는 순간 다시 죽음이 뒤따라온다. 그럼 또 거기에 빠진다.

어제보다 후퇴했다. 처음 죽었을 때보다는 낫지만, 어제보다는 별로다. 중첩되는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지금은 정체성의 문제도 죽음을 밀어낼 순 없었다. 당연하다. 일단 내가 살아 있어야 정체성이고 뭐고 고민할 테니까. 아냐 누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답이 늦어질수록 누나에겐 미안한 일만 늘어나는 게 되지만, 이것 역시 어쩔 수 없다. 내가 살아있어야지 답도 하는 거니까.

[그래, 쉬어라. 생각을 흘려보내라. 네 영혼이 알아서 회복되도록.]

[고마워, 같이 있어줄래?]

[당연하다.]

지금은 쉬자. 분심을 안 해도 버틸 수 있을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지.

+ + +

가게엔 쭉 손님이 없었다. 사장도 미영 누님과 데이트를 하러 갔다. 둘은 내내 붙어 다닌다. 이제 한두 달 정도 지난 셈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예지하고도 그러고 싶었는데, 알바하느라 못 갔고, 퀘스트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생각,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

빈 가게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시간과 생각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술을 마실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술에 의지해 모든 걸 잊고 싶었다. 그게 더 편했다. 하지만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술 마시면 또 잘못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그런 차에, 문이 열렸다.

딸랑딸랑.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다. 고개를 천천히 문 쪽으로 돌리니, 역시나 예상했던 사람이 서 있다. 카페에서 나갔을 때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냐 누나다. 왜 누나가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건지……, 정작 고개를 숙여야 하는 사람은 난데 말이다.

“...민아, 예지는 어떻게 됐어? 화해했어? 오해는 풀린 거야?”

"…….“

...누나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헤어졌다고 해야 하나? 누나 때문에 헤어졌다고?

“뭐, 뭔데? 왜 그러는데? 뭐가 잘못됐어? 예지가 아직 저기압이야?”

“...헤어졌어요.”

“그래 잘 됐다. 헤어... 뭐? 헤어졌다고...?”

누나는 경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이었다. 하지만 해명할 게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너희 잘 지내지 않았어? 갑자기 왜 그러는데? 서, 설마 어제 일 때문에?”

“그건 아니에요.”

“그럼 뭔데? 왜? 왜 헤어진 건데?”

“전부터 좀 안 좋았어요. 그게 터진 것뿐이에요.”

“뭘 안 좋아? 그렇게 닭살을 떨던 커플이 갑자기 왜?”

사실을 이야기하긴 좀 그랬다. 누나 때문이었으니까. 원인이야 어찌됐든 현상적으로는 내가 누나에게 계속 눈길을 줘서, 그냥 눈길을 줄 뿐만 아니라 그 눈길에 마음이 뚝뚝 묻어나올 정도로 쳐다봐서, 예지가 힘들어 했기 때문에 벌어졌다. 그걸 당사자한테 어떻게 이야기하겠는가?

“...”

“민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예지 같은 애 또 없어. 네가 일단 굽히고 들어가 봐. 어제는 누구나 화날 만한 상황이잖아? 거기다 대고 틱틱 대니까 예지가 홧김에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거 아니야. 이럴 때는 남자가 좀 참아야지...”

그 후로 누나는 계속 내가 예지를 잡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나에 대한 마음을 억누르느라 고생했다. 침을 튀겨가며 나를 위해 말하는 누나가, 정말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자아와, 그 자신을 끔찍하게 느끼는 내 자신이 속에서 계속 격돌했다.

“...그러니까 네가 먼저 다시 사과해야 해? 누나 말 잘 들어야 해!”

누나는 차 한 잔이 식을 동안 열변을 토해내다가 돌아갔다. 그때까지 내 속의 싸움은 결판이 나질 않았다.

다행이었다. 나는 결판이 나지 않기를 바랐다. 어느 쪽이 이겨도 다 나 같을 거고, 어느 쪽이 이겨다 다 나 같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 + +

퀘스트에 들어가야 할 때가 되자, 불안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정말로 미친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온 몸을 덜덜덜 떨었다. 그 악마 대장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두 공작도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었는데, 그런 둘이 협공해서 이기지 못한 상대를 어떻게 이기겠는가? 게다가 나는 마스터 등급의 기술에 대해 익숙하지 않았다. 오늘 이프리타와 상의한 결과였다. 어제 내 검강이 흩어졌던 건 아마도 그것 때문. 이프리타를 소환하면 조금 도움이 되겠지만, 그녀를 그 위험한 곳에 소환시킬 수도 없다. 나는 그녀를 지킬 자신이 없다.

헬 파이어를 쓰면 죽일 수 있을까?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악마를 지옥의 불꽃으로? 그런데 주문 외우다가 죽을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술이 간절하다. 술을 마시면 또 곯아떨어질 테고, 또 퀘스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좋을 텐데, 아냐 누나와의 일이 아른거려서 마실 수가 없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술을 떠올리면 그 일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니, 그냥 들어갈 수밖에.

+ + +

세 번째다. 이번에는 케니스가 게이트를 열기 전에 죽였다. 그러자 나는 살인죄로 감옥에 갇혔다. 어찌 됐든 그걸로 끝이길 바랐는데, 게이트는 후임을 통해 다시 열렸다. 그리고 악마 대장은 다시 나왔고, 대장은 황궁을 부숴 버렸다. 황궁을 쓸어버리는 데는 마법을 썼는데, 나는 그 마법에 휩쓸려 죽었다.

+ + +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소주 한 박스를 사서, 그냥 깡으로 들이붓기 시작했다. 앞에는 이프리타가 앉아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그녀도, 나도 방법이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온갖 이유로 찾아오는 죽음이, 나를 진짜로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위이잉.

"야, 너 안 나와?"

"어라? 사장님이네, 아녀하세요, 사장님."

"너 낮술 했냐?"

"예? 아하 나술. 네, 나술나술했어요."

"……좋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두고 보자고."

"네? 여보에요? 사장님?"

위이잉.

"민아……."

"누구? 아, 누나, 누나네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지금요? 술 마시고 있어요. 이게 있잖아요. 술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잘 넘어가는데요. 술이 술술술술."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냐?"

"에이, 마이 안 마셔떠요. 한 10병? 아니 1박슨가?"

"……."

"어라? 여보세요? 누나? 엽떼여?"

위이잉.

"……."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

"누구세요? 누, 구, 세, 요?"

"……."

"뭐야, 장난 전화야? 에이, 끊어!"

띵동!

응? 누구지? 올 사람 없는데? 열어줘야 하나? 왜? 아무도 올 사람 없는데…….

철컥.

어라? 문이 왜 저 혼자 열려? 나는 안 열었는데? 일단 이프리타부터 숨겨야……. 아, 벌써 없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방바닥에 뒹굴 거리는 병을 한쪽으로 치웠다. 손이 아주 곱다. 어디서 본 손 같았다. 누구지? 역시 아는 사람이다. 하긴, 내 방 비밀번호는 예지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왜 예지가 아니라 에밀리가 있는 거지? 아니, 아냐 누나인가?

"우와, 또 누나네. 누나다. 아니, 에밀린가?"

"……에밀리가 누구야?"

"에밀리가 에밀리죠. 누구긴 누구예요. 그렇게 말하는 누나는 에밀리가 아닌 모양이네요. 그렇게 얼굴 굳히지 마요. 알았으니까."

"나는 아냐야. 민아……, 도대체 왜 이러니?"

그 순간, 정신이 번쩍하고 들었다. 아냐 누나라고? 머리를 흔들고 다시 보니, 놀란 눈을 한 누나가 보였다. 진짜 아냐 누나다.

"……세요, 누나. 여기 있으면 안 좋은 꼴을 당할 거예요. 가세요. 누나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누나의 얼굴을 보니, 그날 모텔에서 할 뻔했던 일이 떠올랐다. 누나는 모르지만, 나는 안다. 그때는 위험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취해 있으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말해드릴 수 없어요. 어쨌든 빨리 가요. 제가 정신을 놓기 전에."

"……알았어, 갈게. 그럼 그만 마실 거지? 왠진 모르겠지만, 갑자기 정신도 차린 거 같은데..."

걱정이 가득한 눈이 내 마음을 찌르니 나중이야 어떻게 됐든 대답을 하고 말았다. 이제 내 감정인지, 그들의 감정인지 모를 감정이 나를 움직였다.

"……네, 안 마실게요."

"그래, 그럼 술 깨면 이야기하자."

"네, 누나. 잘 가세요."

누나의 발소리가, 평소보다 무겁다. 술이 잔뜩 취해 있으면서도, 이상한 건 다 알아듣고 있었다.

+ + +

"오호, 강민. 도대체 무슨 염치로 다시 가게에 나타나셨을까?"

"죄송합니다."

그 말로 끝은 아니었다. 사장은 계속 나를 혼내고, 놀리고, 또 놀렸다. 뭐, 그냥 넘기면 된다. 그의 말은 나에게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니까. 평소라면 발끈하며 그의 흥미를 불러일으켰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야, 어제 아냐는 만났냐? 와서 너 걱정 엄청 하던데? 그래서 예지는 집이 어딘지 알고 있을 거라고 해줬지. 아, 그럼 예지가 가게 되는 건가? 어떻게 된 거야?"

"아냐 누나 혼자 왔다 갔어요."

"쯧, 남자가 돼가지고 여자 걱정이나 시키고, 잘하는 짓이다. 그리고 너 어떡하려고 그러는 건데? 눈빛을 보니 아냐도 완전 진심인 것 같던데? 걔는 그래도 잘 참는 듯하더니 왜 그러냐. 관계 복잡해지고, 서로 상처만 남을 텐데……."

"……."

그 말은 내게 영향을 끼쳤지만, 사장도 그걸 눈치 챘는지 그만둔다.

"아무튼 잘해. 그리고 가게 좀 빠지지 말고. 너는 말이야. 내가 왜 돈을 준다고 생각하는 거야……."

사장은 한참을 더 그러다가 미영 누나의 제지로 그만뒀다. 그리고 누나와 함께 나가 버렸다. 나도 나가 버릴까 싶었다. 어차피 손님도 없고, 사장이 다시 와서 확인할 거란 생각은 안 한다. 그냥 누워서 아무 생각 없이 있고 싶었다. 지쳤다.

그래서 진짜 가게를 정리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누군가 왔다.

"오늘 장사 끝이……."

라는 말을 하려다 올 사람이라고 해봐야 아냐 누나밖에 없다는 걸 떠올리고는 말을 멈췄다. 역시나 누나였다. 누나는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내가 가게에 있어서 그런 듯했다.

"오셨어요?"

"응."

"혹시……. 어제 제가 누나에게 실례라도?"

기억은 나지 않지만, 또 모른다. 누나가 온 것만은 분명 기억하고 있으니까.

"응? 아니야. 이상한 이야기는 했지만, 별일 없었어. 아니다, 별일이긴 별일이지. 도대체 에밀리가 누구야? 그렇게 안 봤는데, 강민 너 바람 폈어? 예지를 두고?"

“아니에요. 바람은요.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그냥 아는 사람이 집에 찾아와? 나랑 착각도 하고... 바른대로 말해 봐. 누나가 듣고 판단을 내려주지. 예지랑도 빨리 화해해야 할 거 아니야.”

대답해주고 싶었다. 퀘스트라는 걸 하고 있어서, 매일 밤 죽고 있어서, 힘들다고. 솔직히 말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누나가 어디 떠벌릴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예지에게도 못한 이야기였다. 누나에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

“민아, 뭐라도 얘기를 해 봐. 그래야 결론이 나지. 예지는 어떻게 할 건데? 응? 그리고 그 에밀리라는 년은 대체 누구인 거야?”

누나는 또 한참동안 나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고 돌아갔다. 그게 나름 위안이 되긴 했다. 덧씌워진 감정이든, 원래 내 감정이든 내 마음이 누나에게 반응하고, 죽음을 살짝 밀어냈다. 더불어 누나와 사귀고 싶다는 마음도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안 돼.

그러나 난 이제 그 누구와도 연결될 수 없었다. 어떤 게 ‘나’인 건지, 아직 잘 모르니까.

============================ 작품 후기 ============================

완전 수정!(1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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