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그 앞에서 기다릴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이전부터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건 예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오해야 그냥 풀면 된다. 하지만 내가 누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노력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은 그게 더 중요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 생각만 계속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왜 누나를……. 그리고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지?
그러나 머리가 띵해서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일단 좀 쉬고 싶었다. 그런데 가다가 보니 카페 앞을 지나갔고, 가게를 열려고 하던 바리스타 누님과 마주쳤다. 머리가 아프니 신경 쓰지 못한 탓이다.
"야, 강민!"
"아……."
"너 무슨 일이야? 어제는 어떻게 된 거야? 연락도 없이 빠지고. 너답지 않게."
미영 누나가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착한 사람이다. 말도 없이 빠졌으면 화부터 낼 법도 한데.
"그, 그게 급한 일이 있어서요. 연락할 새도 없었네요. 죄송합니다."
"……그래? 흐으음.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오늘도 바빠?"
바쁜가? 바쁘진 않다. 그저 머리가 아프고, 고민할 게 있고, 언제 두려움이 나를 덮칠지 모른다는 것 뿐. 그럼 카페에서 일할 수 있는 건가? 죽음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만, 이프리타가 있으니 짧은 시간 안에 다시 나올 수 있을 거다. 잠시라면야 정신의 공백이 생겨도 괜찮겠지. 어차피 가게엔 할 일이 없으니까.
"……아니요. 오늘은 괜찮아요. 생각할 건 많지만, 시간은 많네요."
"그래? 그러면 있잖아."
"왜요?"
"오늘 좀 일찍 나와 줄 수 있어? 나야 괜찮지만, 우리 자기는 너 때문에 화가 좀, 아니, 솔직히 화라기보단 괴롭힐 걸 찾았다고 즐거워하고 있거든."
사장이 눈웃음을 짓고 있는 게 자연스레 떠올랐다.
"……눈에 선하네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 일찍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럼 내가 우리 자기를 잘 구슬려 볼게. 그게 좋지 않겠어?"
그래도 별 효과는 없을 것 같지만, 그나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사장이 날 심하게 놀리기 시작하면 나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손톱만큼이라도 효과가 있다면 해야지.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와볼게요."
"그렇게까지 부담 가질 필요는 없고, 그냥 조금만 빨리 와. 우리 자기 오기 전에? 오늘은 좀 늦게 올 거야. 어제 가게 오래 지켰다고 오래 잔다고 했거든."
……일찍 와야겠다. 내가 안 가면 가게 닫을 줄 알았더니, 가게를 지킨 거냐.
"그럼 잠시 후에 봬요. 집에 가서 좀 씻고 올게요. 어제 밖에서 자서."
"그래, 좀 이따 봐."
그나저나 이제 ‘죽음’에선 어느 정도 괜찮아진 건가? 유비 말대로 술이 답인가? 아니면, 내게 닥친 혼란이 너무 큰 건가?
+ + +
시간이 약이다.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젠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죽음의 기억에 빠져 정신이 다른 세계로 가버린 건 두 번 정도밖에 없었다. 어제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는 숫자다. 어젠 집에서 나와 유비를 만나기까지 수십 번을 더 기억 속에서 헤매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이프리타의 도움이 컸다. 그녀가 계속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회복할 수 있었다. 유비가 그나마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 3일 이상 걸렸다고 했다. 그러니 영혼으로 연결된 이프리타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회복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잊게 하는 고민도 한몫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계속 생각했다. 사장이 어제 일을 가지고 혼을 내거나 꼬투리를 잡으면서 즐거워할 때도, 계속 그 생각만 했다. 다른 것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못했다. 대부분은 한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 귀로 나갔다. 그 반응이 재미가 없었던 건지, 사장의 놀림은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데, 기뻐할 정신도 없었다. 그만큼 고민은 깊고 무거웠다.
퀘스트를 시작한 지 5개월 정도. 그간의 기억은 죄다 퀘스트에 대한 거밖에 없었다. 말 타고, 던전 탐험하고, 싸우고, 말하고, 고백하고, 싸우고……. 내 희로애락이 거의 다 거기 있었다. 실제 내 일이 아닌데도, 나는 내 일처럼 반응해 왔다. 그것도 매일 밤.
그나마 비중을 차지하는 현실의 일은 대부분이 예지와 있었던 일이다. 그녀에게 고백을 받고, 그녀와 잠깐씩 이야기를 나누고, 정식으로 사귀게 되고, 데이트하고, 이야기하고……. 그 외에는 아냐 누나와 관련된 일 조금하고, 몇몇 학교 친구에 대한 기억이 조금 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지난 5개월은 그 이전의 내 삶과 너무나 달랐다. 그 전의 내 삶은 단조로웠다. 학교, 집, 게임이 주로 반복되고, 가끔 친구가 끼인다. 그게 거의 10년 이상 반복되었다. 어릴 때일수록 비중이 역전되어 친구 비중이 높아지지만, 5년 전부터는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게 살았다.
그런 나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 건 반가운 일이고, 그 덕에 생각이 바뀌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람은 변하는 동물이니까.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퀘스트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경험은 나쁘지 않다. 공짜 경험은 더욱 좋다. 생생한 경험이라면 더더욱 좋다. 그게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많이 일어난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것도 괜찮다. 아무튼 경험하고 바뀌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런데 인격이 섞이고 있다는 게 문제다. 두 영혼이 한 몸을 공유하면서, 생과 사를 함께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문제.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상황. 매번 주의한다고 했지만, 그게 내 뜻대로 안 되는 것 같다. 게다가 나는 퀘스트를 반복한다. 그것도 그들의 감정이 격해져 있는 부분에만. 심지어 매일이다.
그래, 매일.
매일 밤마다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내 삶은 어디에 있는가? 깨어 있어도 대부분은 꿈 속 세계를 생각하고, 꿈 속 세계에 에너지를 더 많이 쏟는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함은 없지만, 20년을 살아온 습관대로 하루의 반은 생각하기를 꺼린다.
지금 내 안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왜 아냐 누나를 보는데 릴리나, 로젤리나나, 수에르테나 레베카 백작이 먼저 떠오르는 걸까? 내 안에 '나'가 있기는 한 걸까? 실은 이미 나는 없고, 베르트랑과 루이스와 테디오와 해리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닐까?
왜 예지와 사귀게 되었던 걸까? 예뻐서? 그녀가 먼저 좋아해 줬으니까? ……실은 파이레스의 영향이 아닐까? 그의 아내가 예지와 닮았다는 건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았지만, 사실은 공허에 휘말리면서 모든 벽이 무너졌던 건 아닐까? 그 때 그의 기억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예지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닐까?
기억조차도 믿을 수가 없다.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을 바꾸기 마련이니까. 이미 인격이 뒤섞인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나의 진실인가? 학교, 집, 게임, 친구를 반복하던 무료한 삶만이 내 진실이란 말인가? 그 삶엔 다른 어떤 것도 없었나?
물음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정체성이 흔들리니 제대로 붙잡을 수 있는 게 없다. 머리가 복잡하다. 무언가 나를 나로 규정할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찾아도,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의심만 불어난다. 어제, 내가 모든 것을 죽음과 연관시켰다면, 지금은 모든 걸 의심한다.
숙취가 남아 있는 머리로 생각할 게 아니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 편해지고 싶다. 머리 한쪽에서 유혹이 밀려든다.
'어차피 다 너야. 같은 영혼이잖아? 평행세계잖아? 그렇게 날을 세울 필요 없어.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너는 좀 피곤할 뿐이야. 자고 일어나면 다시 너를 찾게 될 거야.'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너는 그들과 달라. 다르다고! 21세기의 지구에서, 너만이 가진 고유한 게 있다고. 그게 같다고 치부되는 거면, 왜 평행세계가 나뉘어 있는 건데. 정신 차려! 지면 안 돼! 너를 지키라고!'
하지만 반대 목소리는 작다. 일단 피곤한 것만은 진짜니까……. 그래도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멈추면 내가 사라질 것만 같다.
"……오빠."
그러다가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든다. 예지가 굳은 표정으로 눈앞에 서 있다. 언제 온 거지? 젠장, 어제도 메시지를 무시하면서 화를 냈는데, 오늘도 그러고 만 건가?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가?
예지의 등장에, 정체성 문제에 비하면 중요도가 떨어져 있던 아침의 일이 떠오른다. 일단 젖혀 두었던 문제. 지금은 예지에게 그 사건을 해명해야 할 때다. 그러나 아침과는 달리 혼란스럽다. 사실을 해명할 수는 있다. 실제로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감정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예지에 대한 감정조차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마당에...
"어, 왔어?"
“…….”
“아, 그래, 아침에는... 오해야. 그냥 같이 있었던 것뿐이야.”
모든 게 복잡해서 너무 대놓고 말했을까. 그녀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
“어제 술이 떡이 돼서... 누나가 내 옆에 있었나 봐.”
“...”
“그, 그게 왜 저번에 봤잖아? 누나 친구란 사람. 그 사람이랑 술을 마셨거든? 그런데 좀 많이 마셔서 난 떡이 됐고, 그 분이 누나를 불러서 나를 모텔로 옮겼다나 봐. 난 정말 필름이 끊겨서 기억이 안 나는데, 누나가...”
“...”
“그 어쩌다 보니 마셨어. 우리 동네 사나 봐. 집에 가면서 마주 쳤는데, 술 한 잔 하자고 그래서...”
“...”
“아냐 누나 친구라니까 쉽게 거절할 수가 없어서...”
“...”
이제껏 무언의 질문에 그나마 잘 대답한 듯,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원래대로,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굳었다.
“아무튼 한두 잔만 하려고 했는데... 먹다 보니 잘 받아서...”
“...”
“나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
“...”
이쯤 되면 모든 걸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야기해서, 예지의 도움을 받고 싶다. 퀘스트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려니, 이유가 너무 지어낸 듯하다. 그걸로 통할 리가 없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
“...”
침묵에 침묵으로 대응하며, 모든 이야기를 할까 말까를 고민했다. 그동안은 예지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지 않기를 바랐고, 말하면 그녀에게도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두려웠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됐다면,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그렇다고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계속 고민했다. 그런데 그 타이밍에, 공교롭게도 최악의 손님이 가게로 들어왔다.
“예지야, 아침에는 오해야 그건 아무 것도 아니...”
아냐 누나는 들어오면서 예지를 발견하곤 변명부터 시작했는데, 예지가 돌아보자 움찔하며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애처로웠다. 누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왜 저래야 할까. 왜 저렇게 저자세로 나올까. 나를 좋아해서?
그래, 계속 부인했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누나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말이다. 쉬웠다. 내가 본 평행세계의 아냐 누나들이 하던 반응을 아냐 누나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빛, 표정, 행동, 어느 순간부터 누나의 모든 것에서 그런 마음이 드러났다.
누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모르겠다. 얼굴이라도 보여주면 알 것 같은데,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알 수가 없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 이 자리에 예지가 있는 게 껄끄럽겠지. 미안할 것이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분명 누나가 더 어색해 하고 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식으로 반응하다가 스스로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린다. 예지의 두 눈이 떨리고 있다. 내가 어디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안 걸까? 나에 대해 유독 족집게인 그녀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또 뭘 한 걸까.
“…….”
“…….”
“…….”
이번에도 침묵을 깬 건 누나였다.
“예지야, 일단 그건 오해야. 정말 오해니까, 너무 몰아붙이지 마. 응? 알았지? 일단 나는 가볼게... 내가 있는 게 불편한 거 같으니까.”
막을 이유도, 막을 권리도, 막을 방법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누나는 가게를 나섰고, 가게에는 다시 나와 예지만 남았다.
“…….”
그녀는 여전히 침묵하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아냐 누나가 등장했을 때부터 계속 흔들렸다.
뭘 한 걸까. 지금 뭘 할 수 있을까. 아니,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이미 저지른 일은 어떻게 해결한다 치자. 그럼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걸까? 그걸로 괜찮은 걸까?
앞으로도 퀘스트는 이어질 테고, 지금과 같다면 앞으로도 아냐 누나가 계속 나올 거다. 그러면 그때마다 내 마음은 퀘스트 주인공을 쫓아 아냐 누나에게로 기울 테고, 예지에게선 더 멀어져 가겠지. 그럴 때마다 누나를 보는 내 눈빛은 애처로워지고, 예지는 그걸 보고 상처를 입고, 나는 다시 죄책감에 힘들어지겠지.
그게, 괜찮은 걸까? 나는 그렇다 치고, 예지에게는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무심코 답이 나온다.
"……헤어지자."
"왜요?"
예상했다는 듯이 받아치지만,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너를 계속 볼 자신이 없어."
“…….”
"내 마음이 어디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
“…….”
"다 내 잘못이야."
“…….”
“나를 원망해.”
"……그 말은, 지금 언니가 더 좋다는 말이에요?"
“…….”
"알았어요."
“…….”
"오늘은 갈게요."
“…….”
그녀는 끝까지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 맺혀 있던 큰 물방울 두 개는 내게 등을 돌리자마자 눈에서 떨어졌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그 물방울들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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