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01화 (101/160)
  • 101화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이프리타을 소환한 상태이고, 분심을 이미 한 시간 이상 유지하고 있다. 정신력도 정신력이지만, 아직 내 레벨에서는 이 정도로 분심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억지로 시간을 늘리고 있는 거다. 머리가 배로 아프다.

    안 좋은 생각은 계속 날아든다. 쳐내야 하는데, 쳐내기 무섭게 다시 살아난다. 세상 모든 것이 나를 노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섬뜩하게 하는 건, 바로 이거다.

    위이이잉.

    "흐억."

    [강민? 괜찮나?]

    신경이 곤두서 있다 보니, 폰의 진동에 지진이라도 난 듯이 반응하며 몸을 숙였다. 이어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그러다 이프리타의 걱정이 전해져 오자, 이게 폰의 진동일 뿐이라는 걸 인지했다.

    [...괜찮아.]

    [마음을 편히 먹어라. 너는 지금 안전하다.]

    [응.]

    안다. 안전한 건 나도 안다. 아는데 잘 안 된다. 죽음은 그만큼 내 뇌리에 박혀서, 나를 옭아매고 있다. 그 그림자만으로도 정신이 날아갈 정도다. 왜 그러지? 왜냐. 내가 이렇게 약한 사람이었나? 퀘스트 안에서 여러 경험을 했는데, 역시 죄다 간접경험인가? 아니, 이것도 결국 간접경험이잖아. 그런데 왜?

    ...모르겠다. 다시 마음을 나누어야 할 시점이 된 거 같다.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빠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마음을 제대로 나눌 수 있을까? 머리가 깨지는 것 같다. 이대로 뇌가 타버려서 죽을지도.

    위이이잉.

    손에 잡고 있고, 눈으로 보고 있는 데도 깜짝 놀란다. 불안함에 또다시 주위를 둘러 본다. 한심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데? 왜? 왜 나야?

    위이이잉!

    젠장, 아까부터 도대체 뭐야!

    [강민, 정신 차려라. 지금 네 마음이 매우 불안정하다. 강민!]

    메시지를 보내는 대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 가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무작정 목소리를 높였다. 이프리타가 나를 다독이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갑자기 치솟아 오른 짜증과 화를 그 사람에게 다 풀어 버렸다.

    "그만 좀 해! 아침부터 무슨 말이 그렇게 종알종알 많아. 네가 참새야? 답이 없으면 자는구나 하고 생각해. 바쁜 일이 있겠거니 하고 못하는 거야? 왜, 왜, 왜! 나를 귀찮게 하지 좀 말라고! 이 빌어먹을 년아!"

    "..."

    [강민, 너 지금 정상이 아닌...]

    말을 내뱉고 나서야 누구에게 폭언을 퍼부었는지 깨달았다. 게다가 그 폭언이 얼마나 어이없는지도 인지했다. 그 사람에게 메시지가 온 건 고작해야 3개 정도였고, 그 내용도 고작해야 '좋은 아침이에요.' , '자는 거예요?', '그럼 좀 더 자요.' 등이었다. 평소라면 입을 헤벌쭉 해선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잠에 빠질 수준에 불과했다. 다른 건 광고 메시지거나, 속해있는 그룹의 전체 메시지 같은 거였다.

    나, 뭘 한 거지.

    "...죄송해요, 오빠. 제가 잘못했어요."

    "아니, 아니야. 예지야. 내가 잘못했어. 내가 지금 너무 짜증이 나서, 아니, 너한테 짜증이 난 게 아니라... 아무튼, 예지야,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알았어요. 그럼 다음에 연락해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주셔도 돼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전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대체 뭘 한 걸까. 아무리 짜증이 난다 해도, 지금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해도, 예지한테 이러다니?

    심지어 다시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말할 자신도 없다. 또 실수할 것만 같다. 괜찮은 것 같았는데, 갑자기 짜증이 미친 듯이, 진짜 미친 사람처럼 치밀어 올랐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인가? 두려움 때문인가? 나뉜 마음이 겪고 있는 외로움, 스스로 만들어낸 상상이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가? 도대체 뭐지?

    [강민, 흔들리면 안 돼. 정신을 차려, 정신을 차려야 해!]

    분심이 풀린다. 머릿속이 기쁨과 슬픔과 걱정과 기대로 가득 찬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프리타의 목소리가 흐릿해진다. 여긴 길 한중간인데,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깨질 것 같은 머리는 잠깐 나아졌지만, 정말로 잠시일 뿐, 다른 고통이 내 영혼을 지배한다.

    [강민! 죽음을 생각하지 마! 강민, 정신 차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프리타의 목소리를 붙잡고,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해. 죽음을 생각하지 말자.

    [괜찮나?]

    [안 괜찮아. 안 괜찮아. 안 괜찮아!]

    [강민?]

    뛰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지만, 빨리 도착하기 위해 뛰었다. 유비는 답을 알고 있을 거다. 그녀는 괜찮아 보였으니까. 물론 그녀도 대화 중에 이상한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대부분은 멀쩡했다. 그 정도만 돼도 괜찮다. 그 정도만 돼도.

    + + +

    힘껏 문을 밀어젖히고, 유비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양손으로 힘껏 쳤다.

    "가르쳐 줘!"

    "뭘?"

    태평하게 잔을 내려놓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 화가 치밀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자기는 괜찮다 이건가?

    "다 알잖아!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데?"

    "벗어날 수 없어."

    "뭐?"

    "...벗어날 수 없어."

    머리 한쪽에 밀어 두었던 '죽음'이 기괴하게 웃는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녀는 저렇게 멀쩡하잖아?

    "왜! 너는 그렇게 멀쩡하면서! 왜 벗어날 수 없는데?"

    "3일 뒤, 아니, 오늘 밤이면 너는 다시 퀘스트에 들어갈 거고, 또 죽겠지. 오늘 죽는다 하지 않더라도 언젠간 죽겠지. 그런데 어떻게 벗어나지?"

    "...그, 그런."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어. 우리는 죽음을 겪어본 사람이니까. 죽는다는 거, 선택할 수 있겠어?"

    없다. 절대로 없다. '죽음'이 유혹의 미소를 보낸다. 죽으면 편할 거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절대로 응하고 싶지 않다.

    "...지금 그런 걸 묻고 있는 게 아니잖아! 지금, 지금 이 상황을 넘길 게 필요한 거라고! 이게 뭐냐고! 아침부터 머리는 깨질 것 같고! 심장은 폭발할 것 같고! 뭘 봐도 죽음만 떠오르는데, 이렇게 해서 어떻게 살란 말이야! 이러는 게 어딨어?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뭘 잘못해서 이러는데... 왜, 나보고 어쩌라고... 여자 친구한테 화풀이나 하고..."

    [...]

    "...일단 마셔."

    "...뭔데."

    그녀가 마시던 잔을 내밀자, 그냥 마셔 버렸다. 마시니까 뭔지 바로 알았다. 카페에서 머그잔이길래 커핀 줄 알았더니, 소주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뜨겁게 만들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콸콸콸.

    그녀는 테이블 아래에서 소주를 병째 꺼내더니, 빈 잔에 들이 부었다.

    "더 마셔."

    이상하게도 귀에 잘 박히는 그 목소리를 따라 다시 원샷을 감행했다. 술은 약하지만, 지금은 마시고 싶었다. 그녀는 빈 잔에 다시 소주를 채우면서 입을 열었다.

    "시간밖에 답이 없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야. 고통도, 외로움도. 그 전에는 이렇게 잊어야지. 마셔, 마시면서 잊어. 아니면 여자를 안든지. 여자 친구 있다며? 불러내. 불러내서 하루 종일 안아. 나는 그걸로 버텼는데... 큭, 그런데 조금만 생각하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나도 어제부터 상태가 별로야. 그러니까, 자, 마시자. 마시자고."

    어느새 그녀도 잔을 들고 들이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 카페라고 하지 않았나? 술 마셔도 되나? 다른 손님들은?

    그제야 가게 안을 돌아보는데, 안에는 우리 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이 꺼진 걸 보면,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듯했다. 그러고 보면, 아직 열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이제 고작 11시? 그 정도밖에 안 됐을 테니까.

    "여기는 내 애인이 하는 가게야. 하루 빌렸어. 어제 하루 종일 해댔더니, 오늘은 쉬겠다네. 그러니 걱정 말고 마시고, 또 마셔. 작지만 안에 누울 수 있는 공간도 있으니까, 여관비 없으면 여자애 불러서 놀든지. 아직 학생이잖아? 돈 없지?"

    소주가 가득한 잔을 또 들이켰다. 머그잔으로 세 잔. 소주를 그렇게 들이부으니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잘 이해가 안 된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예지를 데리고 오라고?

    "나는 그런 짓 안 해. 그럼 예지를 도구로 취급하는 거잖아?"

    "도구라니? 윈윈이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고통을 잊는 데는 그게 직빵이라니까? 아, 혹시 아직 동정이야? 그래서 윈윈이 안 되나? 음, 퀘스트 속에서 한 번쯤은 경험이 있었을 텐데..."

    "동정이면 어때서! 아무튼, 나는 안 해. 이걸로 충분해."

    잔을 들어 앞에서 흔드는데, 잔이 흔들리는 건지 내가 흔들리는 건지 잘 모르겠다. 머리가 핑핑 돈다. 하지만 이건 또 다른 느낌. 분심으로 머리가 깨지는 것과 죽음으로 머리가 멍해지는 거랑은 다른 느낌. 이게 제일 기분이 좋다.

    "에이, 역시 자신이 없구만. 뭣하면 내가 한 번 대줄까? 누나가 친절하게 가르쳐 줄게. 자자, 그 고양이는 내려놓으라고. 동물보다 인간이 훨씬 좋거든?"

    그녀가 다가오는 건가? 어째 가까운데? 그러나 나에게 이프리타가 있지. 가라, 이프리타!

    "크와앙!"

    [강민, 다시 한 번 이런 거 시키면 죽인다.]

    티셔츠를 들어내자 이프리타가 나와 유비 사이에 끼어들며 소리를 냈다. 그러고서 나를 쳐다본다. 화났나? 뭐, 머리 쓰다듬어 주면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잘하네. 아유, 귀여워라."

    "뭐야, 그거 고양이가 아니네? 뭐야? 여우? 불타는 거 같은데?"

    "내 사랑스런 여우지. 헤헤. 정령왕이다?"

    "정령왕?"

    "그래, 정령왕.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예쁜데. 이프리타, 이번엔 변신해 봐."

    오랜만에 보고 싶었다. 불꽃의 갑옷으로 무장한, 아름다운 이프리타. 그런데 왜 이렇게 이프리타가 흐릿할까. 내 눈이 이상한가? 유비는 깨끗하게 보이는데?

    [불가능하다. 강민. 너는 아침부터 힘을 많이 썼고, 지금은 집중력이 아예 흐트러졌다. 나는 조금 있으면 돌아가야 한다. 너는 지금 나를 유지할 수 없어.]

    "에? 뭐야? 진짜야? 아쉽네."

    [그보다 이러다 잠이 들면 퀘스트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이렇게 술에 정신을 놓아도 되는가?]

    그녀의 마음,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밀려온다. 흐릿해지는 그녀의 꼬리를 잡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엽다. 귀여워. 그러고 보면 이대로 괜찮은 건가? 퀘스트에 들어가긴 싫은데, 그래, 퀘스트!

    "....쳇, 골키퍼가 많은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드는데, 유비의 목소리가 반쯤 들렸다. 무슨 소리지?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 상관없어. 그보다 이래도 되는 거야? 퀘스트는? 이러다 잠들면 다시 퀘스트고, 퀘스트에 들어가면 죽고..."

    "잠깐! 그만, 괜찮으니까 그만 생각해! 너 그러면 나까지 전염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괜찮아?"

    "그래, 괜찮아. 왜 그런 것도 모르는 거야? 술 마시고 정신을 잃으면 퀘스트에 안 들어가."

    진짠가?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는 믿을 만 하지만...

    "저번에 밤새고 쓰러졌는데 잘만 들어가던데?"

    "...그건, 나도 잘 몰라. 내가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어쨌든 술 마시고 정신을 잃으면 퀘스트에 안 들어가. 내가 자주 쓴 방법이니까 믿어. 그래서 이렇게 먹이는 거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쉬어야지. 안 그래?"

    진짜인가 보지. 아니, 진짜가 아니면 어떡할 건데? 어차피 잠은 잘 테고, 밤엔 퀘스트에 들어갈 텐데. 밤이나 낮이나.

    "좋아, 마시자, 부어, 더 부어!"

    그 뒤로는 잘 기억이 안 난다. 미친 듯이 소주를, 맥주를, 소맥을 들이켰다. 여러 스킬들로 육체 능력이 좋아진 건지, 웬만큼 마셔선 쓰러지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의 수배는 먹고 나서야 해롱해롱해졌다. 그 사이에 이프리타는 절로 돌아갔다. 그녀는 나름 안심한 듯했다. 술에 절어 있는 게 죽음에 갇혀 있는 거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게 낫지 뭐.

    혼미한 상태에서 유비의 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냐, 여기 와서 얘 좀 데려가. 누구긴 누구야, 네가 좋아 죽는 왕자님..."

    뭐가 아니라는 거지? 여튼 저년은 간이 어떻게 된 거야? 분명 같이 먹었는데, 왜 말짱해?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100화 축하 감사 드립니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책이보고파요 스킬 자료(경험치 포함)가 집에 있어서... 저녁에 올려드릴게요.

    그리고 칼데라린 님의 의견에 따라 딱 100번째 댓글을 찾아 보았습니다.

    아스부나스 2014.11.05 14:10삭제재밌어요!

    전작도 보셨고, 초반에 댓글도 잘 달아 주시던 분인데.... 요즘 안 보이시는군요. 어디 가셨나요ㅠㅠ

    아무튼, 댓글과 추천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잘 보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50209 추가) 다음편엔 충격적인 장면일지도 모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