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강민>
[정신 차려! 강민! 강민!]
들린다. 희미하지만 이프리타가 부르는 소리는 분명 들린다. 그녀의 모습도 보인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여우가 내 가슴 위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런데 멀다. 모든 게 멀다. 소리도 멀고, 모습도 멀다.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거지? 모니터 밖에서 모니터 안을 보고 있는 수준이 아니다. 모니터 밖에서 모니터 한구석에서 작게 재생되는 동영상을 작은 소리로 보고 있는 느낌이다. 화면이 너무 작아 픽셀 하나로 물체 하나를 표현해야 되는, 그래서 물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니, 모니터 밖이 아니라 모니터 안에서 보고 있는 건가?
[강민! 강민! 강민!]
이프리타! 이프리타! 이프리타!
소리를 지르지만 닿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지만, 그녀는 여전히 반응하지 않는다. 잘못된 건 나인가, 그녀인가? 악을 지르다가 그녀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녀는 분명 내 가슴 위에 있는데, 내 손은 왜 그 따뜻함에 닿지 않는 거지? 내 팔이 움직이기는 하는 건가? 상념 속에서 수십 번 내 옆구리와 가슴을 오간 손인데, 실제로는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거 같다. 뭐가 진짜지?
[강민! 강민! 강민!]
꿈인가 하고 볼을 꼬집어본다. 느낌이 없다. 아프고 자시고를 떠나 꼬집는 행위가 내 뜻대로 이루어진 건가? 그런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확실한가? 무작정 볼을 잡았다. 손톱을 세워 피부를 긁어댔다. 피가 난다. 피가 방울져 공중을 떠다닌다.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 피부가 벗겨져 벌건 속살이 드러난다. 손이 목을 향한다. 곧이어 동맥이 터져 피가…… 뿜어져야 하는데……, 어느새 피부가 재생되어 있다. 피로 물들었던 손톱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다. 뭐지?
[강민! 강민! 강민!]
그녀가 내 몸을 흔드는 건지, 세상이 흔들리는 건지 파악할 수 없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과거인가 현재인가. 기준을 잡을 수가 없다. 마음속의 거울이 내 모습을 그리는데, 얼굴이 마구 바뀐다. 어릴 때의 모습이었다가, 중학교 때의 모습이었다가, 지금의 모습이었다가, 마지막에는 살점 하나 없는 해골의 모습으로 바뀐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뚫려 있는 검은 구멍이 블랙홀처럼 나를 빨아들인다. 그 안으로 들어간다. 옆 구멍으로 나온다. 다시 들어간다. 어둠에 파묻힌다. 다시 옆 구멍으로 나온다.
그런데 어디가 옆 구멍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 내 눈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삭아 없어졌으니까. 땅속에서 나무 관과 함께 썩어 사라졌으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가슴 위에 뛰고 있었을 이프리타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건 조금 전의 일인가? 몇십 년 전의 일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제부터 일어날 일인 건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지도 않고, 내 귀에 닿지도 않는다. 그 무엇도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고,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 공유하고 있는 게 하나도 없고, 공유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나는 어떻게 된 거지? 나라는 건 뭐지?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듣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계속 반복된다. 반복되는 건지, 한 번 한 일이 계속 기억 속에서 재생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생각하니까 존재한다고? 이런 게 존재한다는 건가?
공기가 흐르지 않으니 시간이 흐를 리 없다. 그냥 나는 외치고, 못 듣고, 외치고, 못 듣고, 외치고, 못 듣고, 외치고, 못 듣고…….
그러다가 갑자기, 아니, 오래전부터, 아니, 조금 있다가 들릴 소리가 들린다.
[강민! 정신 차려! 이 소리만 들어! 다른 건 하지 마! 생각도 하지 마! 난 여기에 있고, 넌 여기에 있다! 정신 차리라고! 강미이이인!]
소리는 화살이 되어 나를 꿰뚫었다. 손가락 끝에 겨우 닿아 조금의 상처를 낸 정도였지만, 그 순간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강민! 강미이인!"
그녀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공기를 진동시키며 소리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화르르륵.
침대도 옷도 타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옷이 탈 정도로 뜨거웠다. 이 정도면 내 가슴은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가슴의 감각은 이미 사라진듯하다. 심장이 뜨거움에 폭발할 듯 뛴다.
가슴 위에서 방방 뛰는 그녀는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몸만 했던 꼬리는 두 배로 커졌다. 뜨겁다. 미친 듯이 뜨거운데, 팔을 들어 그녀를 안았다. 팔이 움직이는 게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눈물이 터진다.
[강민?]
"흑, 끄윽, 끅."
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눈물은 흘러내리다 그대로 기화된다. 목 안이 이미 다 타버린 모양이다. 아프다. 테디오는 이 고통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는 게 아니다. 그냥 우는 거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유를 알 필요가 있을까?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은 눈물이 되기도 전에 열기에 수증기가 되지만, 적어도 수증기가 되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외치던 것보다는 낫다. 둘은 비교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미안하다. 다시 몸을…….]
[그대로, 그대로 있어줘.]
나를 태워 버릴 것 같은 열기지만, 살아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냥 그게 고마웠다. 어차피 내가 그대로 있으라고 해도, 그녀가 알아서 온도를 줄여준다. 그 배려와 따뜻함이, 오고 가는 게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다시 붉은 여우로 돌아온 그녀를 꼬옥 안는다. 평소엔 이렇게 안는 걸 싫어했는데, 오늘은 아무 말이 없다.
[괜찮은가?]
[안 괜찮아.]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나를 깨우기 위한 거였다지만,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
……이게 진짜 죽음인가.
+ + +
[이프리타 거기 있지?]
[머리 위에 있잖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어디 가면 안 돼.]
[어디 가지 않아.]
이프리타의 몸을 큰 티셔츠 같은 걸로 가리고는 품에 안았다. 그런데도 걷는 와중에 계속 그녀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죽는 게 너무나도 무서웠다.
외롭고, 또 외롭다.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상태, 심지어는 나와도 소통이 안 된다. 팔다리가 따로 놀고, 눈과 귀가 따로 놀았다. 감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분심의 영향인지, 나는 수백 명이 되었다가, 다시 한 명이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그게 진짜 죽음인지, 그 뒤에 무언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파이레스의 세계에서 겪은 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건 분명하다. 그 때도 힘들었다. 사라지는 것이 다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진짜 끔찍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라지고 생성되고를 반복한다. 아니, 사라졌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 더 심한 건 모든 게 무한히 반복된다는 거다. 이프리타가 말하길, 나는 깨우기 시작한 지 10분 정도 만에 일어났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느낀 감각은 달랐다. 거의 무한, 무한의 시간 동안 나는 알 수 없는 것을 했고, 또 안 했다.
조악한 비유를 하자면, 인터넷에서 떠도는 어떤 생각처럼, 아무도 없는 세계에 100억 년쯤 혼자 있다가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서는 그 기억이 사라지지만, 나는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전혀 정리가 안 되는, 카오스를.
죽는 게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러니까 도처에 죽음이 보였다.
차가 신호를 지키지 않고 나를 칠 수도 있다. 천강지체와 라이트닝 소드의 효과로 몸이 단단해지긴 했지만, 과속하는 차에 제대로 치이면 즉사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도로를 오가는 화물차는 왜 그렇게 허술하게 짐을 묶는 건지, 조금의 충격에도 줄은 끊어질 것 같다. 무거운 물건들이 화물차의 속도 에너지와 함께 도로에 풀리면 어떻게 될까.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 죽지 않으란 법이 없다.
맨홀 같은 거에 빠지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빠진다고 죽는 건 아니지만, 그 사이에 하수도가 터져서 수몰당하면 어떻게 되는가? 어쩌면 갑자기 하늘에서 철근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공사 크레인의 무게 중심을 잡는 돌, 사람만 한 크기의 무식한 돌은 언제나 불안해 보였다. 그 돌에 깔리면 그냥 죽을 게 분명하다. 찍소리도 못하고.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죽음의 위험은 도처에 깔렸고,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한 번 죽으면 끝이다. ‘다시’라는 건 없다. 죽으면 무한의 세계에서, 무한히 홀로 있어야 한다. 그게 모두에게 고통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고통이었다. 정말로, 영혼에 사무치는 고통이었다. 그걸 고통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걸까?
모두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을 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위험한 현대 사회, 그 중에서도 곳곳에 죽음이 보란 듯이 자리하고 있는 대도시에 사는 걸까.
……모르니까. 모르니까 그렇게 사는 거다.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니까 말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 몰랐잖은가? 그러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것도 희미하게 아는 수준임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안다. 그러니 도대체 그냥 살 수가 없다. 걸음 하나도 주위를 살펴야 했다. 바닥은 튼튼한지, 앞에서 오는 차나 사람은 없는지, 머리 위는 안전한지 봐야 했다. 비행기 소리 같은 것도 주의 깊게 살폈다. 절대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길 위에 헬기가 떨어지는 사고는 근래에도 있었다. 침몰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배가 아무렇지 않게 침몰하기도 했다.
어디도 안전하지 않다. 죽음은 바로 옆에 있다.
[강민? 괜찮은가?]
[아? 아. 괜찮아. 생각이 너무 쌓였어. 다시 마음을 분리해야겠어.]
[……그거 괜찮은 거야?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데…….]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어. 도와줘, 이프리타.]
[……알겠다.]
[분심 lv.4 43.986]
분심을 배운 뒤, 종종 분심을 썼다. 그래서 올린 레벨이 하나였고, 그다음부터는 오늘 아침부터 시작해 올린 것이다. 미친 듯한 속도로 오르고 있는 건, 머리가 터질 것 같아도 계속 분심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하면 죽음의 경험이 다시 머릿속에서 재생되는데, 그렇게 하면 진짜 움직일 수가 없다. 그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다시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생각을 분리할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과 죽음을 분리하고, 몸을 움직이는 나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그러면 한쪽 마음은 죽음의 고통을 겪지만, 몸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도 만능은 아니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수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다시 마음을 나누려면 한번 합쳐야 한다. 그런데 한 번 합치면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그걸 헤쳐 나오려면 이프리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아직 이 고통에 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정신력이 못되었다.
고통은 겪기 싫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한 고통이 따를 뿐이다. 해야 한다.
[준비됐지?]
[됐다. 시작해라.]
그녀의 말에, 떨어진 마음을 부르기 시작했다. 분심이라 해도 일단 몸을 움직이는 게 주 인격 같은 취급을 받아서, 죽음의 고통에 빠져 있다해도 내 부름에는 응답한다. 두 개의 마음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2개로밖에 나눌 수 없었지만, 분심이 lv.4에 오르면서 세 개로 나누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나만, 다른 하나는 올 필요 없어.
하나의 마음은 다시 멀어졌고, 하나는 가까워졌다. 가까이 다가오자, 그 마음이 겪고 있는 고통이 확연히 느껴졌다. 무엇이나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 존재를 유지하는 것. 그 마음은 몸을 움직이는 주 인격에 기대어 존재를 유지했지만, 주 인격은 의지할 데가 없다. 아, 아니지 이제 다른 마음이 하나 더 있으니까, 거기에 의지하면 되는 건가?
[강민! 강민! 강민!]
[…….]
이프리타가 머릿속에 외치는 소리와 또 하나의 마음의 침묵이 내 마음에 닿았다. 어느 쪽이든, 내 존재를 유지하는 데 버팀목이 되어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합쳐지고 나서 찾아온 죽음의 고통에서 비교적 빨리 나왔고, 빠르게 두려움과 죽음을 분리해냈다. 이걸로 얼마간은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위이이잉.
[여기 너희 가게 근처 카페야. 이리로 와.]
유비의 메시지를 따라서 움직였다. 원래라면 카페에 가서 알바를 해야 할 시간이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걸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극복할 방법이 없다면, 지나가는 방법이라도.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드디어 100편! 100회 특집으로 뭔가 하고 싶지만.... 오늘의 3연참이 제 한계인가 봅니다....하하하하하 어쨌거나 결국 하루 늦었네요. 1월 안에 100회 찍으려고 했는데...
공백 연출은 이걸로 마지막입니다..... 혹 불쾌한 분이 있으시다면 이번이 마지막이니 참아주세요.
오랜만에 연참해서 선작수도 조금 늘고, 오랜만에 베스트에도 올랐는데.... 앞으로 이어질 막장 드라마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하하. 아무튼, 저는 해피엔딩을 지향하니 마음놓고 보셔도 됩니다.
100회입니다. 혹시 서평 장전하신 분 계시면 지금 쏴주시면 됩니다. 그럼 제가 연참으로 보답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밤 샌 탓에 정신이 혼미하지만, 그러니까 더 글이 잘 써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서평을 바랍니다!
@나는나다잉 다른 능력자도 나옵니다ㅎㅎㅎ
댓글과 추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기다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