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97화 (97/160)

97화

마을 구석에 자리한 놀이터. 날씨는 추웠지만, 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뛰고 있었다. 맞은편 그네에 앉아 있는 스칼렛도 그럴까? 상체야 외투로 단단히 방어했지만, 하체는 거의 실종수준인데 말이다. 뭐, 두꺼운 허벅지를 보면 추울래야 추울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러고 보면 허벅지가 특히 굵다. 무슨 운동이라도 하는 건가?

"그럼, 스칼렛, 너는 언제부터 퀘스트를 시작한 거야?"

"이유비. 유비누나라고 불러. 어차피 아냐 앞에서는 누나라고 해야 하잖아?"

그 말은 맞다. 맞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냐 누나 앞에서 그렇게 할 테니까. 그럼 유비라고 하면 되겠지?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

"그렇게 딱딱하게 나오면 나중에 고생할지도 모르는데? 강민?"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지?"

"그거야 내가 아냐랑 절친이니까 그렇지."

"나는 한 번도 못 들었는데?"

"으음, 그건 그만큼 네가 아냐랑 친하지 않다는 거 아닐까?"

어째서인지, 그녀는 스스로 말해놓고 자신이 없어 보였다. 계속 강, 강, 강으로 나오던 태도와는 살짝 달랐다. 물론, 금세 회복됐지만.

"뭐, 좋아. 나는 편하게 민이라고 할게. 아니면 존이라고 불러줄까? 우리 큰 존."

"...민이 좋아. 일단 대답부터 하지? 퀘스트는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

"9월. 너는?"

"나도 9월이야."

그 뒤로 퀘스트에 대해 이것저것 한참을 이야기했다. 제법 긴 시간동안 이어진 대화를 통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와 나의 퀘스트는 같았고, 또 달랐다.

1. 그녀도 자신 이외의 퀘스트 진행자를 만나는 건 내가 처음이란다.

2. 그녀도 나와 똑같은 메시지로 시작한다고 한다. 100개의 퀘스트를 깨면 영웅이 될 어쩌고저쩌고 말이다.

3. 그녀는 내가 겪은 퀘스트를 경험하지 않기도 했다. 수에르테의 여동생으로 활약했던 적은 없다고 한다. 퀘스트 시작할 때 메시지를 생각하면, '영웅이라고 불릴만한 나'의 삶만 경험하는 것 같다.

4. 그녀와 나는 퀘스트 진행이 조금 달랐다. 그녀는 퀘스트 사이 사이에 3일의 쉼이 있다고 했다.

5. 그리고 그녀는 한 번 퀘스트에 실패하면 다시 도전할 수 없었다.

6. 대신 하루에 한 번만 퀘스트 정지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시간만큼 말이다.

7. 그런 차이 때문인지, 그녀는 엊그제 25번째 퀘스트를 마쳤다고 한다.

8. 마지막으로 그녀는 퀘스트 속 인물의 능력을 거의 배우지 않는다고 한다. 체력 같은 걸 제외하면, 그런 능력보다 자신의 능력에 경험치를 더하는 게 효율이 높은 걸 확인했고, 시스템도 그렇게 조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9. 그녀의 능력은 '얼음'이었다. 얼음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고 했다.

10. 현재 그녀의 얼음 레벨은 8. 퀘스트 성공하면 꽤 경험치가 오르지만, 실패하면 조금 오른단다. 하지만 8 이후에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시스템에 물어본 바로는 모든 퀘스트에 다 성공해야 아키로 레벨에 오를 수 있다는 것 같다.

쩌정.

그녀의 손짓 한 번에 허공에 얼음이 생성되었다. 그녀의 얼굴을 막을 정도의 크기였다.

"힘껏 쳐 봐."

얼음은 얇았는데, 그녀는 자신이 있어 보였다. 힘껏 쳤다. 라이트닝 소드를 수련하면서 근육도 자연스레 붙었기 때문에, 이 정도 얼음도 못 깰까 싶었다.

그러나 얼음은 깨지지 않았고, 내 주먹만 아팠다.

쾅!

아야야야.

아픔을 꾹 참고 소리는 마음속으로만 냈다. 애써 태연한 척 했는데, 소용이 없었나 보다. 손짓 한 번에 다시 얼음을 없애버린 그녀가 웃었다.

"푸흡,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얼굴에 다 보이는데 뭘 참고 있어. 나한테 잘 보일 일 있냐? 역시 스칼렛을 잊을 수 없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겠어... 아무튼 강하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능력이 없는 거지?"

"모르지. 이 사태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 말을 할 텐데, 너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그렇다. 그녀와 나까지 해서 겨우 두 사람. 이걸로는 그 무엇도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모두가 같은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만 명확하지, 그 외에는 전부 정보가 부족했다.

그래도 내 능력이 없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시스템에 물어보면 가르쳐 주려나? 불친절하긴 해도, 내가 어떤 단서를 가지고 있으면 그에 관해선 설명을 해주는 편이니까.

"그건 그렇고, 혹시 두 달 전에 대구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한 건 알고 있어? 그거 아무래도 우리처럼 퀘스트를 진행하는 사람이 저지른 거 같던데."

"그거라면 아는 게 없어. 한 번 가보긴 했는데, 건진 게 없네."

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건데, 돌아오는 대답이 예상 밖이었다.

"...대구까지 가 봤단 말이야?"

"당연하지. 넌 안 가봤어? 네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인데도 그렇게 아..."

그녀의 말대로 내가 겪고 있는 일이고, 심상치 않은 일이니 나처럼 안 가보는 게 이상한지도 모른다. 내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처럼 쉬는 날이 있는 게 아니니 이동하는 걸 무의식적으로 자제해 온 것도 사실이다. 핑계지만... 그녀가 비난하려다가 멈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까? 그러나 그 눈빛엔 그 이상의 측은함이 담겨 있었다.

"왜?"

"너 이제 10번째라고 했지?"

"어, 그게 무슨 문제라도?"

"음... 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줄곧 나를 잡아먹으려던 사람이 왜 이럴까. 눈빛뿐 아니라 분위기도 갑자기 바뀌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하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후...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그러다가 또 바뀐다.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지고, 얼굴에 가면을 덧씌운다. 조울증 환자 같았다.

"확신할 순 없지만, 오늘 밤 퀘스트에 들어가면 '정신력 보호 기간'이 끝났다는 말을 들을 거야."

"정신력 보호 기간?"

"그래. 그게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을 거고, 아마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몰라."

무표정으로 무심한 듯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 두려움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뭐길래?

"어떤 충격인데?"

"죽음."

"...죽음은 이미 여러 번 겪어 봤는데?"

"그 정도가 아냐. ...내가 말로 해봐야 소용없어. 그냥 죽지 않기를 바랄게. 이런 말 하면 오히려 의식해서 더 쉽게 죽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조심해."

"..."

두려움, 불안, 걱정. 그녀로부터 전해져오는 생소한 감정에 말문이 막혔다. 강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강한 그녀였는데, 지금은 그냥 소녀 같았다.

"...알겠어?"

"...알겠어."

"자, 그리고 폰 줘 봐. 이게 내 번호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아마도 내일 연락하게 될 거겠지만..."

그녀의 확신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내일 연락하게 될 것만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말했고, 예상하는 것과 같겠지.

나, 오늘 죽는 건가?

"오늘은 갈게. 내일 봐."

"...그래."

성적인 농담과 함께 그럭저럭 밝은 분위기로 이어지던 대화는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로 끝이 났다. 가슴 한쪽이 묵직했다. 집으로 가서 자기 전에 조금이라도 쉬고, 목욕이라도 하며 기분전환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에게 돌려받은 휴대폰엔, SNS 메시지가 수백 통 와 있었던 것이다.

+ + +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일단 가게로 향했다. 불 꺼진 가게 앞에는 아름다운 두 여성분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가게는 그냥 접고, 연락은 안 되고, 언니는 울고..."

"민아! 흐아아앙"

예지는 소리쳤고, 아냐 누나는 나를 보자마다 달려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안겨드는 누나를 차마 뿌리칠 수 없어서 일단 받아 주었다. 예지가 움찔하는 게 보였지만, 눈치로 보니 그녀도 체념한 듯했다. 그래도 이걸로 며칠은 달달 볶이겠지. 그런데 왜?

좀 진정이 된 거 같자, 누나의 어깨를 잡고 떼어냈다.

"누나?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그, 나 때문에, 흑, 유비랑, 너, 흑 싸워, 흑 기분, 흐으윽."

통역은 예지가 대신해줬다.

"오빠랑 언니 친구가 아까 좀 안 좋았다면서요? 언니는 그것 때문에 오빠가 기분이 나빠져서 가게를 닫고 나간 걸로 알고 있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게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구나.

"아니, 진짜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간 거였어. 누나 친구랑은 아무 상관 없어. 그냥 그게 우연처럼 맞아 떨어졌던 거지. 누나, 그런 거 아니니까, 이제 그만 울어요."

"흑... 진짜야?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지?"

"네, 진짜예요."

"나 싫어하는 거 아니지?"

"당연하죠. 제가 누나를 왜 싫어해요..."

하는데, 왠지 실수한 듯한 느낌이 팍 들었다. 예지의 표정이 안 좋았다. 여기에 아무 생각 없이 또 안겨 들려는 누나가 보인다. 누나, 예지 앞에서 이러면 안 되잖아요. 재빨리 누나의 어깨를 잡고 제지했다.

"누나, 아무튼 누나에게 화가 난 게 아니니까요. 이제 그만 울고, 빨리 집에 가요. 여기서 얼마나 기다린 거예요?"

"몰라... 네가 그렇게 나간 게 잘못이야. 연락도 안 되고."

"맞아요. 오빠, 도대체 연락은 왜 안 된 거예요? 메시지에 확인도 안 하고, 답도 없고."

예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누나도 그걸 느낀 건지, 움찔하면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그게, 급하게 나가느라 무음 상태인 걸 몰랐어."

"도대체 무슨 일이 그렇게 바빴던 거예요?"

일이 이렇게까지 됐으면 뭐라도 말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않은가? 아니지, 그래도 되는 건가? 예지가 어디에 떠벌리고 다닐 사람도 아니고. 아냐 누나는 좀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말해도 지금은 아니다.

"대구에서 올라온 친구가 있어서 내려가기 전에 만나기로 했었는데 깜빡했었어. 오랜만에 만나는 불알친구라서, 사실 오늘 알바를 미리 뺐었어야 했는데, 그것도 까먹었고."

이게 수백 통의 SNS 메시지를 확인하고 부랴부랴 만든 핑계다. 조악하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만, 밀어붙이면 아냐 누나는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정신이 없었잖아? 진짜 왜 이러는 지 모르겠네."

"괜찮아? 민아? 내가 봐도 너 요즘 어디 안 좋아 보여."

"..."

가게에 자주 찾아오는 아냐 누나다. 내가 요즘 멍한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감정이 가라앉지 않아서 그런지 누나는 내 변명에 쉽게 넘어갔다. 물론 예지는 여전히 의문스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괜찮아요. 좀 쉬면 낫겠죠. 누나는 이제 괜찮아요? 가게 열고 잠시 쉬다 갈래요?"

"아! ...아니야. 괜찮아. 화난 거 아니면, 먼저 갈게. 다음에 또 봐. 안녕."

누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 빨리 챙기더니 빨리 눈앞에서 사라졌다. 왜지? 그런데 나에게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누나가 사라지고 난 자리엔 예지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왜 그런 거였어요?"

낮은 목소리로 묻는 예지의 분위기가 자못 무서웠다. 여기다 대고 거짓을 얘기할 순 없었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

그녀는 계속 내 눈을 쳐다봤다.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면 더 추궁이 심해질 테니까. 한동안 그렇게 보던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물러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젠 잘 모르겠다.

"...알겠어요. 그런데 가게는 이렇게 해도 괜찮아요? 좀 전에 사장님 왔다 갔는데..."

"망했네."

드래곤의 키스가 가진 게 이런 위력인가? 오히려 되는 일이 없는데?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100편..... 진짜 쓰고 싶었는데....ㅠㅠ 죄송합니다.

댓글과 추천 감사합니다.

더욱 더 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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