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96화 (96/160)

96화

<이유비>

국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우리 친절한 시스템이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여왕의 남편’이란 뜻입니다.]

“그럼 카너와 앨리스가 결혼했다는 거야?”

[명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 이상은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친절한 시스템이란 건 취소. 그럼 카너의 능력을 볼까? 여왕의 남편이라……, 도대체 뭘 배워야 할지 짐작이 안 가는데?

그리고 그 예상대로 카너의 능력은 죄다 배우기 애매했다.

[검술 lv.8]

[체술 lv.6]

[마법 기초 lv.4]

[상재 lv.5]

[체력 lv.9]

특히나 상재. 현재 내 상재가 lv.4니 말 다했다. 상인이란 직업을 가진 사람이 상재 lv.5라니 좀 심한 거 아닌가? 하지만 그게 맞을지도. 모든 이가 직업에 프로페셔널한 건 아니니까. 대충 먹고 사는 거지. 아니, 그보다 이 경우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게 맞는 건가. 원래는 그 재능을 따라 용병을 했잖아?

결국, 체력을 배워야 하나? 체력을 배우면 천강지체의 레벨이 7로 오른다. lv.7에는 특전이 하나 붙어 있어서 또 다른 이득도 있었다. 특전의 이름은 [한계 너머]로, 체력 전체가 소모됐을 때 일부분 회복된다고 한다. 사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썼던 기술이다. 헬 파이어 쓰고도 잠깐 잠깐은 움직였으니까. 그게 좀 더 효율이 높아진다는 이야기겠지.

이것만 보면 닥치고 체력을 찍어야 될 것 같지만, 조금 아까웠다. 지금까지의 퀘스트 주인공들을 보면, 체력은 다들 하나같이 뛰어났다. ‘나’는 체력에 재능이 있는 게 틀림없다. 내 체력은 고작해야 2레벨이었지만, 이쪽은 예외고. 아무튼, 앞으로도 체력을 올릴 기회는 많다는 거다.

그래도 다른 능력들이 별로니 체력을 찍는 게 당연한 결론이다. 그러나 그 결론의 실행을 막는 능력이, 정말로 애매한 능력이 하나 있었다.

[드래곤의 키스 Master] - 영구 버프. 레벨이 따로 없음. 드래곤의 행운을 나누어 가진다.

일단 키스라는 것에 반가웠다. ‘국서’라는 호칭에서도 느껴지는 게 있었지만, 이건 더 확실한 증거였다. 설마하니 앨리스 말고 다른 드래곤의 키스는 아닐 테니.

그런데 드래곤의 행운을 나누어 가지면 어떤 게 좋은 걸까? 금광이라도 찾는 건가? 그보다 우리 세계에는 드래곤이 없는데?

하지만 시스템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내 마음속 생각이었지만, 시스템도 얼마든지 읽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결국 이걸로 끝이라는 거다. 뭔가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내게 알려줄 순 없다는 거겠지.

[한계 너머]라는 확실한 카드에 비하면, 도박 같은 능력이다. 솔직히 배운다고 눈에 보이는 효과가 나타날 것 같진 않다. 그런데 왜 이리 끌릴까.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나를 움직이고 있는 감이라는 녀석이 계속 강력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드래곤의 키스를 배우겠어.”

쓸모없는 능력은 아니겠지. 그래도 드래곤인데. 등급도 R이고. R은 Rare의 R이란다. 희귀한 것이 꼭 좋다고 볼 순 없지만, 대박은 이런데서 나는 거 아닌가. 나 역시 상재 lv.4로, 대박을 낼 자질은 없어 보인다만, 다음이 있으니까.

이번처럼만 하면 이틀 뒤에 또 능력 선택일 텐데, 거기에 분명 체력이 있을 거야.

+ + +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온 동네를 뒤져서 찾아낸 대여점에서 빌려 온 판타지 소설이다. 그런데 이게 도움이 될까? 죄다 같은 내용뿐인데…….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거다. 설정이 다 비슷하다는 이야기는, 결국 다른 세계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용이 다 같으니 재미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소설보다는 퀘스트가 훨씬 재밌다. 그건 내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공감각적 경험이니까 일단 메리트가 크다.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빈약한 상상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러고 보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이런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게 되었는데, 왜 재미가 없을까. 그럼 더 몰입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지, 진짜를 알고 있어서 재미없는 건가?

아무튼, 그렇게 손님 하나 없는 카페를 지키고 있는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기에 처음엔 사장과 바리스타 누님인 줄 알았다. 두 사람은 데이트를 즐기다가 가끔 가게로 오곤 했기 때문이다. 쉴 겸, 감시할 겸, 혹은 더블데이트를 위해서. 사장은 예지가 있어도 투덜대고, 예지가 없어도 투덜대지만, 일단은 예지가 없는 게 나에게 호의적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지가 없다고 자신 있게 고개를 들었는데, 예상과는 다른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한 사람은 늘 보던 아냐 누나였다. 누나는 늘 그렇듯 아름다웠다. 오늘도 저 외모로 얼마나 많은 남자의 눈길을 사로잡았을지. 우리 가게에 자주 오지 않으면 더 많은 남자의 마음을 빼앗았을 텐데, 너무 자주 오는 아냐 누나다.

“민! 나 왔어!”

“어서 오세요. 누나…….”

그리고 누나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도 아는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처음이었지만, 테디오와 존의 몸으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 여기는 내 친구. 맛있는 카페에 가고 싶다기에 데리고 왔어. 잘했지?”

“…….”

“…….”

갑자기 스칼렛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마치…….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그래, 그런 반응이었다. 게다가 내 귀는 스칼렛이 작게 중얼거린 소리도 들었다. 분명히, ‘역시…….’라고 했다. 역시? 왜 역시?

“아, 아니에요. 그냥 어디서 본 거 같은 사람이라 서요.”

“내 친구가 예뻐서 본 건 아니고? 예지한테 다 이를 거야.”

진짜 스칼렛보다는 못생겼다. 옆에 아냐 누나가 있으니까 더 못생겼다. 그러나 그건 비교 대상이 너무 우월해서 그런 거지, 이 세계의 스칼렛이 못생겼다는 게 아니다. 보이쉬한 외모와 다르게 색기가 흐르는 눈빛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그것 때문에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아니에요.”

“훗, 그건 제가 못생겼다는 이야기인가요?”

“아, 아니에요. 진짜 어디서 본 거 같아서요. 혹시 저 본 적 없으세요? 꿈에서라도.”

‘역시’라는 말은, 분명 무언가 알고 있다는 거다. 직감이 왔다. 그렇다면 ‘꿈’이라는 단어에 반응할 거다.

“꿈? 민, 너 초면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진짜 예지한테 이른다? 완전 바람둥인데?”

“…….”

생뚱맞고, 살짝 민감할 수도 있는 내 질문을 누나가 장난스럽게 받았지만, 내 눈과 귀는 스칼렛의 반응만을 살폈다. 그녀는 지금 커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 있다.

“…….”

나도 입을 다문 채 스칼렛을 바라보고 있자, 누나가 진짜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민? 유비야?”

“아냐, 미안한데 나 먼저 가보면 안 될까?”

“에? 왜?”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각났어. 커피는 나중에 마실게.”

그리고 스칼렛은 바로 몸을 돌려 가게를 나가 버렸다. 누나는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와 가게 문을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스칼렛이 밖으로 나가면서 고갯짓으로 나에게 나오라고 한 걸 봤기 때문이다.

“누나, 죄송해요. 제 말이 좀 심했나 봐요. 친구분이 화난 거 같은데 어쩌죠?”

“응? 아니야. 괜찮을 거야. 착한 애인데, 뭔 일이 생각난 걸 거야.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누나의 대답에는 영혼이 없었다. 이런 누나의 영혼을 더 흔들어 놔야 한다는 게 좀 미안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런데 누나.”

“응, 왜?”

“그게 저도 급한 일이 생각나서요. 가게 문 닫고 어디 나가봐야 될 것 같아요.”

“어? 어어? 민아?”

누나가 당황하든 말든 카운터 뒤쪽에 있는 라커로 가서 앞치마를 정리하고, 이어 대충 가게 안을 치웠다.

“누나, 진짜 죄송해요. 다음에 오시면 커피 공짜로 드릴게요. 오늘은 진짜 급해서요.”

그리고는 누나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냈다. ‘찰칵’거리며 문이 잠겼고, 그대로 큰길을 향해 뛰었다. 조금 전에 스칼렛이 움직였던 방향이다.

“누나, 진짜 죄송해요!”

“민아?”

허탈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스칼렛의 흔적을 찾아 뛰었다.

+ + +

라이트닝 소드를 익히면서 오감이 발달했지만, 아스팔트 바닥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는 방법 따위는 퀘스트 내에서도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걱정했다. 일단 큰 길로 뛰면서 좌우를 살폈고, 그게 안 되면 이프리타를 불러서 찾아볼까 했다.

“여기야.”

그런데 조금 가다 보니 스칼렛 쪽에서 먼저 나를 찾았다. 그녀는 카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골목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치곤 낮은 톤의 목소리를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나를 부르자마자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기에 재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아냐에게 들키면 머리 아프니까.”

“이미 머리 아파진 거 아냐? 왜 그렇게 급하게…….”

“급한 건 너였잖아? 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난 몰랐다고. 그보다 왜 반말이야. 여기서는 내가 나이가 많을 텐데.”

“그, 그건.”

“그리고 대부분의 세계에서 내가 나이가 더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닌가?”

대부분의 세계. 그녀는 나처럼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많이 만났나?

“대부분의 세계라니, 나는 너를 만난 적이 두 번밖에 없는데? 한 번은 암살자로, 한 번은 부인……으로.”

“부인? 아아, 그거 말하는 거구나. 정령 좋아하고 기사에 푹 빠진 중2병. 내가 걔를 지킨다고 얼마나 애먹었는데, 그게 아마 존이었나?”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도 순간 욱했다. 존의 절절한 마음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데,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중2병? 그건 남자의 로망이라고! 그리고 스칼렛도 기사도를 잘 따랐잖아. 그걸 그렇게 깎아내리면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거 아냐?”

“먹칠 좀 하면 어때. 스칼렛은 내가 아닌걸.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면 될 텐데, 말은 못하고 임이 좋아했던 거라고 맞지도 않는 기사도에나 빠져 있고. 정말 답답한 여자애였지.”

“…….”

할 말이 없었다. 스칼렛의 순정은 지금으로 치면 바보 같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몸에 빙의되면서 그녀도 그 감정을 절절하게 느꼈을 게 분명하다. 그걸 그렇게 넘길 수 있는 건가?

이어지는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래도 남자 보는 눈은 있었어. 존의 물건은 아주 훌륭했지. 너도 체격은 비슷한 거 같은데……, 꽤 훌륭한 거야?”

그녀의 눈이 내 중요부위를 향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왜 그렇게 빼? 사람은 다르지만, 우리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 아닌가? 아, 스칼렛은 꽤 글래머였지……. 나는 그 축복을 못 받……, 쳇, 그래도 까보면 괜찮다고. 탄력도 좋고. 한 번 볼래?”

스칼렛은 둘째 치고, 아냐 누나 친구가 맞긴 한 건가? 좀 전 카페에서 볼 때는 그래도 얌전한 느낌이었는데……. 많이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다. 굳이 찾자면 수에르테랑 비슷한가?

당장에라도 코트를 벗어 상의를 벗어 올리려는 스칼렛을 막았다.

“그만, 그만해! 나는 네 몸을 본 적 없다고.”

그리고 왜 나에겐 스칼렛의 몸매를 안 보여 준거냐!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스칼렛의 현실 이름은 이유비입니다만, 연예인 이유비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름이 예뻐서 쓰는 거예요. 물론 성격은 더럽군요.... 엑스트라는 아니지만, 주연도 아니고... 아, 조연입니다.

아무튼 드디어 다른 퀘스트 진행자가 나왔군요! 오호호호호호홓호.

1월 안에 꼭 100편 쓰고 만다.

@울랄라공 어제 비교했던 전작은 '뱀파이어들의 왕'입니다. 다른 아이디로 올렸던 글이에요.

@누굴지? 그건 계속 보시면 압니다. 하하하하 그래도 그걸 봐주시는 분이 계시는 군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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