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카너가 앨리스를 살리는 데 동의해서, 나는 다시 그에게 몸을 넘겨주었다. 그는 검을 다시 허리춤에 갈무리하며 주위를 둘러싼 무리의 한쪽을 가리켰다.
“드렉! 여기 이 드래……, 아니 이 동물을 우리 안에 가둬.”
“네! 그런데 저희에게 우리가 없습니다.”
“만들어! 튼튼하게!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어제 불침번 선 놈들 다 나와! 어디서 저런 게 들어오는 데도 몰…….”
카너의 호통에 어제 불침번을 섰던 15명이 카너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드렉을 위시한 이들도 재빨리 뛰어와 앨리스를 붙잡았다. 앨리스는 낯선 이들이 자신을 제압하자 당황한 듯했지만, 카너의 눈치를 보며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그밖에 다른 이들도 저마다 할 일을 찾아서 움직였다.
모두가 카너의 눈에 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움직인 탓일까. 그의 눈은 그들을 향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마차가 모여 있는 주변을 보고 있었다.
‘왜 아무런 흔적이 없지?’
분노가 약간 가라앉은 카너는 마차 주변에 흔적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의문에 빠졌다. 드래곤이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드래곤이 어떤 존재이고, 마법이 뭔지 알기에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법으로 이동한 거로 편하게 생각했었다.
카너는 자신 앞에 열을 지어 서 있는 무리를 외면하고 장신구가 있는 마차로 갔다. 조금 전 앨리스의 몸부림으로 마차를 덮는 천이 약간 찢어진 거 외에 마차에는 다른 이상이 없었다. 상자도 마찬가지였다. 열려 있는 걸 제외하면 처음 마차에 실을 때와 똑같은 상태였다. 분명 자물쇠는 카너가 열었고, 앨리스는 그 안에 들어 있었는데.
‘어떻게 안에 들어온 거지?’
그 물음에 ‘마법으로’라는 답을 하려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너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앨리스를 살리느라 대충 넘어갔지만, 앨리스는 고작해야 돌멩이를 움직이는 마법사가 아닌가?
그보다 드래곤이란 개념 자체가 없는 세상에 드래곤은 왜 나타난 거지? 그리고 헤츨링과 인류 멸망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예전에 본 소설이 떠오르긴 하는데, 그게 무슨 내용이었더라?
‘모르겠군.’
나 역시 모르겠다. 그래도 카너보다는 내가 낫다. 그는 내 존재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으니까.
+ + +
반나절 정도가 지나 상단은 요제네프 백작이 다스리는 큰 상업 도시 아미스 블루에 도착했고, 나는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와야 했다. 현실로 돌아와서 여러 일, 이불을 갠다든가, 씻는다든가, 예지에게 연락한다든가 하는 일들을 마치고 바로 이어 한 일은 이프리타를 부르는 거였다.
[이번에는 왜 부르지 않았지?]
[아, 그게…….]
그 뒤로 한참 동안 이프리타에게 카너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레이의 세계에서 드래곤에게 죽은 이후로, 이프리타는 항상 나에게 자신을 불러주기를 요구했다. 혹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현실로 돌아와서는 꼭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나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나 역시 이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기에 흔쾌히 허락했다. 무엇보다 나보다 다른 세계에 대해 많이 아는 그녀다.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늘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맞았다.
[분명히 ‘해츨링’을 죽이지 말라고 퀘스트 메시지가 말했나? 인류 멸망이라고도 했고?]
[그래. 뭔가 아는 게 있어?]
[그렇다면 부모가 곧 등장할 것 같군. 드래곤은 보통 자식을 아낀다. 손이 짧으니까. 자식이 죽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분노하지. 부모라면 누구나 그렇게 반응하겠지만, 강대한 힘을 가진 드래곤이기에 문제는 크다. 인류 멸망에 이를지도 모르지. 내가 정령왕이 되면서 받은 지식은 그렇다.]
어? 그건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판타지 소설과 내용이 비슷한 거 같은데?
[잠깐, 그건 소설의 내용인 거 아냐? 소설이 왜 현실이 되는 거지?]
[……모든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놀랍군.]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우의 모습인 그녀는 무슨 행동을 해도 귀여워서, 비난을 받고 있는 것도 현실 같지 않고, 이 대화 자체도 어떤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건 분명 현실이었다.
‘드래곤’이란 발음이 이 세계에서 드래곤을 가리키고, 그레이의 세계에서도 드래곤을 가리키고, 카너의 세계에 나타난 앨리스도 같은 발음으로 자신을 규정했는데, 내 머릿속은 아직 그 연결이 잘 되어 있지 않나 보다.
아니, 이건 좀 다른 문젠가? 나는 게임을 하지, 소설을 즐기지는 않잖아? 특히나 판타지 소설은……. 그리고 게임에서 해츨링은 잘 안 나온다고.
[헤츨링은 죽이면 안 돼. 드래곤은 내가 상대할 수 있다고 무조건 장담할 수 없는 종족이다. 몸을 사려라.]
[알았어. 최선을 다할 게.]
이제부턴 판타지 소설을 좀 읽어봐야겠다.
+ + +
그날 밤, 다시 들어간 세계에서 나는 카너를 밀어내고 몸을 차지했다.
‘뭐하는 짓이지?’
‘잠깐만, 급히 확인할 게 있어.’
어제 내내 내 존재를 이상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시키느라 계속 대화를 나누어서 그런가, 카너는 내 독단적인 움직임에 큰 태클은 걸 지 않았다. 물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수준도 아니었지만.
상단은 상단용 입구 쪽에 줄을 서서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상단주인 카너는 당연히 행렬의 선두에 있었다. 나는 앨리스를 찾아 행렬의 중간 부분으로 향했다. 식료품 마차의 짐 일부를 짐꾼들에게 더 나누고, 급조한 우리를 거기에 실어 놓았다. 우리를 덮고 있는 천을 들추니 금색 비늘이 빛에 반짝였다.
“끼악?”
앨리스는 조금 전 카너가 얘기한 대로 말하지 않고 새소리 같은 것을 냈다. 그는 그녀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짐꾼들의 관심을 끌려고 할까봐 걱정했다.
‘……네 말대로 약속은 잘 지키는군.’
“앨리스, 내가 왔으니까 말해도 돼.”
“네, 넷.”
앨리스의 목소리는 아직도 경직되어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데, 밖에서 한참 동안 드래곤의 위대함을 듣고 온지라 더욱 처량해 보였다. 이 정도면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거 아닐까?
“너 몇 살이야?”
“음, 그, 그게…… 잘 모르겠어요.”
어쩐지 그럴 거라 생각은 했다. 여기 오기 전에 던졌던 몇 가지 질문에도 대부분이 ‘모른다.’였으니까. 여기에는 왜 왔냐, 기억하는 게 있냐 등의 질문에 말이다. 그래서 다음 질문에도 긍정적인 답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지.
“좋아, 그럼 네 부모, 엄마나 아빠에 대해서 아는 건 없어?”
“엄마? 아빠?”
“그래, 엄마나 아빠는 어디에 있어?”
앨리스는 마치 인간이 고민할 때처럼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땅을 한 번 쳐다본다. 역시 이번에도 답이 나오긴 글러 보인다.
‘부모? 부모는 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놈이 부모가 어디 있다고.’
‘있어. 있으니까 저런 애도 있는 거지.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뭐? 닭? 달걀?’
카너는 처음 듣는 질문일 것이다. 그의 머리에는 없는 지식이었으니까. 이 세계는 우리 세계로 치면 중세쯤, 혹은 그 이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저 질문 정도는 있겠지만, 공부와는 거리가 먼 용병 출신 상인은 모르는 게 정상인 시대다.
“…모르겠어요.”
“모르면 안 되는데……, 이럴 때는 있다고 봐야 하나? 그럼 얘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건가?”
“네?”
“후우……, 됐어. 너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끼악.”
말 잘 듣는 앨리스의 나무 우리에 천을 덮고는 마차 밖으로 나왔다. 카너는 그제야 답을 도출해냈다.
‘닭이 먼저지!’
그 답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지만, 여기서는 그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넘어가자.
‘그럼 쟤 부모도 있겠지?’
‘……그렇다고 해두지.’
‘그 부모는 얼마나 클까? 쟤는 아직 어린애인데도 너만 한 크기잖아.’
‘식충이가 왜 어린 거지? 저게 다 큰 거 아냐?’
‘최소 50년은 더 자라야 한다고 했잖아?’
‘……거짓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 아니면 네 말대로 어려서 모르는 걸 수도 있고.’
‘드래곤은 거짓말 안 해.’
‘……도대체 그 지식은 어디서 온 거냐?’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했잖아. 다른 세계의 너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모르겠냐.’
결국, 나는 카너에게 내가 알고 있는 한 모든 것을 얘기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이 세계에 파견된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완벽하지 못했고, 카너는 반쯤 수긍했지만,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다. 내가 한 말에 따라 앨리스가 말도 하고, 어쨌든 날기도 하고, 약속도 저렇게 잘 지키고 있음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접근은 없어. 너도 분명 무언가 이득이 있어서 나에게 나타난 거겠지. 그러니 날 호락호락하게 생각하지 마.’
‘알았어. 알았으니까 내 말을 듣고 알아서 판단해. 저 식충이가 50년 정도 자라면 어떻게 되겠어? 대충 집채만 하게는 커지겠지?’
‘그렇다고 해두지.’
‘좋아. 그럼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죽였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
‘화를 내겠지.’
‘마지막으로, 집채만 할 게 분명한 저 식충이의 부모가 화를 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흥, 네 말만 듣고 내 금을 저 식충이에게 바칠 것 같으냐? 그리고 식충이는 모르겠다고 했잖아. 어쨌든 팔면 끝이니까, 나는 모르는 일이야.’
그럴 줄 알았다. 카너가 처한 상황이고, 그의 성격이고 뭐고 다 떠나서 일단 돈이 걸린 문제니 이건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돈을 무척이나 좋아하니까.
어쨌든, 나도 파는 걸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 + +
"그거 들었어? 엊그제 말하는 동물이 백작님 저택에서 나타났다잖아."
"오, 그거 들었어. 도마뱀처럼 생겼는데 덩치가 인간만 하다지?"
"난 다르게 들었는데? 남쪽 보석상에서 나타난 거 아니었어? 루비를 먹어치우는 빨간색 도마뱀이었다는데…….“
“내가 완벽하게 정리해 주지. 남쪽 보석상에 나타난 건 빨간 도마뱀이고, 발견된 건 3일 전이야. 그리고 백작님 저택에서 나타난 건 에메랄드를 먹는 녹색 도마뱀인데, 이틀 전에 발견됐데. 백작님 저택을 경비하는 내 불알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니 정확할 거야.”
"그래? 오, 그럼 좀 더 아는 거 없어? 보석을 그렇게나 먹는다고 들었는데."
"장난 아니래. 줘도 줘도 또 먹는다던데?"
"그렇게 먹어서 감당이 돼?"
“몰라, 백작님 돈 많은 거야 세상이 다 아는 건데, 알아서 잘하시겠지. 보석상 할아범이야 쌓아둔 게 많을 거고. 그 영감도 짠돌이로 소문났잖아?”
"짠돌이 하니까 그 뭐냐, 요즘은 그 짠돌이가 유명하지 않아? 용병 상인 가드너?"
"카너, 카너였을 거야. 그러고 보니 그쪽에도 도마뱀이 나타났다는 것 같던데? 오늘 도착한 상단 짐꾼에게 얼핏 들었어. 도마뱀 때문에 고생했다면서."
"이거 이거, 이상한 일들이 계속 생기는구먼. 망조야, 망조."
"망조면 어때? 그냥 먹고 마시고 그러다가 죽으면 되는 거지."
"그래, 크크크큭, 마시자고! 누구는 에메랄드를 처먹고, 우리는 싸구려 맥주가 다지만, 이게 훨씬 맛있잖아! 건배!"
"건배!"
그렇게 말하는 술꾼들은 옆에 카너가 있을 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짠돌이라고 해도 소문이 날 정도의 상단주이니, 자신들이 오는 싸구려 가게에 올 리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런데 카너는 그 짠돌이라는 이름처럼, 급한 일을 처리하고 물건을 처분한 뒤에 싸구려 주점에서 저녁을 먹으러 와 있었다.
'보석상 할아범도 있었던 건가. 희소성이 더 떨어졌군.'
물건을 처분하면서 백작 저택에 나타난 녹색 도마뱀에 대해서는 들었다. 거대 영지를 경영하는 동시에 큰 상업도시를 통치하는 요제네프 백작은 앨리스를 살 만한 사람 중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카너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희소성이 떨어졌다며 앨리스를 죽이려 했다.
그걸 억지로 막았다. 그래도 금색이 더 폼 나지 않느냐며, 앨리스가 먹은 금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라고 겨우겨우 설득해서 넘어갔다.
그게 바로 전이었는데, 산 넘어 산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는다. 아무리 돈이 썩어나는 사람이라지만, 한 마리 있는데 또 한 마리 살까? 그것도 금을 먹는 식충이를. 나 역시 돈 없는 소시민이라 도저히 부자 처지에서 생각할 수가 없다.
'이제 포기했나? 아니면, 사라진 건가? 도대체 뭐였던 거지? 분노로 잠깐 돌았던 건가.'
가만히 있으니까 이렇게 넘어갈 줄이야. 그동안 내 존재를 이상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게 하려고 노력한 건 다 헛된 거였군. 아니지, 대신 이러면 앨리스를 살릴 수가 없구나.
'좋아, 빌어먹을 식충이는 이 식사가 끝나고 바로 죽인다. 비늘을 벗겨내면 조금이라도 남는 게 있겠지.'
살 만한 사람에게 연락은 넣어뒀으니까 기다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다. 금덩어리를 잃은 분노는 여전히 건재했고, 지금 다시 올라와 카너의 머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이거 어떡하지.
머리를 굴려보자. 카너의 머릿속도 좀 더 뒤져보고. 시간이 없어. 빨리, 빨리.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 말씀 전합니다.
여러분의 댓글에 정말로 기분이 좋네요.
앞으로 논란이 일어나는 내용을 글로 써야 할까 봐요.
그 뭐냐, 이번 편으로 대부분 설명이 됐을 거라 생각하지만, 아직도 해결이 안되는 부분이 있으시면 댓글로 적어주세요. 글이든 리리플이든 답을 해보겠습니다. 잘못된 게 있으면 고치고요!
이번 편도 여러분의 의견 덕분에 많은 수정이 일어났다는 건 안 비밀!
원래는 간단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말이죠.... 아니, 간단히 넘어갔어야 했나.
어쨌든 다음 편에 과거, 해결, 후일담까지 다 집어 넣어 보겠습니다.
댓글과 추천을 기다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