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92화 (92/160)
  • 92화

    "할 수 있는 걸 말해 봐. 그럼 살려 주는 걸 고려해 보지."

    "네? 네?"

    "네가 할 수 있는 거 말해보라고. 금 먹는 거 말고."

    "아, 제가 할 수 있는 거요?"

    최대한 부드럽게 얘기했는데도 이 헤츨링은 어리바리했다. 그러니 카너의 불평에 어떤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이래서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지능도 낮아 보이는 데. 저놈이 처먹은 금의 양은 장난 아니라고.'

    상자를 열고 헤츨링을 꺼낼 때까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카너는 헤츨링이 처먹은 금의 양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 양은 카너가 가진 재산의 10%쯤으로, 이번 상행에 가지고 온 금의 전부였다.

    당연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헤츨링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죽는 건 자명해 보였다. 내가 24시간 7일 내내 카너와 정신력 싸움을 하면서 헤츨링 죽이는 것을 방해하면 혹 질려서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사양이다.

    그러니까 이 식충아, 뭐라도 해 봐.

    "에, 그러니까."

    아직도 멍하니 눈만 굴리고 있는 헤츨링을 보고 있으니 내가 먼저 나서는 게 편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 이름이 뭐야."

    "이름이요? 이름?"

    "그래, 이름은 있을 거 아냐. 너 드래곤이지?"

    "드래곤? 드래곤? 아, 저 드래곤이에요."

    아무래도 헤츨링은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드래곤'이란 단어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날개가 없긴 했지만 그레이의 세계에서도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다. 언어를 초월해 발음이 비슷했다. 여기서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고, 생각은 적중한 모양이다. 헤츨링이 고개를 끄떡 끄덕하는 게 조금 정도는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대신 카너의 의심을 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세계에는 '드래곤'이란 개념이 없다. 심지어 그에게는 내가 막 창조한 걸로 들릴 것이다.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알지?'

    '그것보단 이게 더 중요하잖아? 잃어버린 금을 복구해야지.'

    '좋아. 나중에 보자고.'

    그 나중에는 내가 이 세계에 없을 거야, 분명히. 실패하면 어차피 나중이란 게 없을 테니.

    "드래곤이 이름도 없다고 하는 거짓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너 이름이 뭐야."

    "이름, 이름. 음, 제 이름은 앨리스예요."

    앨리스? 여성체인가? 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어린이 드래곤. 어린애니까 살살 달래는 게 빠르겠지?

    "좋아, 앨리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말해 봐. 불을 뿜는 다던가, 마법을 쓰다던가 하는 거 못해? 드래곤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불? 마법?'

    카너의 의심은 깊어져만 갔지만, 뭐 어떠랴. 중요한 건 앨리스가 반응한다는 거다.

    "아, 불 뿜을 수 있어요. 마법은 아직 못하지만, 나중에는 할 수 있어요."

    "역시. 그럼 불을 한 번 뿜어 볼래?"

    "네!"

    화아악.

    꼬리를 밟힌 채 바닥에 누워 하늘을 향해 숨을 내뱉는 앨리스. 파충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하고 금빛이라 징그럽진 않았다. 오히려 허공에 짧은 손과 발을 휘저으며 두 눈을 감고 입을 쭉 내민 모습이 꽤 귀여웠다. 그래, 귀여웠다. 앨리스가 뿜어낸 불길은 고작해야 1m를 올라가는 게 다였으니까.

    '이걸로 뭘 하겠다는 거지?'

    '……이게 끝이 아닐 거야…….'

    라고 하면서도 자신은 없었다. 조금 전, 카너에 의해 허무하게 마차에서 끌려 나왔던 앨리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만. 불은 됐어. 마법은, 아예 못하는 거야? 작은 거라도 좋아. 할 수 있는 거 있어?"

    "헉헉."

    "마법은?"

    "……헉, 네. 하아, 그게, 물체를 움직일 수 있, 헉, 어요!"

    숨을 헉헉대는 앨리스가 움직일 수 있는 물체도 별것 아닐 게 확실했다. 그래도 시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해 봐. 저쪽에 있는 거 아무거나 움직여 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큰 거로."

    "네, 넷!"

    짐과 마차가 모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물체를 지정하지 않은 건 혹시나 하는 기대에서였다. 마차를 움직일 수도 있지 않은가? 동시에 미리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고작해야 등에 질 봇짐 하나 움직일 수 있다고 하면 진짜 대책이 없으니까.

    "……."

    "……."

    앨리스의 고개는 짐 쪽으로 향해 있었고, 아무 말 없이 한 곳을 주시하는 듯했다. 그러나 기다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짐도 마차도 꿈틀 꿈틀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다른 일행들도 우리 주변을 둘러싼 채 짐 쪽을 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듯 조용했다. 그러다 한 짐꾼이 소리쳤다.

    "앗, 저기!"

    "뭐냐!"

    "넷, 상단주님! 돌멩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

    그 말대로 아무것도 없는 데, 짐이 쌓여 있는 쪽 앞에서 주먹만 한 돌멩이 하나가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다들 신기해하며 작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신기할 거다. 이 세계에는 마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카너의 반응이 절로 예상된다.

    '쓸모가 전혀 없군.'

    '하하하. 아니야, 다른 것도 할 수 있을 거야. 날개를 봐. 날 수 있지 않을까?'

    '흥, 고작해야 내 키 정도겠지. 아니, 그 정도나 날 수 있으면 살리는 걸 고려해 볼 수도 있다.'

    살리겠다는 게 아니라, 그 정도도 못 할 걸 확신하니까 저러는 거다. 카너는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나 역시 그랬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품고 싶었지만, 이건 가망이 없었다.

    "……앨리스."

    "후훅, 네."

    "날아 봐. 도망갈 생각은 말고. 아니,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가 봐라. 대신 날아서 도망가야 할 거야. 걸어서는 도망갈 데가 없으니까."

    꼬리를 밟고 있는 발을 떼니까, 앨리스가 바둥바둥 대면서 겨우 몸을 뒤집었다. 그러면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고개를 푹 숙인다. 주변은 사람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모두가 생전 처음 본 생물을 향해 눈을 반짝이는 아저씨들이었다. 헤츨링 중에도 갓난아기 수준일 게 분명할 앨리스에게는 쉽지 않은 환경일 것이다.

    등위에 고이 접혀 있던 날개가 펴지고, 아래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개는 꽤 컸다. 대략 1m 정도? 약간은 기대가 생겼다. 전체 길이가 그 몸만 하니까, 그래도 제법 날지 않을까. 아예 도망 거리기를 기원했다.

    그런데,

    파닥파닥.

    앨리스 딴에는 죽을 둥 살 둥 움직이는 거겠지만, 아래위로 움직이는 날개는 초당 1회 왕복도 하지 못했다.

    "난다!"

    '그래도 날긴 나는군.'

    말은 그렇게 해도 카너도 다른 일행처럼 신기해하고 있었다. 나도 신기했다. 카너가 예상한 대로 바닥에서 1m 정도 떠오르는 게 고작이었지만, 앨리스는 분명 날고 있었다. 저런 느린 날갯짓으로, 바람도 받지 못하고서 공중에 떠 있었다. 물리 법칙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광경이기에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시 별 쓸모는 없군. 그럼 이제 죽이면 되나?'

    '잠깐, 잠깐, 아직 이야. 드래곤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고?'

    그래, 드래곤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 아직 어리디어린 앨리스에게는 해당이 안 되겠지만……, 쳇, 그게 문제군.

    "내려와, 앨리스."

    "후, 후, 학."

    "나는 거 말고는 뭘 할 수 있지? 변신 같은 건 안 되나? 인간형으로 바꿀 수 있을 텐데?"

    "헉, 변신은, 후우, 하아하아, 아직 못해요. 후우."

    "그럼 언제 할 수 있는데?"

    이 질문엔 제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길 바랐다. 지금이 아니라도 이른 시일 내에 능력이 갖춰진다면 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이 눈치 없는 헤츨링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해주지 않았다.

    "후우……, 한 50년? 아마 그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조금 더 빠르게는 안 돼?"

    "금을 많이 먹으면 될 거예요."

    "……금을 먹어야 하는 거야? 얼마나 먹어야 하는데?"

    "앞으로 50년간 하루에 1kg은 먹어야 하니까, 10년간 한 5kg 정도 먹으면 20년 정도로 줄 순 있을 거 같아요."

    "……."

    '결정이군. 더 볼 것도 없다.'

    스르릉.

    "……."

    "……사, 살려주세요!"

    쇼트 소드가 다시 검집에서 나오자 좌중은 침묵했다. 그 와중에 앨리스의 구슬픈 목소리만 새벽을 깨웠다. 어눌한 발음과 어조였지만, 그 절실함만은 충분히 전해졌다.

    막아야 하는데,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퀘스트 실패인가? 이대로는 방법이 없는데……. 게다가 다시 시작한다고 해서 딱히 방법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밥값을 못하면 죽는 거야. 바로 죽이지 않은 것이 내 최대한의 자비다."

    그 말은 앨리스를 향해 하는 게 아니었다. 듣고 있을 피고용인들을 향해 하는 거였다. 앨리스에게는 그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앨리스는 거의 100kg을 먹어치웠으니까. 그러고도 하루에 5kg씩 10년을 요구하는 앨리스에게 그는 자비를 베풀 생각 따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막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데도 검은 계속 내려가고, 온몸에선 살기가 뿜어졌다.

    '방해해도 소용없어. 저걸 갈아서 내 금을 조금이라도 찾겠다. 저 비늘을 벗겨내면 절반 정도는 건지겠지.'

    '잠깐만, 다시 생각해 봐. 그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상인이잖아? 상인이면 좀 더 이익을 생각해야지. 돈 좀 잃었다고 화만 내면 어떻게 해.'

    '조금? 이게 조금이냐? 그리고 난 충분히 참았어. 그런데 저 빌어먹을 생물이 내게 보여준 재주는 어떤 거였지? 어이, 말 좀 해보라고.'

    '…….‘

    뭘 어떻게 하지?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잠깐, 그래도 신기했잖아? 말도 하고, 날기도 하고, 불도 뿜고, 물건도 움직이고.'

    '그래서 뭐, 서커스라도 열까?'

    ‘그래, 그러…….’

    ‘면 안 될까?’라는 물음보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카너는 상인이니까. 당연히 해야 할 생각을 왜 못했지?

    ‘아니, 팔자. 상인이잖아? 희귀한 걸 보면 팔 생각을 해야지. 어차피 쟤 죽인다고 금을 찾을 수 있는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잖아? 그건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해야 하면서.’

    카너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부인하지만, 상인으로서 그가 가진 감각은 그렇게 말하는 중이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어디서 사기를! 금은 저 안에 있을 거야! 그보다 저런 식충이를 누가 사간다고? 조금 신기하긴 해도 하루 1kg씩 50년이나 먹여야 한다고 하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거다.‘

    '사기라도 쳐. 강물도 퍼다 팔면 이익이 남는데, 그런 것도 못하면서 무슨 상인이야. 돈 많은 놈은 말만 잘하면 비싼 값에 살 거야. 적어도 저 녀석이 먹은 금 정도는 되찾겠지.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놈인데.‘

    지금도 검은 내려가는 중이었기에,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막 카너에게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넘어오고 있었다.

    '하긴 돈 많은 놈은 이상한 데 돈을 쓰지. 썩어 나니까. 나라면 어림도 없는 소리야.'

    '그래, 너 같은 짠돌이야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돈이 썩어 나는 놈들은 쓸 데가 없어서 걱정이라니까. 저런 걸 갖다 주면 좋다고 살 거야. 상인이라면 물주의 처지에서 생각해야지. 네 입장은 좀 버려. 저건 분명히 상품성이 있다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분명히 그래. 저기 쟤들 봐. 눈을 못 떼잖아. 이건 분명히 돈이 될 거야. 쟤를 죽인다고 이미 사라진 돈이 돌아오는 게 아니니까, 이왕이면 팔자. 팔면 조금이라도 돈이 될 거야.'

    '…….‘

    계속 앨리스의 눈을 향하고 있던 고개가 올라가 주변을 둘러싼 인원을 본다. 다들 숨죽이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금빛이 번쩍번쩍하고 귀엽게 생겼잖아? 행운의 상징이라든지, 부를 기원하는 동물이라든지 하면서 팔면 껌뻑껌뻑 넘어갈 거야.'

    '……그럼 팔 때까지는 뭘 먹이지? 저 식충이에게는 더는 어떤 것도 주고 싶지 않은데.'

    넘어왔다!

    그냥 되는 대로 내뱉었는데, 어떻게 설득이 되긴 된 모양이다. 나 천재인가……는 오버고, 사실 상인이니 파는 거부터 생각하는 게 먼저였으니, 바보에 가깝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내가 언제 이런 걸 해봤겠냐고.

    '그거야 물어보면 되지.'

    ‘물어?’

    "앨리스."

    "네, 살려주세요.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살려 주세요."

    "너, 금 안 먹고 얼마나 살 수 있어?"

    "네? 금 안 먹고요? 금 안 먹으면 1주일 안에 죽는데……."

    이 도마뱀 새끼는 끝까지 도움을 안 준다. 나조차도 짜증이 나서 째려보니까, 앨리스가 급하게 말을 바꿨다.

    "……아니, 아니에요. 이번에 많이 먹었으니까, 1년은 버틸 거예요. 아니, 버틸 수 있어요!"

    '이 정도면 되겠지?'

    '……좋아, 도시는 반나절만 더 가면 도착하니까 살 사람을 찾아보지.'

    다행이긴 한데, 고작해야 반나절 가지고 금을 먹이니 안 먹이니 했던 거냐! 체, 그쪽부터 기억을 더듬었어야 했어.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하하하 저는 한다면 하는 사람인 겁니다!

    이번 주엔 꼭 100회 간다!

    댓글과 추천과 독촉을 주세요!

    읽어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여러분은 정말로 복받으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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