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하늘에 별빛이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새벽인 모양이다. 그림 같은 하늘이라 감상하는 맛이 있을 것 같았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메시지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받으세요! 100개의 퀘스트를 깰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시작’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열 번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하늘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늘 하듯이 시작이라고 말하려고 생각하는 순간, 입이 내 감각 안으로 들어오며 움직였다.
“시작.”
새벽의 찬 공기가 얼굴 피부를 먼저 깨웠다. 등에서도 한기가 올라왔다. 이어 몸 곳곳에서 통증이 이어졌다. 편한 잠자리는 아닌 모양이다. 이 몸의 주인은 그것 때문에 깬 걸까?
“으으.”
오른쪽에 누운 사람은 모포를 얼굴까지 끌어올리며 몸을 새우처럼 말았다. 왼쪽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정이 비슷한 듯했다. 원래라면 발아래 쪽에서 따뜻함이 느껴져야 할 텐데, 그게 이 사태의 원인인 듯했다.
‘불침번이 코리였던가?’
이 몸의 주인, 카너(Connor)의 생각이었다. 그걸 읽자마자 곧장 몸의 주도권을 넘겼다. 분초를 다투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으니, 카너의 행동을 보면서 정보를 얻을 생각이었다. 싸우는 퀘스트일 수도 있지만, ‘고백하라’는 퀘스트처럼 카너의 행동을 바꿔야 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럴 때는 내가 몸을 움직여봐야 별로 도움이 되는 게 없다. 조용히 있다가 필요한 순간에 나가는 게 낫겠지.
카너는 몸을 넘겨받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하고 일어났다. 조금만 몸을 넘겨주는 게 늦었으면 들킬 뻔했다. 내가 들어온 시점이 그가 막 깨어난 순간인 것 같았는데, 이렇게나 빨리 일어나다니, 기계적인 기상이다. 눈을 뜨고도 한참이나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일상인 나와 같은 영혼을 공유하는 존재라는 게 조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침을 굶겨야겠군.’
그의 눈은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남자를 보고 있었다. 모포로 온몸을 두른 채 모닥불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코리는 처음부터 불침번을 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건 아예 자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자세다. 뭔가 나타났을 때 움직이기에도 불편해 보이고.
카너는 한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포를 한 번에 걷어 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코리를 발로 차 버렸다.
“흐억. 누구……, 헉, 상단주님!”
“불 다시 지펴. 그리고 아침은 먹지 마라.”
“네, 넷! 알겠습니다!”
“조용히 해. 너 때문에 다른 애들 깨면 점심도 굶긴다.”
“옛……. 알겠습니다.”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꾹 닫은 코리. 가벼운 무장을 한 그는 상단을 지키는 용병이었고, 카너는 그를 고용하고 있는 고용주였다. 그는 재빠르게 꺼진 모닥불로 다가갔다.
‘싼 놈들은 싼 놈들일 수밖에 없는가.’
카너는 불에 먼저 다가가는 코리의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럴 때는 먼저 짐마차로 가서 짐이 무사한지를 확인하라고 몇 번이나 가르쳤는데, 여전히 불 피우는 게 먼저였다. 그는 한마디 할까 하다가 참았다. 말해봐야 안 될 게 뻔했고, 그런 세심함까지 고려했다면 더 높은 등급의 용병을 고용했어야 한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적은 돈으로 대박을 터트리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야. 역시 돈 벌려면 몸이 고생해야지.’
카너의 상단은 컸다. 짐이 잔뜩 든 마차만 10개였고, 그밖에 짐꾼만 20명이 더 있었다.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들까지 포함하면 총인원 100명이 넘어가는 큰 일행이었다. 그런 만큼 일행은 세 무리로 나뉘어 자고 있었고, 짐마차를 포함 짐은 그 세 무리의 가운데에 있었다. 그는 그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짐마차 쪽으로 움직였다. 다른 쪽 불침번인 루번과 조얼을 확인하고, 짐이 무사한지도 확인할 생각이었다.
“카너 상단주님. 이쪽은 이상 없었습니다.”
“……흐억, 상, 상단주님!”
루번은 깨어 있었고, 조얼은 자고 있었다. 카너는 양쪽 다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깨어 있는 루번은 왜 다른 쪽의 꺼진 불을 보지 못했냐는 것에서 불만이 있었고, 조얼은 잔 것부터 이미 점수를 잃었다. 그는 다음 상행에서 이들을 다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돈을 아낀 게 아닌가 하고 자책하면서.
‘짐은 이상이 없겠지? 겉보기에는 침입의 흔적이 없었는데.’
한 바퀴 돌면서 훑어 본 걸로 부족했는지, 그는 짐마차 하나하나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식료품이 든 마차는 이상이 없었다. 상행을 처음 시작한 상태와 그대로였다. 그는 안심하며 이어 금으로 된 장신구가 들어있는 마차를 열었다. 문제는 거기에서 발생했다.
카직, 카직.
‘이 소리는 뭐지?’
소리는 특수 제작된 큰 철제 상자 안에서 나고 있었다. 주먹만 한 쇠 자물쇠의 열쇠는 당연히 카너만 지니고 있었고, 철로 된 벽을 뚫고 들어갈 놈도 없으니 안에서는 소리가 날 수가 없어야 했다. 그런데 작은 금속음이 철 상자를 뚫고 그의 귀에 들렸다.
그는 무엇보다 안에 있는 물품의 상태를 걱정하며 자물쇠를 열었다. 피고용인들이 혹 귀중품을 훔치거나 숨기지 않을까 하고 마련한 이 상자를 통째로 빼앗기는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했었지만, 그도 이런 경우는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아무런 상처가 없는 철제 상자 안에서 소리가 나다니? 검과 마법이 없는 이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퀘스트의 목표는 아마도 저 상자 안에 있는 것과 관련된 물품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빠르게 카너의 머리를 검색해 본 결과, 특이한 물품은 없었는데, 대체 뭘까?
끼이익.
항상 굳게 닫혀 있어 부드러울 리 없는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상자의 내부를 드러내었다. 여명은 마차 안을 넘어 그 안에 있는 상자의 속도 어느 정도 비추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가 대충 보였다.
“카직, 카…….”
그리고 그건 안에 있는 생물도 마찬가지였다. 금덩어리를 막 씹으려던 생물이 움직임을 멈추고 카너를 쳐다보았다.
철제 상자는 한 변 2m 길이의 직육면체 형태로, 그 안에는 금을 비롯한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안은 몹시 어질러졌고, 상자를 채우고 있는 건 파충류계열의 생명체였다. 조금 다르긴 했다. 일단 상자 크기 정도의 파충류는 그 세계에 없었다. 거기에 비늘이 크고, 머리에는 뿔이 나 있었고, 박쥐 날개처럼 생긴 게 등에 접혀 있었다.
드래곤.
그레이와 맞선 드래곤과 비교하면 정말 작은 크기였지만, 그 형태는 드래곤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금덩어리를 씹고 있다는 것도 그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마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드래곤도 없었다. 심지어 드래곤에 대한 설화 같은 것도 없었다. 즉, 카너가 보기에 저 작은 드래곤은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생명체였다. 그의 소중한 물품을 먹고 있는 이상한 생명체에 불과했다.
“넌 뭐냐!”
“끼아악!”
카너는 거의 자기만한 크기의 작은 드래곤, 헤츨링을 상자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잘 나가던 용병 출신인 그의 힘으로도 조금 버겁긴 했지만, 분노의 힘으로 헤츨링을 마차 밖으로 꺼냈다.
헤츨링은 안 끌려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아직 어려서 그런지 저항하지 못했다. 마차를 덮은 두꺼운 천을 찢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내 마차를! 네 놈! 그냥 죽어라!”
“카아악!”
카너는 헤츨링을 땅바닥에 내팽개쳐 버리고는 허리춤에서 쇼트 소드를 꺼냈다. 그는 분노로 타올랐다. 마차 안에서 바로 죽이지 않은 건 남은 상품에 피가 안 튀기기 위해서였는데, 그새를 못 참고 저 빌어먹을 생물은 마차를 찢어 버린 것이다.
‘피 같은 금을 처먹은 것도 모자라 피부와 같은 마차를 찢어 버리다니.’
“네 몸을 해체해서 금덩어리를 꺼내주마!”
그는 시간만 된다면 그의 원래 무장인 대검을 가져와 한 번에 동강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금이 녹을 수도 있으니 지체할 수 없었다. 그의 상식에 금을 먹는 생물이라는 항목은 없었지만, 눈으로 봤으니 부정하기보다는 움직이는 게 먼저였다. 그에게 돈과 관련된 일은 무조건 급한 일이었으니까.
“끼아악!”
주먹만 한 눈동자가 이후의 일을 짐작이라도 한 듯이 떨었다. 도마뱀처럼 세로로 긴 검은 동공이 더 길어졌다. 새벽빛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금색 비늘이 애처로웠다. 도망갈 생각도 못 하는 듯했다. 힘도 없고, 진짜 어린 드래곤인 모양이다.
카너의 검은 이제 막 헤츨링의 눈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보고 있어야 하는 건가하고 있는데, 눈앞에 퀘스트 메시지가 떴다.
[열 번째 퀘스트, 최초의 드래곤 슬레이어, 인류 멸망의 원인, 카너가 골드 드래곤 헤츨링을 죽이는 걸 막으세요!]
‘잠…….’
“죽……깐!”
‘……어!’
“끼악!”
검은 바로 눈앞에서 멈췄다. 1cm만 더 갔으면 눈을 뚫고 들어갔을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팔은 부들부들 떨면서 조금씩 전진하려 하고 있었다. 분노에 가득 찬 카너의 의지가 아직도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멈춰! 멈추라고! 죽이면 안 된다고!’
‘죽어! 뭐야, 왜 몸이 안 움직여! 죽어! 내 금을 먹은 놈은 죽어야 해!’
‘잠깐만! 좀 멈추라고!’
‘……넌 뭐냐.
머릿속으로도, 몸으로도 한참 승강이를 벌이고 나서야 카너는 이성을 차리고 나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제야 헤츨링의 눈앞에서 흔들리던 검을 땠다. 헤츨링은 그걸 보고서 도망치려 했는데, 카너가 발을 움직이더니 꼬리를 발로 콱 밟아 버렸다.
“카악!”
요즘은 왜 다들 정신력이 높은 건지. 나 역시 쳐다보는 헤츨링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건 괴로웠다. 그건 카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넌 뭐냐.’
‘너야.’
‘누구냐, 난 너 같은 놈을 키운 적이 없다.’
‘그게, 너라니까?’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는 늘 난감하다. 사실을 이야기하기엔 나조차도 진실을 모르니까. 하지만 대충 넘어갈 수는 있다. 카너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인지하고 있으니까, 우기면 별 수 없는 것이다.
‘너 옛날에 엘리를 좋아했지?’
‘그걸 어떻게?’
‘나는 너라니까.’
‘그럼…….’
카너도 내가 몇 번이나 그의 기억을 정확하게 맞추고, 생각을 읽어 버리니까 일단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계속 의문을 가지긴 했지만.
‘그래서, 내가 왜 나온 거지?’
‘저 생물은 죽이면 안 돼.’
‘왜?’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헤츨링은 꼬리를 빼내려고 쭉 용을 쓰다가 이젠 포기하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공이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 외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드래곤의 표정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아직도 한 손에 들고 있는 금덩어리였다.
‘저 식충이가 어디에 쓸모가 있지?’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미친 건가? 동물이 무슨 말을 한다고.’
“어이, 너 말해 봐. 말 할 줄 알지?”
아무리 봐도 드래곤이고, 퀘스트도 드래곤이라고 했으니 말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럼 지금까지 ‘살려주세요.’ 정도는 했을 테니 아닐 수도 있지만, 그건 정신이 없어서라고 믿고 싶다.
“끼아악!”
‘봐, 무슨 말을…….’
“뭐라고 말 좀 해봐. 안 죽일 테니까 진정 좀 하고.”
“끼, 끽, 끅, 살, 살려 주세요!”
다행히 헤츨링은 말을 했다. 발음은 새고, 외국어를 처음 배운 듯한 딱딱한 어투였다.
‘…신기하긴 한데, 그게 어때서.’
‘일단 이야기를 좀 들어 보면 안 될까?’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랜만입니다.
지지난주(벌써 지지난주....ㅠㅠ) 주말에는 집안일과 결혼식으로 바빴고, 이동 중에 감기가 도져 지난주에는 감기로 다시 고생을 했습니다.
더불어 뱀파이어들의 왕 이북화 관계로 이것저것 해야할 일도 있었구요.
.......으하하하, 뭐 그렇다고요.
이젠 독자님들도 꽤 익숙하신지 선작수가 의외로 안 줄었더군요...... 그런데 오늘 글 쓰면 또 떨어질 거라는 게 함정. 크하하핫.
이번 주 내, 정확하게는 1월 안에 100회 돌파하는 게 목표입니다.
1부를 마무리하는 것도 목표구요.
댓글과 추천과 독촉만이 작가를 움직이게 합니다.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