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90화 (90/160)
  • 90화

    <카너>

    눈을 뜨고 나서 가장 먼저 한 건 역시나 새로운 능력을 점검하는 거였다.

    [분심 lv.0]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언제나처럼 필요치 않았다. 그저 하기로 마음먹기만 하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떤 과정이 저 혼자 척척 진행돼서 결과물로 나타났다.

    ‘오오?’

    ‘오오?’

    나는 둘로 나뉘었다. 퀘스트 속에서 경험하는 것과 비슷했다. ‘한쪽의 나’는 몸의 통제권을 차지했을 때처럼 마음껏 몸을 움직였고, ‘다른 쪽의 나’는 몸의 통제권을 내줬을 때처럼 감각을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생각했다.

    그건 두 가지의 생각을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것과는 달랐다. 생각의 전환이 백만 분의 1초 정도로 빨라서 두 가지 생각을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게 아니었다. 분명히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하는 거였다.

    신기한 마음에 이것저것을 시험해 보았다. 그 결과 여러 가지를 알아냈다.

    몸을 움직이고 있는 마음을 ‘가’, 감각을 받아들이고 생각만 가능한 마음을 ‘나’라고 하자.

    1. ‘가’와 ‘나’의 생각은 공유된다. 약간의 시차는 존재한다.

    2. ‘가’와 ‘나’의 위치를 바꾸는 건 언제나 가능하다.

    3. ‘나’에 전해지는 육체적 감각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는 것은 가능하나, 완전히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

    4. ‘나’가 ‘가’로부터 거리를 둘 때, 생각과 감정의 공유 역시 잘되지 않으나, 3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5. ‘나’는 감각을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거 외에 현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렇게 5가지를 대충 정리하고 나자, 분심이 풀려 버렸다. 한 10분? 현재의 레벨에서는 그게 한계인 듯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머리가 살짝 아팠다. 몸은 가벼운데, 잠이 온다고 해야 하나?

    예상보다 정신력 소모가 훨씬 심했다. 레벨이 올라가거나 정신력이 강해질수록 늘어나기야 하겠지만, 계속 유지하는 건 꿈도 못 꿀 수준이었다. 24시간 내내 분심을 쓰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던 해리의 정신력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였을까? 새삼 해리가 먼치킨임이 다가왔다.

    그것 말고도 해리에게는 가능했지만, 나에게는 불가능한 게 더 있었다.

    바로 5번.

    해리는 몸을 움직이고, 미친 해리는 주술을 쓰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안 됐다. 몸을 움직이며 헬파이어를 쓰고 싶었는데, 헬파이어 주문을 외우기만 할 뿐, 그 어떤 전조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대충 짐작했다.

    해리의 세계에도 기와 마나는 없었지만, 이곳과는 다르게 주술력이라는 게 있었다. 그 힘은 육체와 관련되어 있긴 했지만, 육체와는 다른 종류의 힘이었고, 구별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해리가 육체를 움직이는 동안, 미친 해리는 주술력을 움직여 주술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그런 힘이 없다. 힐도, 헬파이어도 어떤 이능이 없어 다 체력을 기반으로 펼친다. 그리고 체력은 말할 필요도 없이 육체에 관련된 힘이다. 육체를 움직일 수 없는 마음이 쓸 힘이 아닌 게 당연하다.

    그러니 분심을 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거다. 헬 파이어를 발현할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니까.

    물론 이 기술의 효용이 없는 건 아니다. 능력 설명엔 레벨이 올라가면 육체의 통제도 나눌 수 있다고 나와 있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헬 파이어도 쓸 수 있겠지. 힐도 쓸 수 있을 거고.

    그리고,

    [분심 lv.1 30.498%]

    저 레벨 버프인지, 퀘스트 경험으로 익숙해진 탓인지 모르겠지만, 빨리 오르니까 곧 헬 파이어도 쓸 수 있을 거다. 그럼 진지하게 마검사를 생각해 봐야 하나. 라이트닝 소드만 집중하려고 했는데…….

    + + +

    2월.

    어느새 2월이 되었다. 9월부터 시작한 퀘스트도 이제 6개월 차. 만으로 5개월이나 지났다. 그동안의 내 삶은 약간 붕 떠 있었다. 현실감이 살짝 사라졌단 표현이 비슷할 것 같다.

    원래 좀 그런 면이 있긴 했다. 학교와 카페를 오가는 삶은 무료했고, 낙이라고는 게임밖에 없었으니까. 그냥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 외엔 별다른 게 없어 보였고, 그래서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잠만 자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아프고 슬플 때도 있지만, 그만큼 신선하고 흥미로운 세계. 감정 표현을 한 기억을 떠올리는 데 한참이 걸리는 현실과 달리, 순간순간 울고 웃으며 감정에 충실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세계. 그 세계에서 말도 타고, 죽어도 보고, 오크도 잡고 군대도 지휘했다.

    현실이 점점 현실 같지 않아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저쪽이 재밌으니 현실에 돌아와서도 저쪽 생각만 했다. 거기에 모든 정신 에너지를 저쪽 세계에 쏟고 나면, 현실에선 멍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으니까.

    유일하게 말똥말똥하게 있는 시간이 예지를 만날 때인데, 사실은 그것도 현실을 붕 뜨게 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모태솔로였던 세월이 더 긴 나다. 여자 친구가 있는 현실이 아직 현실보다는 꿈에 가까웠다. 그것도 썸을 타기 시작한 게 하필이면 9월부터다. 공교롭게도 퀘스트를 시작하던 시기와 맞물려서, 의식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이 모든 게 꿈은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심이 부족한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이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지만, 의지가 확실히 부족했다. 내 눈앞에서 갑자기 건물이 무너지면 이러진 않을 텐데, 아직은 먼 나라의 일이라고만 느껴졌다.

    실제로 내가 당장에라도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퀘스트가 끝나고 다시 퀘스트가 시작되는 날에는 조금 맑은 정신으로 사람을 대하고, 현실에서 보이는 퀘스트의 흔적들에도 좀 집중했는데, 오늘은 그것조차도 잘 안 된다. 테이블 건너 예지를 눈앞에 두고도, 머릿속이 멍하다.

    예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는 게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한쪽에서는 그걸 모니터로 보듯이 보고 있다. 분심을 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손이 모니터를 뚫고 나와 내 머리를 때리는 것만 같아 진짜로 깜짝 놀랐다. 힘을 주어 때린 것도 아니었는데.

    “헉!”

    “그러니까 제 앞에…… 어? 오빠! 왜 그래요? 많이 아파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녀는 나보다 더 놀랐다. 동그랗게 뜬 두 눈은 내가 놀리는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혹시 그걸 알고서 한술 더 뜨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녀의 두 눈엔 진심이 담겨 있다. 나는 알 수 있다. 그건 그녀도 그렇겠지. 내 반응을 언제나 귀신같이 잡아내는 무서운 연인이니까.

    그런데 한쪽에서는 그녀의 모습을 또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 마치 나와는 상관없다는 것처럼. 이런 반응이 어디서 나오는 건 줄은 알겠다. 퀘스트 내에서 ‘평행 세계의 나’에게 동화되지 않기 위해 경계하는 게 몸에, 정확하게는 정신에 익숙해져서 이러는 거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익힌 건데 오히려 이럴 때 방해가 될 줄이야.

    “오빠,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요즘 계속 멍하니만 있고……, 그중에서도 오늘은 진짜…….”

    그러게, 오늘은 진짜 왜 이럴까. 오늘은 오랜만에 퀘스트가 끝난 날이라 예지에게 더 집중하려고 했는데…….

    헉, 또 멍하니 있었던 건가? 불현듯 걱정 가득한 그녀의 두 눈이 머릿속을 채운다. 객관적으로 보면 흔히 사슴 눈망울이라는 건데, 내가 보기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이다.

    “……오빠?”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조금 피곤해서 그래. 걱정할 것 없어. 그러니까 안심해. 울 것처럼 있지 말고.”

    컵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을 잡으니 그녀가 두 눈을 감고 길게 심호흡을 한다. 진짜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상황이었나 보다. 미안하다.

    “후우……. 그걸 아는 걸 보니 우리 오빠 맞는데, 진짜, 요즘 오빠 너무한 거 알죠? 밤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예요? 낮에는 기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만 있고. 나 몰래 클럽 같은 데 다니는 거예요? 설마?”

    더 미안하다.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 아래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진짜, 내가 나쁜 놈이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럴 리가. 아니야. 내가 너를 두고 어디를 가겠니. 너도 알잖아?”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피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진실밖에 방법이 없다. 꾸밀 필요도 없다. 예지말고 어디 갈 데도 없는 게 진실이니까. 내 반응을 귀신같이 집어내는 무서운 연인이라며 진심을 알아줄 것이다.

    “……그럼, 도대체 뭘 그렇게 하는 건데요?”

    “게임.”

    “무슨 게임요?”

    어떻게 넘어가야 할 것인가. 게임이라는 것까지는 넘어갔다. 퀘스트는 부분적으로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내 말에 진실이 담긴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은 방법이 없다. 그녀의 손은 내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껴오고 있지만, 그 눈은 여전히 추궁하는 태세다.

    윽, 일단 반복하며 좀 시간을 끌자.

    “무슨 게임?”

    “네, 무슨 게임을 밤마다 하시는데, 이렇게 손에 식은땀이 나시는 걸까요?”

    어떻게 그런 것까지 잡아내냐.

    “식은땀은 무슨, 내 손에 땀 많은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거랑 이거랑은 달라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성분 분석이라도 해?”

    “눈에 다 보이니까 발뺌할 생각 마요. 저한테 숨기는 거 있죠?”

    이쯤 되니까 살짝 무섭다.

    “너 같이 살게 되면 내 머리 위에서 노는 거 아냐?”

    “당연하……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무심코 나온 진심을 들켜서 아니, 그보다는 ‘같이 산다.’라는 말에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한 번씩 그 이야기가 나올 때와 반응이 비슷했다. 이젠 익숙할 때도 됐지만, 아직도 부끄러워하는 부분이 있다. 나와 진심으로 같이 살 생각을 해서 저러는 거겠지. 나도 그런 상상을 해보긴 하지만, 퀘스트 때문에 구체적일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게 분명하다. 이쯤 되면 망상 벽이라고 해야 할지도.

    그리고 이건 넘어가면 안 될 시점이다.

    “아니, 그 전에 ‘당연하다.’라고 하려고 그랬지? 진짜야? 내 머리 위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셈이었구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실망이야. 예지야. 우리 관계가 언제부터 그렇게 수직적이 된 거니? 오빠는 널 항상 존중했는데, 너는 날 가지고 논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니에요.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럼 뭐가 당연한 건데? 내 머리 위에서 노는 거라면 그런 거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는데?”

    “그, 그게…….”

    그녀의 얼굴이 좀 전보다 더 붉어진다. 완전히 새빨개졌다. 그 얼굴을 보니 나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예지야,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니?

    “그게?”

    “……말할 수 없어요. 아무리 오빠라도 말할 수 없는 건 말할 수 없어요. 이 이야긴 이제 그만, 이제 그만!”

    한 번 소리를 꽥 지르고는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귀엽긴 한데, 진짜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참자. 더 건드리면 나도 무언가 뱉어내야 할 게 뻔하니까.

    그런데 진짜 뭘까? 아무래도 야한 게 아닐까 싶은데…… 예지는 은근히 밝히니까.

    아무튼, 열 번째 퀘스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빨리 끝내야겠다. 퀘스트가 짧으면 이런 현상도 그나마 좀 괜찮겠지.

    제발, 그렇게 하고 싶다.

    ============================ 작품 후기 ============================

    그래서 열 번째 퀘스트는 짧습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분심에 대해 설명할 때 '마음'이라는 단어 대신 '인격'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만, 그렇게 쓰면 너무 다중 인격 같아서..... 좀 헷갈리시겠지만, 실제 상황에서야 그리 신경쓰일 게 없을 테니까 조금만 넘어가 주세요ㅎㅎㅎ댓글과 추천을 기다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니트로서 인겨부여는 이중인격 같은 게 별도로 있어야 합니다.

    @sonage 병사를 조종하는 술법은 기초 주술입니다. 원래는 인형 정도를 움직이는 주술인데, 해리의 정신력이 크고 술법의 숙련도가 높아서 병사를 조종할 수 있는 겁니다. 숙련도는 미친 해리가 나올 때마다 올라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미친 해리가 전면에 나와서 움직일 때도 있지만, 주술로 자신의 몸을 스스로 조종하는 괴랄한 방식으로 싸웠기 때문에 조금 더 빠르고, 강하고, 무식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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