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88화 (88/160)

88화

“꺄아아악!”

“뭐하나 경비병! 저놈들을 막아!”

“닥치는 대로 죽여! 우리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는 걸 보여주자고! 우리가 지렁이보다 못한 게 뭐냐!”

귀빈석은 혼란스러운 듯했다. 등지고 있어 귀로밖에 들을 수 없지만.

“크와앙!”

“으윽, 내가 딜런을…….”

해리는 일단 딜런의 공격을 피하는 것에 성공했다. 아직 공격할 의사는 없어 보이지만, 내가 몸을 움직일 때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다.

[발견했다. 강민]

[응? 뭘?]

[대기실 복도 근처에 주술사로 보이는 인물과 자크를 비롯한 경호원들이 있는 게 보인다.]

[어, 어떻게 안 거야?]

[불의 의지를 통해 관찰했다. 정령으로 구체화하지 않는다 해도, 불의 의지가 없는 세계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혼자 알아서 정찰했단 말인가? 그녀와 내 생각은 일부 공유되는 바가 있으니, 내게 필요한 걸 알고 실행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이렇게 겪는 바는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다.

[잘했어! 이프리타!]

[……별거 아니다. 저들을 처리하면 되겠나?]

[그럼 좋지. 불의 의지로 처리할 수 있는 거야?]

[그건 어렵다. 처리하려면 ‘불의 검’을 취소하고 내가 직접 가야 한다. 그래도 되겠는가?]

아……. 그러고 보니 불의 검을 쓰려면 그녀의 시야 내에 내가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녀가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 되면 공격력이 급격하게 감소한다. 그러나 지금은 상관없다. 되살아난 딜런의 피부는 인간보다 두꺼워 ‘불의 검’이 아닌 공격은 잘 안 통하겠지만, 어차피 해리는 아직 공격할 의사가 없어 보이니까. 그보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불사는 일단 깨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가! 빨리 그놈들을 불태워 버려!]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검에 맺혀 있던 은은한 빛이 사라졌다. 딜런이 그걸 파악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공격이 더 거세지겠지만, 아직은 모르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검에는 안 닿으려 했다. 그가 파악하기 전에 이프리타가 주술사를 죽여야 할 텐데…… 가능할까?

“이 바보 같은 것들! 이쪽이 우선이다! 왕자님을 모셔라!”

“왕자를 잡아라!”

귀빈석엔 왕자가 있는 모양이다.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혼란은 이미 관중석까지 번져 있었다. 도망치는 무리는 없었지만, 지금 다들 웅성거리며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시합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와앙!”

“딜런…….”

하지만 해리에게는 이 시합이 가장 중요했다. 되살아난 딜런은 그에게 자신을 죽일 수 있느냐고 묻고 있었고, 그는 그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다. 4년 전에는 회피했던 질문에 말이다.

‘내가 딜런을 죽인 건가?’

마음속으로 내뱉는 그의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 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군…….’

해리는 침착하게 딜런의 공격을 피해가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딜런과 있었던 일들, 그리고 딜런과 했던 마지막 시합의 기억을.

‘좋아, 그럼 오늘은 네 돈으로 한턱 얻어먹어 볼까?’

‘빨리 일어나! 안 그러면 싱겁게 죽어 버릴 테니까!’

‘자, 이번엔 오른쪽이다!’

‘으아아아!’

미친 해리가 해리 대신에 딜런의 온몸을 난도질하는 장면도 해리의 머릿속에 생생히 재생되었다. 미친 해리의 탄생은 내가 봐도 끔찍한 기억이다. 해리도 움찔했다. 그 탓에 딜런의 공격이 그의 볼을 스쳤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감각이 해리를 깨운다.

다시 기억이 이어진다.

자신의 연인을 찌르고 덜덜 떨고 있던 검투사의 얼굴, 이기고도 울던 얼굴이 스쳐 간다.

‘예정된 일이야.’

시합이 결정되던 날, 딜런이 한 말을 이제는 해리도 이해할 수 있었다. 친구를 베고, 연인을 베고, 가족을 베고, 자신까지 베는 것, 검투사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딜런을 죽인 뒤 4년, 해리는 많은 사람을 보았고, 또 베었다. 경험은 그를 바꾸었다. 소년에서 검투사로. 그는 딜런의 아래에서 벗어나 진짜 검투사가 되었다.

후웅.

되살아난 딜런의 공격은 여전히 매섭다. 바람 소리만으로도 중상을 입힐 것 같다. 해리는 그 살인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다. 모래와 땀이 그들 사이를 수놓는다. 그 사이에서 그는 딜런의 빈틈을 본다. 그러나 아직은 찌를 수 없다.

‘꿈은 무슨……, 아니, 꿈이다. 너는 자유로워지도록 해.’

레베카 백작은 해리를 검투사가 아니라 인간으로 대해줬다. 경기장에서 피와 모래로만 존재가치가 증명되는 생명체가 아닌, 꿈을 꾸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 그러나 그는 그 의미를 정확히 몰랐다. 그저 그녀가 원하는 일을 이뤄주고 싶은 마음에 움직일 뿐.

“크와앙!”

한 번의 공방이 더 오가고, 그의 눈이 다시 딜런의 빈틈을 본다.

‘살아라, 너는 살아. 이 앞에 뭐가 있을지는 나도 모르지만, 어쨌든 살아. 정 미안하면 내 몫까지 즐겁게 살던가. ……즐거웠다…….’

딜런이 죽어가며 말한 건 무엇이었을까. 그건 그냥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 정도의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해리는 그 말에서 ‘자유’를 본다. 전쟁터를 떠돌다가 노예가 되어 자유를 잃어버린 딜런이 꿨던 마지막 꿈은 아닐까 생각한다.

해리에게 죽은 검투사의 마지막 말도 떠오른다. 그 말이 귀빈석의 소란과 겹친다.

‘부탁한다……, 너, 너는 이기길……, 크흑.’

“조금만 더 힘을 내! 왕자를 잡으면 일단 쉴 수 있어!”

“으아악!”

“막아, 막아! 막으라고! 기사 놈들은 다 어디 간 거야!”

해리도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긴 했다. 그는 그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검투사의 리더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의 싸움은 검투사의 숙원에 도전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요즘은 매일 귀부인과 다른 곳에서 잠을 자 숙소에 가지 못했지만, 숙소에서 그는 왕이자 최후의 희망으로 대접받았다. 그것도 다른 이들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지금 귀빈석에서 반란인지 마지막 발악인지 모르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도 해리 때문일 것이다. 강령술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사전에 우연히 알게 되고, 그들에게 약속된 ‘자유’라는 게 존재하지 않음을 눈으로 보았기에 저렇게 뛰쳐나온 게 아닐까? 최후의 희망인 해리가 무너져 버릴 게 뻔히 보이니까.

“해리! 너도 어서 올라와! 의미 없는 싸움에 매달리지 말고!”

그러니 해리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니까.

[처리했다. 강민! 다시 불의 검이다!]

“크오옹.”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갑자기 멈춰 버린 딜런, 그 뒤 창살 너머 대기실에서 긴 붉은 머리를 드러낸 이프리타가 보인다. 검에 다시 주황빛이 맺힌다.

‘지금이야!’

내가 해리의 마음에 대고 외치기 전에 그의 검이 움직였다. 검은 곧바로 날아가 그 목을 노린다.

푸우욱.

검이 되살아난 딜런의 목을 찢어발겼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참격이었다.

검투사의 희망.

레베카 백작의 꿈.

딜런의 소망.

어느 것이 우선인지는 모르나, 그건 예전에 그가 했거나 다른 검투사가 한 것처럼 검투사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확실한 그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딜런, 아니 계속 되살아나는 망령을 죽이기로 선택했고, 한 칼에 베어 버렸다.

‘나는 노예가 아니다!’

푸스스

목이 잘린 딜런의 시체는 이전과 달리 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몸통에서 사지가 분리되고, 몸통도 몇 조각으로 나뉘었다. 좀 전까지는 우락부락하긴 해도 한 명의 인간 형태였는데, 나뉘고 보니 그 몸은 각종 시체를 누더기처럼 이어붙인 형상이었다. 시체 중에는 오거와 트롤, 고블린 같은 몬스터는 물론이고, 인간도 있었다. 검투사의 시체였다.

그는 분노했다. 검투사의 시체를 써서 이런 괴물을 만든 이, 굳이 딜런을 되살린 것을 지시한 이, 자신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던 이, 그러니까 저 귀빈석에서 상황을 정리하려 애쓰는 뚱땡이에게!

“그레고리오 백작! 이 살만 뒤룩뒤룩 찐 미련 곰탱이야!”

백작 뒤에 붙은 수식어가 모두의 마음을 정확하게 대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해리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컸기 때문일까. 경기장의 모든 사람은 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에는 관중 사이의 웅성거림도 멈췄고, 귀빈석에서 벌어지던 칼부림도 멈췄다.

“죽어!”

모든 이는 이어지는 해리의 목소리에 그레고리오 백작을 쳐다봤다. 물리적 거리가 50m 이상 떨어져 있는 해리가 그레고리오 백작에게 어떤 해를 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에 담긴 처절한 분노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레고리오 백작을 볼 수가 없었다. 그레고리오 백작에게 ‘죽어!’라고 했던 해리가 정작 보고 있던 건 백작이 아니라 그 옆의 병사였기 때문이다.

왜?

의문은 병사가 움직이면서 자연스레 풀렸다. 병사가 칼을 뽑더니 백작의 배를 냅다 찔러 버린 것이다.

“으아악!”

칼이 끝까지 들어가도 내장이나 상할까 싶은 엄청난 뱃살이었지만, 백작은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계속 이어졌다. 병사의 찌르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악! 왜! 아악! 너, 아악! 뭐, 아아아악!”

모든 사람이 다시 해리를 쳐다보며 답을 요구할 때, 나는 답을 깨달았다. 해리 안에 있으니 느낄 수 있는 게 있었다. 해리의 영혼에서부터 작은 끈이 저 병사에게 이어져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걸 느끼니 저 병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누구인지도 금방 알았다. 뱃살을 통나무 찌르듯 계속 찔러내는 행동이 내가 아는 누군가와 비슷했다.

‘네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 백작을 찌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미친 해리에게 왕자를 붙잡으라고 해!’

‘……알았다.’

백작의 몸에서는 이미 치사량의 피가 솟아나고 있었으므로 해리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리고 미친 해리가 들어간 병사는 혼란한 틈을 타서 왕자의 목에 칼을 대었다. 이제 15세 정도로 보이는 왕자가 백작 바로 옆에 서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보고서야 정신이 든 왕자의 경호를 맡고 있던 기사가 움직이려 했지만, 해리의 천둥과 같은 목소리가 먼저 경기장을 채웠다.

“모두 동작 그만! 누구라도 움직이면 왕자는 죽는다!”

“헛소리! 네가 뭔데 가라마라…….”

방금 백작이 찔리는 걸 보고도 왕자 옆에 서 있던 기사가 그 상관관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움직였다. 해리는 바로 미친 해리를 움직여 왕자의 목에 상처를 냄으로 그 기사의 접근을 멈추게 했다.

“더 움직이면 진짜 벤다.”

“…….”

그 뒤로는 쓸데없는 말과 긴 눈치 싸움이 이어졌다.

결과는 간단했다. 해리를 포함한 검투사 일행은 그랑 옆에 있는 험준한 산맥으로 도망쳤고, 왕자 목에 난 상처를 제외하고 그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검투사 몇과 병사 몇이 다쳤고, 그랑은 혼란에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해리와 왕자 호위대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영향을 주진 못했다. 유일한 죽음, 그레고리오 백작의 죽음도 결과에 영향을 주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그 죽음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어떻게 보면 안타까운 죽음이었지만, 그에게는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살아 있었으면 왕자 경호를 소홀히 한 죄로 죽는 것보다 심한 문책을 받았을 테고, 평생 누렸던 것들을 다 빼앗기는 걸 봐야 했을 테니까.

그렇게 해리는 일단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나는 길고 길었던 아홉 번째 퀘스트에서 나올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늦었습니다.

변명을 해봅니다.

일단 올해 처음으로 감기가 걸렸습니다. 정신이 몽롱했습니다. 글이 제대로 적히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놀았습니다...... 네, 변명입니다. 아마추어리즘을 어떻게 벗어던져야 하는데, 쉽지 않군요ㅠㅠ뒤의 장면을 그냥 몇 문장으로 처리한 건.... 괜찮을까요? 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넘겼는데, 혹시 반응이 이상하면 제대로 묘사해 보겠습니다..... 대신 다음 퀘스트 진행은 늦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죠ㅎㅎㅎㅎ.....ㅜㅜ 이번 퀘스트는 길게 적으려고 마음을 먹긴 했는데, 이미 10편이라... 내일 이어질 후일담과 해리의 능력에 대한 서술을 적으면 11편. 예지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는데 10이라니.... 뭐, 내일은 현실 이야기도 등장하겠지만요.

글이 잘 써질 때 열심히 써야하는데, 어째 잘 써질 때는 마음이 느긋하고, 안 써질 때는 마음이 급하니.... 역시 프로란 쉽지 않습니다... 푸념만 늘어지는 군요.

언젠가는 일일 삼연참이 기본인 작가가 되기를 기원하며!

댓글과 추천을 기다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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