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86화 (86/160)

86화

"부탁한다……, 너, 너는 이기길……, 크흑."

마지막으로 쓰러진, 지금도 해리의 검을 복부에 꽂은 검투사는 죽어가면서 저런 말을 남겼다. 그때서야 미친 해리는 다시 들어갔고, 해리는 저 말에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하니 짜증을 냈다. 딜런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는데, 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당연하다. 딜런에 관한 그의 기억은 깨끗하지 않았으니까. 딜런에 대한 그의 마지막 기억은 그 죽음에 분노하고, 오거에게 분풀이를 하고, 그가 없음에 슬퍼한 거였다.

“96번째, 96번째! 위대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자, 구십하고도 여섯 번이나 그 존재를 증명한 자! 이번 시합도 해리의 승리다! 그랑의 챔피언, 무패의 해리!”

"앞으로 네 번!"

"네 번!"

"네 번!“

해리는 사람들의 외침에도 기뻐할 순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환호에 그도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없는 짜증이 그를 붙잡았다. 네 번만 더 이기면 레베카 백작에게 힘이 될 수 있는데, 그 사실도 그에게 힘이 되지 못했다.

그러든 말든 사람들의 환호는 더 커졌다. 아무도 달성하지 못한 대위업이 이뤄지는 걸 자신들의 눈앞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노예가 자유인인 된다는 것에 대한 환호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환호의 방향이 온전 히 해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 이 경기를 주최하는 그레고리아 백작이 아니라 말이다. 이전에도 그런 면이 있었지만, 이번엔 그 점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 + +

“앞으로 세 번!”

“앞으로 두 번!”

“앞으로 한 번!”

관중이 외치는 숫자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하나씩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연회는 더욱 풍성해졌다.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이 바뀌었다. 날이 갈수록 높은 사람들이 왔다. 예전엔 레베카 백작의 위치 정도가 최상위 그룹이었지만, 지금은 하위 계급이었다. 몇 안 되는 오락 거리에, 수도에서 귀족들이 대거 온 탓이다.

그래서 해리는 레베카 백작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평소에는 그 눈으로 늘 그녀를 쫓았지만, 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아 보기가 힘들었다.

그녀도 해리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높은 작위를 가지고 있어 그 사이를 파고들 수 없었다. 그녀는 멀리서 빙빙 돌 뿐이었다.

그래도 한두 번 마주친 그녀의 눈빛에서, 그는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그녀는 다가오고 싶어 했고, 아마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내일도 이기고, 그녀에게 힘이 될 거라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내일, 반드시 이기고 자유를 얻겠어.’

이길 수 있을까. 내일은 그의 예상대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내일의 시합을 끝으로 퀘스트를 깰 수 있을까.

이 퀘스트를 진행한 지 30일, 웬만하면 한 번에 끝내고 싶은데……. 높은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는 그레고리아 백작을 보니, 그렇게 물 흐르듯 쉽게 끝날 것 같진 않았다.

+ + +

마지막 날 아침, 해리는 언제나처럼 어젯밤 상대한 귀부인 옆에서 일어났다. 그건 평소와 같았지만, 그의 마음은 평소와 달랐다. 무심하게 있지 못하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평소와 다른 건 또 있었다. 주로 경기 후에나 얼굴을 보여줬던 백작이, 경기장에 가기 전에 해리를 부른 것이다.

시녀의 안내를 따라간 백작의 집무실에는 백작만 있었다. 백작을 만날 땐 늘 자크 감독관과 함께였는데, 이것도 다른 점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제부터 자크 감독관을 볼 수 없었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는 알고 있나?”

“네.”

“준비는 잘하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좋아, 이제껏 잘해왔으니 오늘도 문제없겠지. 그래도 오늘 이렇게 부른 건, 더 잘해야 하기 때문이야.”

해리는 백작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뻔했다. 높은 사람 오라니 잘하라는 거겠지.

“오늘은 정말 중요한 분이 오신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야 해. 물론 자네에게도 특별한 날이니 내가 말 안 해도 잘하겠지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분이니까.”

왕은 아닐 테고, 왕자라도 오는 건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대답이야. 그 말을 들으니 이제 안심이 되는구먼. 그럼 자네가 드디어 노예를 벗어나는 건가? 자유를 얻고 나면 어떻게 할 건가?”

“아직 생각해둔 바가 없습니다.”

해리는 백작 앞에서 대륙 저편으로 갈 거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도 백작이 자신을 잡으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손길을 벗어나려면 자기 의중을 숨기는 게 낫다는 것도.

“그렇다면 계속 검투사로 지내는 건 어떤가? 내 사례는 두둑이 주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어서 이기고 오게나. 오늘, 자네를 위해 큰 연회를 준비해 뒀으니까, 꼭 이겨야 하네. 안 그럼 그 연회가 물거품이 되지 않겠나.”

“승리를 안겨 드리겠습니다.”

그는 진짜로 이길 생각이었고,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불안했다. 백작이 부른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오늘 시합은 어떻게 될는지.

+ + +

"드디어 마지막! 마지막! 마지막!"

마지막이다. 마지막인 만큼, 해리의 심장도 조금 더 뛰었다. 이번은 해리에게 양보를 할까 하는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라이트닝 소드의 경험치를 생각하면 생각이 또 바뀐다. 지난 10번의 싸움으로 약소하나마 라이트닝 소드의 경험치가 올랐다.

[A급 라이트닝 소드 lv.8 9.96%]

4.5% 정도 오른 게 다였지만, 그거라도 감지덕지했다. 현실에서의 수련으로 오르는 경험치가 확연히 줄었기 때문이다. 4.5% 정도를 올리려면 1년 내내 수련에 매진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내가 해야지. 상대에 따라 다르지만, 한 경기 하면 최소 0.5% 정도는 오르는데, 그건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이제 100번째 시합! 이번에 이기면 이 세상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거기에 자유까지! 오늘은 어떤 시합을 보여 줄 것인가! 그랑의 챔피언, 불가능에 도전하는 무패의 해리!”

창살이 올라가고 경기장으로 들어가자,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들린다. 이미 외치고 있었지만, 그들은 또 외쳤다.

"한 번!"

한 번 남았다. 이번만 이기면 해리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백작은 검투사가 자유인이 되는 걸 허락할까.

잘 모르겠다. 검투사에게는 좋은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일종의 희망이 되니까. 이제까지는 말로만이었지만, 사례가 한 번 있으면 아무래도 다루기가 쉽겠지. 해리의 기억을 따르면 검투사가 반란을 일으키는 예는 적지 않다. 이 도시에서는 반란이 일어날 만하면 시합에서 죽어 버려 잘 없었지만, 다른 도시에선 간혹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만큼, 노예 검투사들에게 적절한 희망을 주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평민들에게는 이게 좋은 일일까? 해리가 승리하고 자유인이 된다는 건, 어쨌거나 계급이 바뀐다는 이야기다. 노예가 평민이 되는 것과 평민이 귀족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계급이 바뀌는 사례를 만들고 싶지 않을 게 분명하다.

백작은 어느 쪽일까. 아무래도 후자에 무게가 실리지만, 전자도 가벼이 넘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튼, 어느 쪽이라도 쉬운 상대가 나올 리는 없다. 100번째 시합에 걸맞은 상대가 나오겠지. 누굴까. 건너편 창살을 바라봤지만, 대기 중인 사람, 혹은 몬스터는 없었다. 그걸 통해 알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상대가 창살 바로 너머가 아니라, 그 공간으로 이어지는 복도 정도에 있다는 것.

왜지? 그냥 상대를 볼 수 있었던 이전과는 달랐다. 해리에게 상대를 숨길 필요가 있는 건가? 왜?

“자, 100번째 시합! 그 업적에 걸맞은 상대가 저기 있다! 100번째 시합을 화려하게 장식할 자여, 나오라!”

바람잡이의 말에 덩치가 큰 사람이 창살 너머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에 맞춰 창살이 서서히 올라갔고, 그는 막힘없이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어? 이봐, 저놈 어디서 본 거 같지 않아?”

“그래, 본 거 같은데……, 언제였지?”

“딜런이다!”

“그래, 딜런이야! 몸집은 좀 크지만, 그때 그 딜런이야!”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렸다. 그들의 말처럼 경기장으로 나온 이는 딜런이었다. 몸집이 우락부락해졌고, 머리카락도 없었지만, 그 얼굴은 분명 딜런과 같았다.

“그런데 딜런은 4년 전에 죽었잖아?”

관중의 의문은 바람잡이가 풀어주었다.

“자그마치 5년, 5년 동안 그랑의 챔피언 자리를 차지했던 딜런. 해리에게 져 챔피언의 자리를 빼앗긴 그가, 지옥에서 복수를 위해서 돌아왔다! 부족하긴 하지만, 무패의 해리를 이길 수 있는 자라면 그밖에 없다! 주술사의 도움으로 새로운 힘을 얻은 딜런! 오늘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원래라면 바로 시합 시작을 외쳤을 테지만, 바람잡이는 관중의 웅성거림이 줄어들 때까지, 딜런의 존재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렸다.

“주술사?”

“그거 아니야? 강령술이라고 있다잖아.”

“그럼 딜런이 살아 돌아온 건 아닌가?”

“그런 게 어디 있겠냐? 강령술이래 봐야 고작해야 하루 이틀이라던데?”

“유명한 기사에게나 쓰는 기술이라는데, 딜런에게 쓰다니…….”

“……최고다! 딜런과 해리의 시합을 다시 볼 수 있다니! 게다가 저기 봐, 척 봐도 딜런은 강해졌잖아! 이번엔 누가 이길지 몰라!”

“백작님이 큰 맘 먹었는데?”

죽은 이의 돌아옴.

이 세계에서 그 일은 그 말이 주는 이질감처럼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주술사는 죽은 이의 영혼을 불러올 수 있었고, 그렇게 돌아온 영혼은 가끔 전쟁에서 큰 힘을 발휘하곤 했다. 길진 않고 하루 이틀 정도지만, 강력한 기사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건 매력적인 일이니까. 어떤 방식인진 모르지만, 그 육체도 더 강하게 할 수 있고.

당연히 준비 시간이 길고, 돈도 많이 든다고 알려져서 고작해야 검투 노예에게 쓸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관중은 거기에 놀라고 있었다. 100번째 시합을 성대하게 치르려는 백작의 배포에 감탄했다.

“그럼 100번째 시합, 마지막 시합을 시작한다!”

“우와아!”

관중의 환호 속에서, 나는, 아니 해리는 가만히 서서 강령술로 움직이는 딜런을 바라보았다.

“딜런……?”

몸의 통제권은 해리의 강한 감정에 빼앗겨 버렸다. 그는 딜런의 존재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방금 바람잡이의 말도 그의 생각을 복잡하게 했다.

‘……해리에게 져 챔피언의 자리를 빼앗긴…….’

‘나? 내가 딜런을 죽……?’

그 순간, 미친 해리가 해리 속에서 다시 나타났다. 미친 해리는 순식간에 온몸을 장악하더니, 앞 뒤 가릴 것 없이 천천히 걸어오는 딜런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아아!”

“미친 해리! 시작부터 미친 해리다!”

“역시 딜런은 상대로는 미친 해리밖에 없지!”

4년 전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환호, 그들은 그저 즐거워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해리는 이전에 보지 못한, 그의 기억 속에서나 본 상태로 들어가 있었다. 멍한 채로,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미친 해리는 날뛰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심하게.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둘 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분노했다.

딜런이라니, 이건 너무 하잖아? 아무리 해리를 자유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해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해리보고 또 딜런을 죽이라고?

============================ 작품 후기 ============================

하하하.

제 성은 보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방법을 써야 하나.....

아직 아마추어리즘에 싸여 있어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디노스님. 사장님이 죽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곰곰이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ㅠㅠ

추천과 댓글을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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