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84화 (84/160)
  • 84화

    “크아악!”

    “우와아!”

    “죽여라!”

    창살 너머 다섯 명의 검투사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편은 4 대 1. 혼자인 쪽의 검투사는 해리 다음 챔피언이 유력해 보이는 이다. 그러므로 4명과 싸우는 거지만, 지금 상황은 일방적이었다. 4명 중 2명은 어떻게 처리했지만, 남은 2명은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어 도망 다니는 게 고작이었다.

    갑옷을 가를 수 있는 검이 있다면 좋을 텐데.

    해리의 기억을 뒤지는 동안 이 세계에 기나 마나 같은 것들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정신 에너지를 쓰는 것으로 보이는 주술이 있었다. 마법보다 준비가 훨씬 많이 필요한 기술이라 검투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선 쓰기 어려웠지만 그만큼 위력이 강력한 기술. 코끼리 두 마리가 해리만 쫓아온 것도 주술의 위력이었다.

    전설 속에는 칼과 화살이 난무하는 전쟁터 속에서도 평온하게 주술을 쓰는 자가 나온다지만...

    어쨌든, 기와 마나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도 일반 검기는 쓸 수가 없었다. 써보려 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게 아니라 허용되지 않는 게 확실한 듯, 검기는 발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검령을 통해 발현되는 검령기(劍靈氣)도 쓸 수 없었다. 검령기를 쓰려면 검과 주인과의 교감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매일 쓰는 무기가 바뀌는 이 경기장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그런 이유로 저번 시합에서는 코끼리의 두꺼운 가죽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기만 했다. 이때까지 해리가 잘 싸워왔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한 탓도 있다. 고블린을 학살한 것처럼 쉽게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다. 해리도 자신에 차 있었고. 그런데 이 빠진 검을 주고, 그런 무지막지한 상대를 들이밀다니, 그럴 줄은 몰랐다.

    지금도 그렇다. 저 강철 갑옷을 내 상대가 입고 나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갑옷 틈새를 노려 공격하는 저 검투사처럼 해하겠지. 분명 유효한 공격이다. 갑옷 입은 둘도 주춤하며 물러난다. 그러나 실력이 월등하지 않고는 시도하기 어려운 공격이기도 하다.

    “크아악!”

    해리가 자유인이 되면 챔피언이 될 거라는 꿈을 꾸던 검투사는, 틈새만을 노리려고 무리한 움직임을 계속한 끝에 훤히 드러나고만 빈틈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는 가슴에 긴 자상을 허용하고 말았다. 아직 시합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만회하기 어려운 상처다.

    해리나 나도 저런 꼴을 당하지 않으란 법이 없다. 지금 싸우고 있는 둘 정도는 처리할 수 있지만, 내 상대는 저 정도가 아닐 것이다. 최소 철갑을 온몸에 두른 트롤은 나올 텐데, 그런 상대를 무딘 검으로만 이길 수는 없다.

    대책이 있어야 했고, 다행히도 대책은 있었다.

    [준비됐어?]

    [그래. 왼쪽이다.]

    이프리타의 생각에 경기장 왼쪽을 보았다. 이프리타가 어디 있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완전 개방적인 차림새를 한 사람들 사이에 머리끝까지 후드를 뒤집어쓴 건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가능한 거야?]

    [충분하다. 시합이 시작하면 네 검에 힘을 불어넣으랬지?]

    [응.]

    [알았다. 걱정하지 마라. 불의 검이 벨 수 없는 건 검강정도 밖에 없으니까.]

    불의 검.

    이프리타의 힘을 검에 담는 기술로, 일종의 버프다. 검기를 못 쓴다고 하니 그녀가 고민하지도 않고 내놓은 대답이다. 써보니 벤다기보단 태우는 거에 가깝지만, 파괴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코끼리도 이 검을 썼다면 단숨에 베어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버프 전문이 아닌 그녀라 기술에 제약이 조금 있었다. 그녀가 보이는 곳에만 쓸 수 있었고, 거리도 100m 안이어야 했다. 게다가 여우 상태로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로브와 후드로 그 모습을 꽁꽁 싸매고, 관중석에 숨어 있는 것이다. 경기장 지름이 약 100m 정도니까, 거리도 그걸로 해결되었다.

    이 모든 건 그녀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게 좋다는 판단을 내리어서다. 경기장에서 불꽃 여인을 불러내서 상대를 쓰러뜨리는 건 아무래도 논란거리가 있다. 해리의 힘이냐, 외부의 개입이냐로 의견이 나뉘고, 해리를 직접 조사하려고 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유를 향한 길은 자연히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불의 검’ 버프는 어떻게 하느냐고?

    다행히 ‘불의 검’은 그 이름과 다르게 그렇게 드러나는 종류의 버프가 아니었다. ‘불의 검’을 썼을 때 맺히는 주황빛은, 가까이 있을 때야 확연히 눈에 들어와도 멀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모래로 꾸며진 경기장이니까.

    시합은 결국 홀로 나온 검투사의 패배로 끝이 났다. 분풀이로 목이 몇 번이나 찔린 그의 시체는 시체라 주장하지 못하고 고깃덩이로 전락해 있었다.

    해리는 무심했다. 죽은 이도 얼마 전까지 같은 숙소에서 생활하던 이였다. 검투사 식으로 ‘형제’라고 부를만한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도 해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경기장에서 죽는 것, 그는 그게 검투사의 운명이란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반대쪽 입구에서는 내 예상대로 갑옷을 껴입은 트롤 두 마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긴장됐지만, 해리의 마음을 따라 나도 씨익 웃었다.

    그는 싸움이 좋아서, 전투의 스릴을 기대하며 웃는 거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에 가까웠다. 떨고 있어봐야 싸움은 싸워야 하고, 퀘스트는 진행해야 한다. 이왕이면 웃자. 나는 충분히 강하다.

    거기에 오늘은 이프리타의 도움도 있으니까.

    [간다, 이프리타. 잘 부탁해.]

    [알았다.]

    실은 나 역시 해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그도 처음부터 싸움을 즐겼던 건 아닐 테니…….

    + + +

    “아흔다섯 번! 백번에 고작 다섯 번 모자란 아흔다섯 번째 승리도 거머쥐었다! 그랑의 챔피언! 우리의 챔피언! 해에리!”

    “우와아아!”

    불의 검을 선택한 건 탁월한 결정이었다. 트롤 두 마리, 오크 라이더 셋, 드워프 둘과 지금 눈앞에 쓰러진 엘프 검사까지, 비교적 손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비교적이란 건 온몸이 으스러질 뻔했던 코끼리 두 마리에 비해서다. 재생력이 강한 트롤, 큰 늑대와 혼연일체가 되어 덤비는 오크 라이더, 땅을 쪼개는 괴력을 자랑하는 드워프, 눈이 따라가기 힘든 속도를 소유하고 있는 엘프 검사가 쉬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도 내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양팔을 벌리고 환호를 받는데, 양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해리!”

    “해리!”

    “해리!”

    경기장은 환호 소리로 가득했다. 그 목소리는 컸지만, 대부분 갈라져 있었다. 그건 그들이 경기 내내 해리를 불렀기 때문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경기가 끝날 때, 승패가 결정되고 나서야 해리를 불렀다. 경기 중엔 해리든 상대든 피가 튀기기만을 원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해리가 입장할 때부터 그 이름을 연호했다. 경기장이 목소리만으로 무너질 것 같았다.

    “다섯 번!”

    “다섯 번!”

    “다섯 번!”

    해리는 자신의 응원하는 이들의 소리에 취했고, 나도 기분이 한껏 고양되었다.

    + + +

    “하아, 하아. 좀 더, 좀 더어엇!”

    연회는 계속되었고, 밤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일도 반복됐다. 예지의 나신을 보기도 전에 다른 사람의 알몸을 보고 겪는 건 바늘이 되어 마음을 찔렀지만, 한편으론 무심했다.

    첫날 시녀들을 안은 이후엔 시녀들을 봐도 크게 동하진 않았다. 그땐 몰랐는데, 수에르테와의 기억을 더듬고 해리가 레베카 백작을 대하는 걸 보고나니, 일곱 시녀와 뒹굴던 건 그저 그런 수준이라는 걸 알았다. 육체적 쾌락만 있는 것과 그 쾌락에 정신적 교감이 더해진 것의 차이였다. 테디오와 수에르테, 해리와 레베카 사이에는 교감이 있었지만, 그때 나와 시녀들 사이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저 정욕과 정욕이 만났을 뿐이다.

    그러니 밤마다 만나는 사람은 더욱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시녀들보다 외모와 몸매가 보통 떨어졌으니까.

    ‘레베카 백작님!’

    “아앙!”

    해리는 정체 모를 귀부인의 엉덩이를 붙잡고는 그녀를 떠올렸다. 주의해야 할 부분은 이런 생각이었다. 이게 좀 더 바람피우는 거에 가까웠다.

    + + +

    96번째 시합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시합 전엔 늘 그렇듯 다른 검투사들의 시합이 있었다. 시합하는 이들은 전에 봤던 두 사람. 내 취향과는 완전히 정반대에 있어 이해하긴 힘들지만, 서로 사랑한다던 두 검투사다.

    챙, 챙.

    “우우!”

    “싸워라! 찔러! 찌르라고!”

    “재미없다! 피, 피를 달라고!”

    피를 갈구하는 게 이 경기장을 찾은 관중의 성향이긴 했지만, 이번 시합에 야유가 터져 나오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둘의 경기는 재미가 없었다. 피가 튀지 않아도 박력이 있다면 괜찮을 텐데, 둘의 공격엔 힘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았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도 다른 시합과 달리 작았다.

    왜냐하면, 둘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를 죽여야 했고, 둘 중의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옆에 있는 놈이랑 철천지원수를 맺으라고 했는데…….’

    돌팔이 치유사의 말처럼, 검투사는 언제나 혼자여야 하는 게 옳다. 언제 저런 장면이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에, 저런 장면이 펼쳐지는 게 검투사의 당연한 운명이기 때문에.

    푸욱.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둘 만의 싸움에 종지부가 찍힌 건 긴 시간이 지나서였다. 검 하나가 목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피가 튀었고, 관중은 그걸로 일단 환호했다. 허나 승리자는 기뻐하지 않았다. 피가 흐르는 검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해리!”

    “해리!”

    “해리!”

    해리와 내가 서 있는 옆 게이트로 걸어나가는 승리자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그걸 본 해리의 마음속에서 짜증이 일었다. 그 짜증은 해리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승리를 기원하는 관중의 함성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96번째 시합을 시작한다!”

    “우와아아! 오늘도 네 힘을 보여줘!”

    “사랑해요! 해리!”

    “해리! 힘내!”

    적은 완전무장한 검투사 열 명이다. 그물, 창, 검, 화살 등 갖가지 무장을 하고 갑옷과 방패를 챙긴 그들은 때에 따라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게 틀림없다. 그러나 불의 검을 쓸 수 있는 나의 상대는 아니다.

    “크아아악!”

    “와아! 미친 해리다!”

    “미친 해리! 피를 보여!”

    “미친 해리! 너를 보고 싶었다고!”

    그런데 시작부터 미친 해리가 나왔다. 해리가 위기에 처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튀어나와 놀라운 지배력으로 몸의 주도권을 빼앗더니 검투사를 향해 달려갔다.

    ‘딜런…….’

    해리는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검투사 딜런을 떠올리며 짜증에 빠져 있었다.

    “크아아악!”

    검투사 한 명의 몸에 칼을 박아 넣고는 괴성을 지르는 미친 해리는 그의 속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미친 해리는 딜런을 죽이기 위해서 태어났으니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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