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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83화 (83/160)
  • 83화

    “으윽!”

    정신이 들자마자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절로 비명이 나왔다. 갈비뼈에 금이 간 모양이다. 한두 군데가 아니다. 최소 5곳 이상. 상체 전부에서 말할 수 없는 격통이 밀려왔다. 가만히 있어도 그런데, 고통을 더하는 손길이 있었다. 누군가가 가슴을 툭툭 쳤다.

    “아아악!”

    “뭐, 이 정도면 괜찮구먼.”

    돌팔이 치유사였다. 그의 손이 한 번 더 움직이려 하는 게 보였다. 급히 손을 들어 그 손을 잡았다. 움직이는 와중에 가슴에서 고통이 밀려오고 팔도 성한 곳이 없는지 삐거덕댔지만, 돌팔이가 내 가슴을 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윽……, 무슨……!”

    “거 봐, 괜찮잖아. 이제 가 봐.”

    부정하고 싶었지만, 좋은 소리 들을 것 같지 않아서 관뒀다. 대신 다시 움직이려는 그 손만큼은 제지했다. 지금은 어디를 만져도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치유사는 내 반응에 혀를 한 번 차더니 방구석으로 가 앉았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웬만하면 여기서 쉬고 싶었지만, 저 더러운 치유사 성격에 나를 가만히 쉬게 둘 것 같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이 방에 있는 다른 환자에게 잔소리하고 있었다.

    “야, 거기, 빨리 가. 여기가 무슨 니들 침댄 줄 알아? 더러운 짓은 니들 방에 가서 하란 말이다!”

    치유사가 소리치는 곳에는 근육이 우락부락한 남자 둘이서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다. 해리의 기억에 의하면 저 둘은 분명 그렇고 그런 사이는 맞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하는 건 그런 짓이 아니었다. 한 명의 다리가 부서져 있으니까 부축해주고 있었을 뿐이다.

    “어휴, 내가 말을 말지. 내가 그렇게 옆에 있는 놈이랑 철천지원수를 맺으라고 했는데, 병신같이 딱 붙어 있느니 그따위로 다치지. 하여간 오래 살긴 그른 놈들이야.”

    문제는 부축해 주고 있는 쪽도 성한 편이 아니라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거다. 그래도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 있었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그런 미소였다. 둘은 내 시합 전에 오크 다섯 마리와 싸웠다. 나는 경기장 입구 창살 너머로 그 시합을 보고 있었다. 힘겨운 싸움이었다. 살아난 건 운에 가까웠다. 마지막으로 뻗은 검이 기적적으로 오크의 눈을 찔렀고, 그걸로 겨우 이겼던 것이다. 둘은 살아남고 나서 미칠 듯이 괴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그때의 웃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겠지.

    “야, 거기 이름도 없는 해리…….”

    이런……. 나도 어떻게든 빨리 움직여야겠다. 쉬는 건 이 방 밖에서도 가능한 거니까. 이를 악물고 나무와 천으로 대충 만든 진료대 위를 내려왔다.

    “그래, 빨리빨리 나가야지. 내 쉼을 방해하지 말란 말이다.”

    진짜, 저래서 치유사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리고 챔피언쯤 되면 전속 치유사 같은 거라도 붙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목욕 시중만 7명이면 뭐하냐고.

    그러나 온몸은 성한 곳 하나 없어, 진료대 위에서 방문까지, 겨우 5m 남짓한 거리를 움직이는 데 5분이나 걸려 버렸다. 그동안 치유사는 계속 내게 닦달했다. 빨리 나가라고. 그 소리를 참아내고 이별이라 생각하며 문을 닫는데, 치유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네 뜻대로 될 거로 생각하지 마라. 병신 같은 놈.”

    쾅.

    무슨 뜻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백작은 나를 고이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오늘만 봐도 그렇다. 코끼리 두 마리라니? 그게 사람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인가? 그것도 이 빠진 검을 주고서 말이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게다가 지금 몸 상태로 내일 또 싸워야 한다고? ……애초에 100연승, 아니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연전연승한다는 게 가능하기가 한 건가?

    이대로 노예를 벗어나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 앞으로는 코끼리 두 마리보다 더한 상대가 나올 텐데.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탈주라든가, 혹은 반란이라든가. 하지만 둘 다 성공 가능성이 낮았다. 이 도시는 백작의 도시, 상주하고 있는 병사만 천 가까이 된다. 백작이 수족처럼 부리는 40명의 기사도 있다. 도시 밖으로만 나간다면야 살아날 확률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 수치가 가장 높은 건 역시 100번째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지, 그러고도 무사할지는 아무래도 의문이지만.

    형제처럼, 정확하게는 연인처럼 이라고 해야겠지. 아무튼, 서로를 의지하며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두 검투사의 등을 보면서, 나는 벽에 기대어 몰래 힐을 사용했다. 남은 체력이고 자시고, 힐 때문에 여기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해도 일단은 치료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 + +

    힐을 쓰고 나선 정신을 잃었고, 시간이 다 됐는지 현실로 나왔다. 그 뒤 다시 들어가 보니 어느새 옷이 다 갈아입혀 진 채로 연회장에 누워 있었다. 눈앞에는 연회를 준비하는 집사의 눈, ‘네 녀석이 진짜 미쳤구나.’하는 눈이 보였다. 얼굴이 얼얼한 걸로 보다 그가 나를 깨우느라 얼굴을 많이 쳤던 모양이다. 해리의 피부가 단단해서 손이 꽤 아플 텐데, 안 됐다.

    연회는 그 후 바로 시작했다. 역시나 지겨운 시간이었다. 해리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전처럼 귀족들의 장난감이 되어야 했으니까.

    해리는 이번에도 레베카 백작 때문에 버텼다. 오늘은 레베카 백작이 만날 수 있다고 했으니, 그것만 기다리며 견뎌냈다.

    그리고 긴 연회의 끝에, 그는 드디어 그녀와 만날 수 있었다.

    전과 같이 큰 침대가 있는 방안으로 가면 쓴 여인이 들어온다. 흰옷 너머 실루엣으로 보이는 몸매가 아름답다. 드러난 목선과 어깨, 쇄골이 그리는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얇은 천 아래에서 그 존재를 과시하는 작은 유두는 화룡점정의 한 수. 가면이 얼굴을 가리려 애쓰지만, 눈빛만으로도 모든 것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

    해리의 감정이 듬뿍 들어간 감상이지만, 이 세계에서도 아냐 누나는 아름다웠다. 레베카 백작은 미망인이고, 정확한 나이는 몰라도 최소 30은 넘겼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연회장에서 그녀를 상대할 만한 여인은 없었다. 난다 긴다 하는 귀족 처녀들도, 그녀 앞에서는 빛이 바랬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나나 해리의 눈에는 그랬다. 나도 일단은 아는 사람이라 가산점을 더 주고 있으니까.

    “오랜만이구나, 해리.”

    “네, 넷!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후훗, 여기서는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잖니?”

    “아, 네, 그렇습니다. 주인님.”

    “주인님…….”

    “죄송합니다. 부인.”

    “후훗, 아니야.”

    갖고 노는구먼.

    지금은 해리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이 시간에 뭘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직접 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심에 찔리기도 했다. 예지가 있는데, 내가 직접 누군가를 탐하는 건 할 일이 못 됐다. 시녀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시녀들이야 아무리 예뻐도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레베카 백작은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아냐 누나라고 해도 무방하니까. 여기서 나서다간 내 마음이 어디로 갈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긴장한 거야? 내가 잡아먹기라도 한데?”

    “오랜만이라서 그렇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부인.”

    앞뒤 가리지 않는 해리의 저돌적인 말에 레베카 백작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피었다 사라진다. 그녀는 다가오며 가면을 벗고 있었다. 벗으면 안 되는 가면이지만, 그녀는 물론이고, 해리도 이미 가면을 벗었다.

    “나 같은 늙은이에게 그런 말을 해 주니까 입바른 소리라도 기분은 좋구나.”

    “빈말이 아닙니다.”

    “그래, 알았어. 나도 보고 싶었어. 그럼 오늘은 뭘 할까?”

    “부인께서 하고 싶으신 게 제가 하고 싶은 겁니다.”

    “흐응, 그럼 일단 앉아야겠지?”

    “알겠습니다. 어서 침대 위로…….”

    해리는 그의 시간으로 어제, 내 시간으로 3일 전과는 태도가 너무 달랐다. 정체 모를 귀족 여인을 안을 때는 그렇게나 싫어하더니, 지금은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동작도 재빠르고, 아픔도 개의치 않는다. 힐로 상태가 많이 완화되긴 했지만, 그의 온몸은 아직 삐걱댄다. 그런데도 그녀보고 들어오라는 듯 팔을 벌리고 난간에 기대앉은 자세가 꽤 자연스러웠다.

    다만 완벽하진 못했다.

    “어디 아픈 거야?”

    “아닙니다.”

    “……어디 아픈 거구나. 그런 네 몸에 기댈 순 없지.”

    “괜찮…….”

    “아니야, 일단 누워. 너는 눕는 게 좋겠어.”

    “아닙니다. 이 시간은 부인을 위한 시간입니다…….”

    그는 그녀의 제안에 목소리를 높이다가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두 마리 코끼리를 잡던 광전사는 어디 가고, 여기에는 순한 양 한 마리만 존재했다.

    그는 그녀의 말대로 누웠고, 그녀의 무릎까지 베었다. 그녀는 해리의 머리를 드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물론 그녀의 힘이 없다고 보긴 어려웠고, 그의 머리가 너무 무거울 뿐이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을 지나 이마를 매만졌다.

    “눈은 떠도 되는데? 혹시 눈도 못 뜰 정도로 아픈 거야?”

    “그,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왜?”

    “그, 그게 눈 뜨겠습니다.”

    해리가 눈을 뜨니 큰 살덩이 두 개가 바로 보였다. 비쳐 보이는 둥근 동산 2개와 그 꼭대기의 분홍색 비석이 그의 마음을 자극했다. 아예 가려져 있거나 혹은 드러나 있으면 덜 야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러나저러나 그에게는 상관없을지도.

    살덩이 두 개가 마구 흔들린다. 그녀가 웃고 있기 때문이다. 귀에 낮지만, 즐거운 소리가 들린다. 한 마디로, 다 알고서 저러는 거다. 해리가 왜 이렇게 쑥스러워하는지 다 알고서 놀리는 것이다.

    그녀의 손이 다시 이마를 매만진다. 그의 감각은 그 손길에 계속 올라가기만 했다. 이래서야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내가 괜한 바람을 넣어서.”

    “아닙니다. 다 제가 원해서 한 일입니다.”

    “……그럼 나 때문이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라…….”

    “푸풋.”

    이 남자, 아까부터 굉장히 한심하다. 본인이 즐거우면 됐다고 넘어가고 싶지만, 눈꼴사나워서 못 봐줄 지경이다. 일곱 시녀 앞에서도 무심함을 자랑하던 상남자는 어디 갔는가?

    “그런데 괜히 그랬나 봐. 너를 보기도 힘들어지고……, 너는 이렇게 상처만 입고, 그리고…….”

    “…….”

    ‘이젠 완전히 만날 수 없겠지.’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런 것일 테다. 해리도 그걸 알기에 섣불리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침묵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부인의 꿈은 제가 이뤄드리겠습니다.”

    ‘나는 네가 자유로워지는 걸 보고 싶어. 그래서 저 밖의 세상을 보고, 즐기고, 웃었으면 좋겠어. 그럼 나도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녀는 본디 평민 출신으로 그라디우스 백작의 5번째 부인으로 들어갔다. 그라디우스 백작은 아내 운이 지지리도 없는지, 그전의 부인 네 명을 먼저 떠나보냈다. 5번째 부인은 오래 살기를 바라며 어린 사람을 들였는데, 이번엔 반대로 그 자신이 세상을 떠났다. 백작 위는 아들 복도 없었던 백작의 유일한 아들, 그녀가 어렵게 얻은 아들이 이을 예정이었지만, 아이는 이제 4세, 아직 작위를 받을 나이가 아니었다. 결국, 성인이 되기 전까진 백작 위는 그녀가 가지게 되었다.

    레베카 그라디우스 백작.

    원래는 그라디우스 백작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그라디우스 백작 부인이라 불리던 전과 구별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레베카 백작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불러도 흠은 아니었다. 정확한 예법은 아니지만, 평민 출신인 그녀에게 굳이 그런 것까진 지키고 싶지 않다는 건지도.

    그녀의 위치는 애매했다. 백작의 집안에 여자가 그 혼자뿐이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백작의 집에는 전 부인이 나은 딸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시집을 가 집을 떠났지만, 남은 이들이 있고, 떠난 이들도 소식을 듣고는 간섭하려 했다.

    그 삶이 쉬울 리가 있을까.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딸들의 틈바구니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귀족 사위들의 탐욕 속에서 아들을 지켜야 했다. 원래 평민이었던, 예쁜 얼굴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그녀가.

    아들을 두고 도망치고 싶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단다. 죽은 남편은 싫어했고, 원하던 아이도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을 집안과 재산만 노리는 어른들 사이에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고.

    아이와 같이 떠날 수는 없는 거냐고 해리가 물었을 때, 그녀는 용기가 없다고 했다. 지금은 아이를 데리고 나갈 용기가 없고, 아이가 크면 귀족의 직위를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없을 거라고.

    ‘나는 이제 이렇게 차츰 내가 싫어했던 귀족이 되어 가겠지. 너를 만나러 온 걸 보면 벌써 그렇게 되어 버린 거 아닐까.’

    그녀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해리에게는 그러지 말라고 당부했다.

    ‘너는 노예로 머무르지 마.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대륙 저편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고 해. 엘프와 드워프가 같이 사는 요정의 땅, 거기서는 오크와도 싸우지 않는다던데……. 너는 보고 싶지 않니?’

    ‘당신과 함께, 아니 당신이 직접 보셨으면 합니다.’

    이건 그가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 속마음이었다.

    해리는 장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백작의 검투사와 시녀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경기장에서 잡일을 하며 지냈고, 검투사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다. 싸우고, 이기고, 시녀들을 안고, 연회에 참석하고, 귀족 여인들을 상대하는 일에 만족했다. 그러다가 싸울 수 없게 되면, 자크처럼 교관 노릇이나 하면 된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게 다였다.

    그런 그를 바꾸어 놓은 건 그녀였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가면을 벗고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너와 이야기하고 싶었어. 네가 이기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거든.’

    그는 그녀가 그저 그런 귀부인인 줄 알았다. 가면을 벗는 게 특이하긴 했어도, 그런 귀부인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연회에서 말하는 소문으로 평민 출신인 것도 알았지만, 노예 출신이고 노예인 자신에게 비하면 어찌 됐든 높은 이였다. 흔히 볼 수 없는 미인이니 밤이 즐겁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잠자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고즈넉한 밤을 보내기를 바랐다. 그 요구를 들어주면서 그는 무슨 이상한 사람 다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밤, 그로서는 처음 겪는 심심한 밤이 지나고, 다음 밤이 왔다. 한 한 달쯤 뒤에 다시 만난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말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의 생애, 그의 싸움, 그의 마음, 그의 미래. 그는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들을 생각해야 했고, 말해야 했다.

    귀찮다고 생각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냥 박아주면 끝이 아닌가, 귀찮게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네 번이 다섯 번이 되어가면서 그는 그녀를 기다리게 되었다. 노예로만 취급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그를 인간으로 대했다. 심지어는 시녀들도 정욕을 푸는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데, 그녀는 그를 하나의 인간으로 대했다.

    그의 눈을 보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의 슬픔에 울고, 그의 기쁨에 웃었다.

    그는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 진짜 웃음, 지금과 같은 자조적인 미소 말고, 진짜 웃음이 꽃피길 기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따라 자유인이 되는 싸움에 올랐다. 그녀가 말하는 바깥 세계를 보고 싶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지나가면서 한 말이었다.

    ‘그럼 나도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그녀가 평민이든, 귀족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그녀가 지금 힘이 없는 상태라는 것만 알았고, 그것만은 해결되길 바랐다. 이것으로 그녀와 만나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피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여겼다.

    물론 그가 가장 바라는 건, 그녀와 함께 바깥 세계를 보는 거지만.

    “꿈은 무슨……, 아니, 꿈이다. 너는 자유로워지도록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힘이 없는 거야.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하려고 했는데.”

    “아…….”

    해리가 깊은 실망의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도 그걸 알곤 있겠지만, 또 가만히 있지 않는다.

    “왜, 싫어? 늙은 여자라서?”

    “아닙니다. 저는 하고 싶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또 발끈했다. 당장에라도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제지했다. 그는 이마를 지그시 누르는 부드러운 손에 저항하지 못했다.

    “나도 하고 싶지만, 안 돼. 너는 내일도 싸워야 하잖아?”

    “하지만…….”

    “됐어. 이런 것도 난 좋아하니까.”

    “…….”

    “삐친 거야?”

    “아닙니다. 그저 아쉬울 뿐입니다.”

    “후훗, 귀엽네.”

    “…….”

    그 뒤로도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계속 이어질 것만 같은 그 시간은 해리가 잠이 들면서 끝이 났다. 뜻밖에 빠른 시간이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꼭 이겨.”

    해리 안에서 시간을 죽이던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보다, 아쉽군. 한편으론 다행이지만…….

    ============================ 작품 후기 ============================

    후원해주신 아만64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오랜만에 후원자라 깜빡했습니다ㅠ)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슬아슬하네요. 아무튼 1월 1일에 올립니다. 낮에 올라갔어야 했는데....

    제 머릿속에는 몇 문장이던 게 이렇게 길어지는 군요.

    역시 과거 이야기는 적다보면 하염없이 길어집니다. 살을 붙여넣는 것도 어렵고요.

    원래 검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내일이나 적게 되겠네요.

    일단 이 세계에는 기와 마나는 없습니다. 대신 주술, 정신력 같은 게 있죠.

    나머지는 내일-

    추천과 댓글 감사 드립니다.

    추천과 댓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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