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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82화 (82/160)

82화

아홉 번째 퀘스트를 시작한 지 3일째가 되어서야 나로서는 2번째, 해리에게는 91번째 시합을 치를 수 있었다.

경기장엔 전과 같이 수만 명의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내가 경기장에 등장하자 해리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그 부름에 검을 들어 응답하니 함성이 더 커졌다.

이전까지, 그레고리아 백작을 상대할 때나, 연회에 참석할 때, 그리고 정체 모를 귀부인을 상대할 때는 해리에게 몸의 주도권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움직였다. 싸우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기술의 경험치가 잘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라이트닝 소드의 경험치를 조금이라도 올릴 수 있을 때 올리고 싶었다. 전투에 좀 더 익숙해져야 하기도 했고.

경기장에는 아직 나 혼자밖에 없었다. 이제 관중의 함성이 잦아들고 있으니, 곧 있으면 시합의 상대가 반대편 문에서 등장할 것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는 몰랐다.

100번 연속 승리, 자유를 향한 도전의 상대는 시합 전까지 비밀로 하는 게 원칙이었다. 이유는 사전 준비 같은 것과 상관없는, 검투사 본연의 능력만을 보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 이유가 믿기진 않았다. 하지만 규정이 그러니 따라야겠지.

감독관인 자크도 상대를 모르는 눈치였다. 대신 어떤 흐름으로 나올진 분명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해리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오늘 나올 것은 고블린 100마리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닐 거라면서 거듭 당부했다. 그는 해리가 꼭 자유인이 되어 노예에서 해방되길 바라는 듯했다.

그러나 해리는 들떠 있었다. 검투사로 본격적인 활동을 한 지 벌써 5년, 그 사실은 그의 성향을 말해줬다. 피와 광기가 난무하는 이 경기장에서 버텼다는 건, 그가 호전적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게 그의 본래 성격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그는 100마리 고블린보다 강한 상대를 앞두고 즐거워했다. 누가 나오든지 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오늘따라 몸이 더 가볍다고 느끼며, 질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승리는 이미 결정 난 건지, 머릿속 한편에서는 밤에 만날 레베카 백작을 떠올렸다.

반대로 나는 긴장했다.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점이 나를 떨리게 했다. 여기서는 뭐든지 나올 수 있었다. 오크나 놀 같은 인간형 몬스터부터, 트롤, 오우거 같은 대형 몬스터는 물론이고, 기린이나 코끼리 같은 큰 동물들까지 종과 수와 크기를 상관하지 않았다. 오크나 놀은 자신이 있었지만, 오우거나 트롤 같은 거대한 개체를 검과 방패만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건 조금 막막했다. 기린이나 코끼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기회에 대형 몬스터들과 상대할 방법을 익히면 좋겠지만, 한편으로는 편히 넘어가길 원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오크나 놀, 혹은 다른 검투사가 나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반대편 철창살이 올라가며 드러난 적은 내 작은 기대를 산산이 무너뜨렸다. 그곳에는 어깨높이만 4m는 되어 보이고, 상아 길이가 2m는 되는 듯한 거대한 코끼리가 서 있었다. 그것도 두 마리나.

오늘 지급 받은 검의 날이 숭숭 빠져 있었던 건 이런 이유였나. 이 검이 두꺼워 보이는 피부를 파고들 것 같지가 않다.

“코끼리다! 그것도 두 마리야!”

“오늘은 해리의 피를 보겠는걸?”

“아니야! 코끼리가 쓰러지겠지. 전에도 한 번 이겼었잖아?”

관중은 내 승리를 점치는 이가 반, 내 패배를 바라는 이가 반 정도였다. 그들의 말처럼 해리는 전에 코끼리를 이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해리가 죽인 코끼리는 저 코끼리보다 작았고, 두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였다.

“그럼, 91번째 시합을 시작하라!”

“와아아!”

어제와 같은 바람잡이의 말에 코끼리의 상아를 묶고서 버티고 있던 노예들이 그 줄을 놓아 버렸다. 코끼리는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무슨 짓을 한 건지, 원수진 것도 없는데 그놈들은 나를 향해 똑바로 달려왔다.

무시무시했다. 자갈들이 튀었다. 흙먼지가 아니었다. 코끼리가 한 번 땅을 박찰 때마다 자갈들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자갈들은 코끼리의 몸에 부딪혀 내 쪽으로 날아왔다. 거짓말 같았지만, 만화 같은 광경이었지만, 그게 내 앞에서 펼쳐졌다.

괴물 코뿔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긴 했다. 그래도 수컷 코끼리는 그 나름대로 위용을 뽐내며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판단력이 약간 흐려졌다. 잘못하면 피하지 못할 뻔했다. 피할 수 있었던 건 해리의 몸에 배 있는 본능 덕이었다.

“꾸르르륵!”

괴상한 소리를 내며 코끼리가 내 옆을 스쳐 갔다. 그걸로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한 마리가 더 있었으니까. 옆으로 더 힘껏 뛰었다. 또 한 마리의 코끼리도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갔다. 문제는 채찍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코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거다.

휘리릭.

옆으로 빠지는 내 옆구리에 코끼리의 코가 날아왔다. 방패로 막았지만, 방패째로 밀려났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나는 수십 미터를 날아가 경기장을 둘러싼 난간까지 날아가 꼴사납게 처박혔다.

“크허억!”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강철 같을 뿐 아니라, 유연한 근육으로 둘러싸인 몸으로도 충격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다. 분명히 피했는데, 피할 위치였는데, 코의 공격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이걸 어떻게 이기란 말이지?

긴장과는 별개로 상대가 누구든지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어제 소비한 체력은 하룻밤 만에 다 회복되었고, 허벅지의 상처도 아침에 힐로 전부 치료했다. 무한한 체력과 튼튼한 다리가 있으니 도망 다니는 거야 가능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실상은 내 빈약한 상상과는 달랐다. 코끼리는 그 어떤 상상의 적보다 빨랐고, 강력했다. 피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재차 돌진해 오는 코끼리를 보면서 나는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땅을 굴렀다.

“꺄아악!”

쿠르릉.

쿵. 쿵. 쿵.

코끼리의 돌진에 그 근처에 있던 관중이 비명을 질렀고, 난간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럼 관중을 공격해야 할 텐데, 코끼리는 이상하리만치 나에게 집착했다. 굴러가는 나를 밟으려 앞발을 내리찍는데, 그 충격파가 내 고막을 탄성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쿵! 쿵쿵!

또 한 마리의 코끼리가 가세해서 머리가 진동만으로도 하얗게 변해 버렸다. 내 몸이 구르고 있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그게 어느 방향으로 구르고 있는 건지, 내 몸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파악이 안 됐다. 실눈에 코끼리의 발이 보일 때마다 일단 피하고 보는 것만이 내 목숨을 붙어 있게 해줬다.

계속 굴렀다. 피하고 공격하는 일 따윈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한참을 구르다 보니 코끼리들의 공격 범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바로 일어나서 방패를 던졌다. 이동에 방해되는 방패는 있으나 마나였다. 어차피 한 번 더 공격을 허용하면 이프리타라도 부르지 않는 이상 죽을 게 분명했다.

방패는 팽그르르 돌면서 날아갔다. 피해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코끼리가 코로 튕겨내 버렸다. 그것도 돌고 있는 모서리를 쳐내지 않고, 면을 쳐서 올렸다. 머리도 비상한 놈들이었다.

일어서긴 했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돌진과 채찍 공격엔 대응하지 못했다. 한 마리라면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놈들같이 무식한 놈은 아니었지만, 해리의 몸은 코끼리 한 마리를 상대해 봤으니까.

그러나 두 마리가 번갈아 공격하니, 아직도 정신이 없었다. 싸움을 처음 하는 초보자처럼, 적의 공격 범위에서 한참이나 멀어질 때까지 계속 움직이는 게 고작이었다.

“공격해라!”

“공격해! 챔피언이 꼴사납다!”

“우우우!”

관중의 야유가 이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해리를 응원하는 이들이었는데, 해리의 생사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거기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나는 그네들이 그러든 말든 피하는 것에만 열중했다. 한참을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코의 움직임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코는 후려칠 뿐만 아니라 가끔은 뱀처럼 내 몸을 감아오기도 했는데, 그 공격의 타이밍도 눈에 보였다.

내가 한 건 아니었다. 해리의 몸이, 그의 경험이, 몸은 내게 내줬지만 여전히 싸움을 즐거워하고 있는 해리의 사고가 답을 내주었다. 나는 그의 인도를 따라서 첫 공격에 성공했다.

치이익.

칼로 다리를 베려 했지만, 베지 못했다. 날이 빠진 검은 코끼리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나 보다. 코끼리가 더욱 발광했다.

“쿠오오오!”

순간적으로 빨라진 움직임에 또 코 채찍을 허용하고 말았다. 검 면으로 막으며 직접 타격은 피했지만, 아까처럼 날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크허억!”

벽에 등을 세게 부딪쳤다. 눈앞이 희미해졌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걸로 이번 퀘스트는 끝이라는 예감이 왔다. 끝나기 전에 정신을 잃어서 다행이다. 코끼리의 발에 밟히면 고통이 장난 아닐 테니까.

+ + +

어라?

정신을 차렸는데도, 밖이 아니었다. 눈앞에는 아직 코끼리가 있었고, 그 코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정신을 잃은 동안 해리가 나서서 움직인 건가?

그러나 내 감각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해리는 아직 사고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신에 마음속에 또 다른 인격이 느껴졌다. 해리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인격이 지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인격은 꽤 난폭했다. 아니, 미쳐있다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덤벼 봐, 덤벼 봐! 덤벼 보라고!”

미친 해리라고 부르고 싶은 이 인격은 웃으면서 코끼리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본래의 몸과 인격이라 그런 건지, 미쳐서 그런 건지, 좀 전의 나보다는 수월하게 피해내고 있었다. 물론 공격할 방법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의 검은 코끼리의 피부에 마찰열 정도를 일으키는 게 다였다. 귀를 공격하는 게 한 방법이 될 순 있겠지만, 코끼리의 공격을 피하느라 그럴 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상아의 위험도 간과할 순 없었다.

“쿠하하하! 좋아, 더 그렇게 나와 보라고!”

미친 해리는 그러든 말든 즐거워하며 계속 공격했다. 관중의 반응도 조금 달라졌다.

“나왔다! 미친 해리야!”

“피의 축제가 벌어질 거야!”

그동안 해리가 내 존재에 의문을 품지 않은 건, 이 미친 해리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다른 인격. 이 인격이 경기 중에 때때로 그를 지배하며 날뛰었기 때문에 내가 몸을 마음대로 움직여도 그러려니 한 것이다.

그가 이제껏 싸운 시합 중 절반 정도는 그의 힘으로 이겼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미친 해리의 도움으로 이겼다. 그건 관중도 알고 있었다. 미친 해리가 나타날 때, 해리의 성격이 바뀌는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그 싸움 방식이 바뀌기 때문이었다. 관중은 그 싸움 방식을 좋아했다.

피와 광기가 가득한 싸움이었기에.

캉.

미친 해리는 코끼리의 가죽에 몇 번이고 칼을 부딪쳤고, 기어이 칼이 먼저 부러졌다. 보통이라면 기세가 꺾일 법한 장면이었지만, 그는 그게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는 감아오는 코끼리의 코에 몸을 던졌다. 코끼리는 그의 몸을 그대로 당겨 꽉 조였다.

“크크크크킄.”

미친 해리는 웃음으로 비명을 대신했다. 몸이 부서지는 격통이 온몸에서 밀려왔지만, 웃으며 버텨냈다. 그리고 동시에 붙잡히지 않은 오른팔의 검으로 코끼리의 눈을 찍었다. 코끼리가 몸을 감아올리며 사정거리가 닿았고, 부서져 날카로워진 검은 그 눈을 뚫을 만했다.

“쿠르르륵!”

“크크킄!”

코끼리가 비명을 질렀고, 코를 더 조였다. 몸에 전해오는 고통이 더 심해졌다.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금방이라도 두둑하고 부서질 것 같았다. 그러면 즉사다. 다른 코끼리의 코도 다리 쪽을 감아왔다.

그러나 미친 해리는 눈이 찔려 발광 중인 코끼리의 눈을 검으로 다시 한 번 찍었다. 코가 몸을 더 죄어오자, 그는 한 번 더 찍렀다. 계속 찍렀다. 검이 눈을 파고 들어가 뇌를 헤집을 때까지 계속 찍어댔다.

“크크크큭!”

코끼리의 코가 힘을 잃고 풀어져도 그는 눈에 박힌 검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코끼리의 코가 그 다리를 감아 부서뜨리기 직전인데도 그랬다. 검 손잡이를 따라 피가 흘러 그의 머리를 적셨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관중은 그저 피가 튀니 즐거워했다. 죽이라고 하는데, 누가 누굴 죽이라는 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꼴을 더 볼 수 없어서 몸의 통제권을 빼앗아 왔다. 강렬한 저항이 있을 줄 알았는데, 미친 해리는 자리를 쉽게 내줬다. 그는 자리를 내주자마자 해리의 인격 속으로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는 그 존재가 느껴졌지만, 지금은 해리만 느껴졌다.

일단 검을 놓았다. 내 다리를 코로 감고 있는 코끼리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도중에 나를 찌르려고 대기 중인 상아를 어떻게 피해내고, 상체를 세우며 주먹으로 코끼리의 눈두덩을 쳤다. 큰 효과는 없었다. 가죽은 두꺼웠고, 제대로 힘을 실을 만한 자세도 아니었다. 코끼리가 발광하는 역효과만 있었다. 그 코가 내 하체를 완전히 감싸고는 비명을 지르게 했다.

“끄아아악!”

그 와중에 나는 손으로 코끼리의 긴 속눈썹을 잡았다. 노린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 몸집만큼 긴 속눈썹이 뭉텅이로 내 손에 잡혔다. 꽉 잡았다. 코끼리 코가 나를 땅바닥에 패대기치려는 걸 막을 수 있게, 아니면 그 속눈썹이라도 뽑히도록.

“쿠르르릉!”

“커헉!”

속눈썹은 뭉텅이로 뽑혔지만, 내 몸도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탱탱 볼처럼 튕기면서 내 몸이 경기장을 굴렀다. 코끼리는 아픈지 혼자서 발광했다. 내 쪽으로 오지 않는 이때가 기회인데, 이미 쓰러져 있는 다른 코끼리의 눈에서 검을 뽑아 공격해야 하는데,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체력문제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마비가 온 듯했다.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쿵, 쿵, 쿵.

마음의 간절한 외침과 코끼리의 발걸음 소리가 교차했다. 코끼리는 이제 정신을 차렸는지, 내 쪽을 향해 움직였다. 몇 초 뒤며 저 두꺼운 발에 밟힐 게 뻔했다.

그 순간, 내게는 움직이려고 애쓰는 한편으로 퀘스트 재시작을 떠올리는 순간, 해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절체절명인 그 순간에, 미친 해리가 다시 전면으로 나섰다.

“크크크크큭!”

미친 해리는 간발의 차로 코끼리의 발을 피해냈다. 그리고 땅을 휙휙 굴러 코끼리의 꼬리를 잡았다. 코끼리가 발버둥을 쳤지만, 그는 그 꼬리를 잡고 코끼리의 등 위로 올라갔다. 등 위는 잡을 것도 마땅치 않았고, 코끼리의 움직임에 몹시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균형감각과 속도로 등을 주파하더니 그 머리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지체할 것 없이 그 두 손으로 코끼리의 눈을 찍어 파냈다. 손이 물컹하면서도 저항이 있는 물체를 파고드는 느낌이 생생했다. 손은 대충 파고든 다음에 손가락에 걸리는 액체를 밖으로 긁어내 버렸다. 급박한 와중에도, 꽤 끔찍한 감각이었다.

피와 정체불명의 액체가 경기장을 수놓았다.

“쿠르르릉!”

코끼리는 그를 공격하려던 코를 더 뻗지 못하고 앞다리를 든 채 발광했다. 그는 자연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 후에는 코끼리의 발에 밟히지 않도록 열심히 굴렀다. 코끼리는 계속 날뛰었다.

그러나 두 눈이 없기 때문인지, 그의 위치를 제대로 잡진 못했다. 그는 코끼리와 멀찍이 떨어진 다음에 일어나서는 쓰러져 있는 코끼리 쪽으로 움직여 그 눈에서 검을 뽑았다.

그는 여전히 날뛰는 코끼리를 향해 이동해 그 다리를 공격했다. 부서진 검은 날카로워서 다리 가죽을 벨 수는 있었다. 하지만 코끼리의 크기에 비하면 생채기에 불과했다. 큰 타격은 아니었다. 대신 코끼리를 유인할 수는 있었다. 코끼리는 그가 공격하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계속 그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따라왔다. 두 눈을 잃은 복수심에 코끼리는 생각 없이 쫓아왔고, 결국 쓰러져 있는 코끼리의 몸을 밟고서 넘어지고 말았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관중은 끝을 예감한 듯, 한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넘어진 코끼리는 일어나려 했지만, 쓰러져 있는 코끼리 때문에 그게 쉽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미친 해리가 머리 앞에 도달했다. 두 눈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코로 그를 공격했겠지만,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코끼리는 완벽한 무방비 상태였다.

“크크크, 끝이다! 쿠하하하!”

그는 반 토막 난 검을 피가 흐르는 코끼리의 눈에다가 깊게 찔러넣었다. 검 끝에 걸리는 저항을 무시하고, 손잡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찔러넣었다. 죽음이 검을 통해 전해졌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면으로 나왔다. 미친 해리는 이다음에 코끼리의 머리를 헤집어 그 뇌를 뜯어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끼리의 마지막 발악이 있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움직이는 코, 이젠 의지도 없이 그저 이리저리 휘둘릴 뿐인 코에 맞아 날아갔다.

“최고다!”

“둘 다 죽었어!”

“최고의 시합이다!”

“와아아!”

젠장, 나 안 죽었다고.

관중이 내 죽음을 외치는 걸 들으면서, 나는 억지로 일어났다. 일어나며 얼마 없는 힘으로 오른손을 들었다. 이 시합은 승리의 포즈 없이 승리를 선언하지 않는다.

내 모습에 바람잡이가 나섰다.

“91번째 시합의 승자는 그랑의 챔피언, 무패의 해리!”

“우와아아!”

관중은 내 죽음에 환호했던 게 언제였느냐는 듯, 다시 환호했다. 해리를 부르는 소릴 들으면서 나는 선 채로 정신을 잃었다.

다음은, 해리가 알아서 하겠지. 몸도 마음도 정상이 아니야.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 해가 끝났네요.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말이죠.

내년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독자님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추천, 댓글을 기다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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