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한바탕 욕망을 털어내고 나니, 머리와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고 나니 시녀들의 손길도 차분히 넘길 수 있었다. 나도 만족했지만, 그녀들도 만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의 행동에 좀 전과 같은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 모든 게 그저 나의 착각이었을 수도…….
그 뒤 온몸에 기름을 칠하고, 갑옷과 깨끗한 옷을 입었다. 옷은 이전에 입었던 것과 비슷한 것으로 중요부위와 엉덩이만 겨우 가릴 수 있었다. 갑옷도 별반 다를 바 없어서, 오른쪽 어깨와 팔, 무릎 아래만 가리는 게 다였다. 결과적으로 기둥 같은 허벅지와 빨래판 같은 복근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거기에 기름칠로 마무리해 근육에 윤기를 더하니, 시녀들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남자인 내가 봐도 놀라운 몸매인데, 여자들이야 오죽하랴. 그 눈빛에 내 마음도 동하기 시작했지만, 해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응해주고서 복장을 갖추자마자 목욕탕을 나왔다. 이번에는 아무런 안내자도 없이 홀로 자크의 방으로 돌아갔고,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서 그레고리아 백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은 경기장에서 그리 멀리 않았다. 경기장이 도시 중심부에 있었고, 영주의 저택은 당연히 중앙에 있었으니 10분도 안 되어 도착했다.
영주의 저택은 매우 컸다.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과 비교해도 그리 꿀리지 않았다. 정문을 통과하고도 2~3분여를 더 달려서야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종의 안내를 받아 한참을 걸은 후에 백작이 있는 집무실 앞에 섰다.
“백작님, 검투사 감독관과 검투사 해리가 왔습니다.”
“들어오게 해.”
안에는 큰 책상이 있었고, 그 크기에 걸맞은 거구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사람 둘 정도는 허리에 두른 듯한 뱃살인 인상적으로, 혼자서 걸어 다닐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게 만드는 체형의 소유자였다. 우리가 들어가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의 걸음에 방이 쿵쿵 울렸다.
“안녕하십니까, 백작님. 오늘도 백작님의 은혜로…….”
“그런 말을 됐네. 우리 사이에 무슨 격식인가. 어서 오게나. 밖에서 맞아주지 못한 게 아쉽군.”
“아닙니다.”
“자, 자리에 앉지.”
그의 손짓에 따라 책상 앞에 놓여 있던 회의용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백작이었다.
“승리를 축하하네. 자네의 무용이 이 도시에 가득하구만.”
백작의 목소리는 예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크고 높았다.
“이렇게나 잘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자네 덕분에 이 도시에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만 해주게나……. 아,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없는 건가? 이대로라면 검투사 최초로 자유의 인물이 되는 걸 테니까. 놀라워. 내 아래서 전설이 탄생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전설.
지금 해리가 도전하고 있는 건 100번 연속 승리다. 검투 시합이 시작된 이래로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대위업이다. 그냥 100번 연속 승리를 한 사람도 없는데, 그가 도전하고 있는 건 더 어려운 것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100번을 싸워 100번을 다 이겨야 한다. 전설이라고 불릴만한 업적이고, 그만큼 보상도 크다.
자유.
노예 검투사에게 이보다 큰 보상은 없다. 해리는 지금 자유를 얻기 위해 매일매일 싸우고 있다.
그런 해리의 분전 덕분에 백작은 돈을 많이 벌었다. 누구도 성공한 적 없는 일이고, 그 자체로 위대한 일이었기에, 현재 전국에서 귀족들이 몰려와 이 유흥을 즐기려 했다. 귀족뿐 아니라, 일반 여행자들도 많이 몰려왔다. 백작의 주머니가 두둑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리는 백작의 말에 한 박자 쉬고 대답했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검투사였고, 백작이 운영하는 경기장의 호프였지만, 그래 봐야 노예일 뿐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백작 앞에서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과찬이십니다. 모든 게 백작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백작은 그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 눈은 웃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제 몇 번이나 남은 거지?”
질문에는 자크가 대답했다. 해리는 필요한 말만, 이제껏 백작을 만날 때마다 지켜온 방식이었다.
“10번입니다. 주인님.”
“10번이라, 최고의 전사에게 걸맞은 최고의 상대들을 구해놔야겠군. 내가 자네의 마지막 검투시합을 화려하게 장식하겠네. 앞으로도 쭉 그렇게만 하게나. 그럼 자유와 명예를 동시에 얻을 게야.
“백작님을 위해서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더 열심히 하면 이거 왕이라도 되는 건가? 하하하.”
해리의 말에 백작은 묘하게 웃었다. 그 뒤로도 백작이 말을 하고 자크와 해리가 응하는 대화가 쭉 이어졌다. 내용은 대부분 해리를 칭찬하는 이야기였다. 내일 경기도, 앞으로 남은 경기도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게 진심인 것 같지는 않았다. 해리의 시선 속에는 여전히 웃지 않는 백작의 눈동자가 들어가 있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백작이 자크와 해리를 일으켰다.
“자네를 보니 이미 준비가 다 된 것 같긴 하지만, 조금 더 꾸며야 할 것 같으니 이제 이야기는 그만해야겠군. 들었겠지만, 조금 있다가 너의 승리를 축하하는 만찬이 있을 게야. 그리고 너를 찾으시는 분이 계시니, 그 후에는 그분을 찾아가면 된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하겠지만, 그분께 최선을 다하는 것 잊지 말고. 네가 자유의 몸이 된다고 해도 꼭 필요할 테니까. 잘 알고 있겠지?”
“…….”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해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짜증이, 조금 전 경기장에서 연회를 연다고 들었을 때의 감정과 비슷한 거부감이 일어 입이 무의식적으로 닫혔다. 얼굴도 약간 굳었다. 자크가 옆에서 재빨리 끼어들었다.
“제가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껏 다들 만족하시지 않았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그는 발로 해리의 발 위에 살짝 얹었다. 해리는 그제야 바른 대답을 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나가 봐.”
백작은 해리의 반응에 눈을 빛낸 채, 얼굴로만 웃었다. 출렁거리는 뱃살과 늘어난 얼굴 살만 보면 미련한 사람일 것 같은데, 하는 행동이 만만치가 않았다.
+ + +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홀. 홀 안에는 해리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해리에게 진짜 축하를 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노예의 영광은 모두 주인의 몫, 사람들은 그레고리아 백작에게 축하를 건넸다.
“축하합니다. 백작님. 백작님의 용맹이 수도에까지 들려와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오늘 보니 소문이 거짓이 아니더군요.”
“백작님, 역시 보는 눈이 뛰어나십니다. 어디서 저런 검투사를 구하셨습니까? 저에게도 그 안목을 베풀어 주실 수 없으신지요.”
걔 중에는 백작보다 지위가 높은 이들도 있어 백작은 때론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레고리아 백작, 백작의 수완은 참으로 놀랍군. 이렇게 재밌는 경기는 오랜만이었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즐기셨다니 다행입니다. 내일부터는 더 재밌는 시합이 펼쳐질 테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해리의 승리가 더해갈수록, 그런 이들은 늘어났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는 백작의 얼굴에는 힘들다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즐거워 보였다.
해리 주변에도 사람들은 있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오호호, 이거 봐 언니, 내 손가락이 튀어나와.”
“역시 챔피언이야. 근육이 장난 아닌데?”
귀부인들, 그리고 젊은 처자들은 홀 중앙에 마네킹처럼 서 있는 해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다. 그녀들은 손가락으로 해리의 두툼한 근육을 찔러 보거나, 탄탄한 등과 가슴을 터치했다. 목욕탕의 시녀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녀들의 시선은 끈적끈적했고, 기대감에 차 있었다.
“아까 그 장면이 위험했지.”
“그래, 그건 철렁했어.”
“그래도 내가 뭐랬나. 해리가 이길 거랬지. 이 팔뚝을 보라고, 그따위 비실비실한 고블린 놈들이 상대할 수나 있을 것 같아?”
귀족의 자제 중 남자들은 그 옆에서 해리의 싸움에 대해 말을 나눴다. 이 홀에 있는 사람 중에 그나마 해리를 해리 그대로 받아들이는 부류로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해리가 지는 장면도 보고 싶지 않아? 아까 허벅지에 칼 꼽힐 때 좀 재밌었어. 푸른 피 사이에 붉은 피가 좀 섞이니까 볼 만하던데.”
“그것도 그래. 좀 피가 튀어야 재밌을 텐데, 이건 뭐. 늘 압도적인 것도 재밌지만, 이젠 슬슬 질린달까.”
“백작님도 잘 알고 계실 거야. 내일부터는 좀 재밌어지겠지.”
또 한 쪽에서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조용히 해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해리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슬쩍 웃었는데, 해리는 그럴 때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끔찍했다. 중년의 아저씨들이 그의 근육을 눈으로 훑으며 웃음을 흘린다.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입으로는 그의 용맹에 찬사를 날리지만, 그 속마음은 그를 아래에 두고 싶은 것일 테다.
해리는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했다.
그도 처음에는 좋아했다. 노예로 자라, 이렇게 많은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는 장소는 처음이었으니까. 경기장에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화려한 홀, 춤추는 무희들, 처음 들어보는 음악, 웃음꽃을 피우는 귀족들. 모든 것이 신기했고, 즐겁게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젠 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들의 웃음꽃 뒤에 무엇이 있는지. 이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모든 게,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하며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도.
그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지금 느껴지는 감각들 속에서 나 역시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참아야 했다. 그래 봐야 그에게 도움이 될 것도 아니니까. 그도 억지로 참고 있는데, 내가 날뛰어 봐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홉 번째 퀘스트, 해리를 노예에서 벗어나게 하세요]
그러려면 이 연회를 최소 10번을 더 겪어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하나의 위안거리는 있었다. 그에게도 그랬고, 나에게도 그랬다.
레베카 여 백작이 그 이유였다. 다른 귀족들과 비슷하게 노출이 많고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그녀가 다가오는 순간, 해리의 심장이 다르게 뛰기 시작했다.
“요즘은 널 보기가 힘들구나.”
여느 귀부인처럼 다가와서 해리의 몸을 만졌지만, 조용한 목소리로 해리에게 말 거는 그녀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그 목소리에는 진짜 아쉬움이 넘쳤다.
“그래도 내일은 널 볼 수 있을 것 같구나.”
해리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녀는 그 말을 하고 이미 그를 스쳐 지나가 버렸지만, 그는 그 향기라도 맡고 싶은 심정에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눈으로는 계속 그녀를 쫓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그는 그 얼굴을 몰래몰래 훔쳐보았다.
그녀의 존재는 그가 이 지루하고, 역겨운 연회를 참을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또한, 그녀는 내게도 하나의 위안거리가 되어 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영혼의 소유주였기 때문이다.
미망인인 레베카 백작은 아냐 누나를 닮았다.
+ + +
“으아앙.”
“하아, 하아.”
여인의 교성이 울려 퍼지는 방 안. 해리가 허리를 한 번 더 찔러 올리니, 그녀의 등이 경련한다.
“그래, 좋아. 좋아. 좋아. 역시 챔피언이야.”
연회가 끝난 후, 해리는 시녀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한 번 치장을 받았다. 시녀들은 그의 온몸을 씻기고, 얇은 옷을 입히고 가면을 씌워 내보냈다.
이번에도 시녀들은 해리를 유혹했지만,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한 번 털어낸 것도 한몫했지만, 여기서 시녀들과 관계를 맺는 게 연회장에서 해리를 보는 귀부인들의 태도와 겹쳐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세히 따지고 들면 둘을 같게 보기는 힘들지만, 심정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녀들이 먼저 유혹하긴 했지만, 조금 전의 나는 시녀들을 그저 성욕 배출구 정도로만 봤으니까.
이어 해리는 큰 침대가 있는 방으로 안내를 받아 움직였다. 아무도 없는 방이었는데, 기다리고 있으니 살집이 퉁퉁한 여자가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해리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았다. 귀부인들에게 몰래 팔려 다니는 것, 그게 챔피언의 또 다른 일이었다.
강한 남자를 안고 싶다는 그녀들의 소망을 들어주는 일, 그리고 강한 남자를 아래에 두고 싶다는 그녀들의 소망을 들어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악, 그만, 멈춰! 그래, 옳지, 옳지.”
멈추라고 하면 멈춰야 하고,
“그럼, 어디 찔러 봐. 아악, 그래, 더, 하학, 더, 더어!”
하라고 하면 미친 듯이 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짐승 같은 힘과 절대적인 복종. 그는 그 뜻대로 그녀를 밀어붙였다.
그래도 오늘은 좀 나은 편이다. 나이 먹은 과부, 때론 그레고리아 백작처럼 생긴 과부가 잠자리를 청해 올 때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일이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필사의 의지로 성욕을 끌어올려야 했다.
“하아앙!”
그의 아래에 깔린 이름 모를 귀부인은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그의 힘에 좀 전부터 비명을 지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온몸을 떠는 걸 보니, 정말로 좋은 가 보다.
그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름 모를 귀부인이 그나마 나은 편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그의 머리는 좀 전에 레베카 백작이 말한 한마디만 떠올리고 있었다.
‘내일이면 레베카 백작님을 뵐 수 있어.’
그나저나 이렇게 체력을 빼놓으면서 100일 동안 쉬지 않고 싸우라니, 그게 가능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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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조금 많이 늦었습니다.....
아하하하.
내년에는 올해보다는 많이 쓸 거예요. 분명합니다.
댓글과 추천을 기다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