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해리>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받으세요! 100개의 퀘스트를 깰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시작’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아홉 번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늘 보는 메시지와 함께 눈앞에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이 몸은 검을 들고서 키가 작고 팔다리가 가는, 이족 보행형 생물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인간처럼 생겼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건 감이 왔다. 피부가 검고, 눈이 붉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멀리에 돌로 된 큰 구조물이 있었고, 수백 이상의 사람들이 그 위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치형 입구 같은 게 보이고, 대부분의 사람이 손을 들고 입을 벌린 모양새를 보아하니, 한 건물이 연상됐다.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는 것도 그 생각에 확신을 줬다.
바로 콜로세움. 내 짧은 지식으로 볼 때, 이 몸이 있는 곳은 그에 준하는 공간이 틀림없다. 사람들이 피를 연호하며 즐거워하는, 삶과 죽음이 오가는 공간 말이다.
거기에 직접 참가하고 있는 이 몸은 아마 검투사겠지. 그럼 그 신분은 뭘까. 노예? 평민? 아니면 심심풀이로 참가한 귀족일지도 모른다.
그 신분이 뭐냐에 따라서 퀘스트 난이도가 달라질 텐데, 지금까지의 경험을 돌아보면 왠지 노예일 것 같다. 그리고 그렇다면 굉장히 귀찮은 퀘스트가 될 테지. 아주 길어질 것 같다.
좋지 않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 조사했을 때보다 빈도가 줄어들고는 있었지만, 그게 진짜 빈도가 줄어든 건지, 정보가 통제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무언가 진행되고 있다는 거고, 내가 거기에 휘말려 있다는 것이다.
정보를 찾고, 힘을 길러야 하는데, 방법이 마땅치 않다. 퀘스트를 빨리 깨는 것밖에 없는데, 이런 식이라면 언제 퀘스트를 다 깰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런 점을 제외하고서라도 퀘스트가 길어지는 건 문제였다. 퀘스트를 진행하는 도중에는 퀘스트에만 빠져들어 다른 생각을 못 하기 때문이다.
지난 퀘스트 중에도 그랬다. 어린 루이스와 함께 생활하고, 사랑의 감정에 웃다 보니, 내가 처한 상황이 뒷전으로 밀렸다. 정신적 피로, 아니 마음의 피로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는 그냥 쉬고 싶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가벼이 넘길 수 있는 게 아닌데도,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매일 검술 수련을 빼먹지 않는 게 전부였다.
유일하게 마음이 여유로운 퀘스트 사이 시간은 너무 짧고, 퀘스트는 쉴 새 없이 밀어닥친다. 지금부터는 또 퀘스트에 빠져들어 이 고민을 하기 싫어하겠지.
제발, 빨리 끝나라.
평행세계에 존재하는 나의 삶을 직접 경험하는 건 여전히 즐거운 일이었고 이래저래 느끼는 것도 많았지만, 단순히 즐기기에는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후우, 어쨌든 지금은 퀘스트를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
“시작.”
시작함과 동시에 내 쪽으로 밀리는 검을 다시 밀어내야 했다. 막고는 있었는데, 힘이 달린 모양이었다. 저 비실비실한 생물에 밀릴 정도라면 이쪽은 완전 해골인가 싶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눈에 보이는 이 몸의 팔뚝은 근육으로 가득했다. 현실의 내 팔뚝의 2배는 되는 굵기였다. 그런데도 밀린 건, 온몸에 그만큼 힘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들어와서 천강지체의 보정을 받지 않았다면, 이걸로 큰 위기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키릭!”
밀려나는 생물, 고블린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작은 소검을 부딪쳐왔지만, 완벽히는 아니라도 힘이 돌아온 내 칼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반대로 내가 밀어냈다. 소검과 그 온몸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끼이익.”
가볍게 날아가며 비명을 지르는 고블린. 그 고블린에게 다가가 결정타를 날리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고블린이 빠지고 난 빈자리에, 다른 고블린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과 비슷하게 생긴 작은 소검이 내 가슴을 찔러왔다.
챙.
이번엔 그 검을 쳐내고 그 몸통을 발로 차 버렸다. 고블린이 좀 전 녀석처럼 힘없이 날아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좌우에서도 검이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어떻게 대응할지 떠올릴 새도 없이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오른쪽 검을 검으로 쳐내고, 그 공간으로 몸을 밀고 들어가며 왼쪽 검을 피했다. 이어 몸의 돌리며 다시 검으로 왼쪽 고블린을 목을 베었다.
푸른 피,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푸른 피가 공중으로 날았다. 계속 몸을 회전시키면서 이번엔 왼 주먹으로 오른쪽 고블린의 머리를 강타했다. 입에서 하얀 것과 역시 푸른 피가 튀어나왔다. 고블린은 고개가 꺾인 채로 공중에서 회전했다. 즉사였다.
“우와아아아!”
지켜보던 관중의 목소리도 같이 공중을 날았다. 시작부터 주위는 되게 시끄러웠다. 내 이름, 해리를 연호하는 소리, 고블린을 응원하는 소리, 그저 피를 갈구하는 목소리, 십여 마리 고블린의 괴기한 숨소리와 그들의 발걸음 소리로,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검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푸욱.
쇠붙이가 옆에서부터 허벅지를 완전히 관통했다. 아팠다. 앞으로 넘어지려고 하는 걸 입술을 깨물며 참고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쇠붙이를 허벅지에 힘을 줘 근육으로 잡았다. 그리고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후회했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그래도 쇠붙이의 움직임은 멈췄다. 그 쇠붙이를 들고 있는 작은 괴물의 동작도 멈췄다. 그 작은 괴물의 머리에 검을 쑤셔 넣었다.
“크아아악!”
허벅지에서 밀려오는 격통에 비명을 지르며 고블린의 두개골을 깨부순 검을 뽑아냈다. 적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쉴 수가 없었다. 검을 휘두르고, 살점을 베어야 했다.
아픔을 참고, 분노를 터트렸다. 팔의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고블린들의 사지가 하나씩 공중을 날았다. 그들의 검도 내 피부를 할퀴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더 맹렬한 분노로 그들에게 복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경기장엔 고블린 한 마리만이 남았다. 한쪽 다리와 팔이 잘린 고블린은 나머지 몸뚱이로 바닥을 기어 나에게서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하나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채웠다. 나는 그 목소리에 이끌려 고블린 앞에 섰다. 나도 피에 취한 건지, 격통에 정신이 몽롱해진 건지, 내 몸을 내가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키킥, 키끽, 키이익.”
인간이었다면 애처로웠을 것 같다. 온몸에서 피가 흐르고, 살아나려고 반쪽짜리 몸을 바동거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붉은 눈에서는 그 어떤 안타까움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고블린은 몸으로는 떨고 있었지만, 그 눈을 보면 그게 거짓인 걸로만 느껴졌다. 푸른 피와 붉은 눈이 인간에게서 볼 수 없기 때문인지도.
검을 들어, 그 삶에 종지부를 찍어 주었다.
“우와아아아아!”
관중의 함성이 몇 배로 터졌다. 수만 명이다. 경기장을 찾은 수만 명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경기장이 흔들리고 땅이 진동했다. 내 고막과 뇌까지도.
“우와아아아!”
나 역시 소리를 지르며 검을 높이 들었다. 생각을 마비시키는 고통과, 생사를 오가며 쌓인 긴장감을 허공에 쏟아냈다.
“환호하라! 그랑이여! 더 크게 소리 질러라! 그랑이여! 여기 100마리의 고블린과 싸우고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낸 검투사가 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을 90번이나 뛰어넘은 검투사가 있다! 그 용맹한 이름을 다 같이 외쳐라!”
귀빈석 옆에 선 바람잡이의 말에 모든 관중이 내 이름, 이 몸의 이름을 외쳤다.
“해리!”
“해리!”
“해리!”
+ + +
“으읔!”
쇠붙이가 허벅지를 단번에 빠져나가는 감각에 머리가 마비되었다. 나를 고친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내 고통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 뒤에는 더 심했다. 피를 막기 위해 거친 천으로 상처를 막고, 천으로 대충 싸매는데 허벅지가 끊어지는 듯했다.
“카 아악!”
지금 내 상처를 싸매고 있는 이들은 이 경기장에 소속되어 있는 자칭 치유사란 놈들이다. 하지만 말만 치유사지 할 줄 아는 건 뽑고, 꿰매고, 싸매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검투사는 노예라고 인간 취급을 하지 않고 막 대한다. 그래서 이렇게 비명을 질러대도, 치유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내 양팔을 누르고 있는 이들은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이제 가 봐.”
치유사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일어나라고 종용했다. 그 무신경함에, 너 같으면 일어날 수 있겠냐고 쏘아주고 싶었다. 안 그래도 아픈데, 고친답시고 상처를 들쑤셔서 더 아프게 해 놨다.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일어나야만 했다. 눈 딱 감고 다친 오른발로 나무 침대 아래를 짚었다. 입술 사이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고통스러웠다. 다시 눕고 싶은 마음을 참고서, 발을 내딛으며 치료실의 문으로 향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천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저 빌어먹을 치유사 놈들이 내 상처를 더 헤집어 놓을 테니까. 기억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쾅.
문을 나서고 나서야 벽에 몸을 기대 잠시 호흡을 골랐다. 시합이 끝나자마자 끌려오다시피 치료실에 왔으니, 아직 여기서 엎어질 수는 없었다. 기억에 따르면 시합이 끝나면 일단 감독관에게 가서 보고해야 했다. 그다음은 나를 소유한 주인을 만나야 하고.
“크윽.”
여러 일을 통해 고통에는 익숙해졌지만, 고통은 고통이다. 신경이 마비되지 않는 이상 아픔은 계속 밀려오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아프면 소리를 지르는 건 일반적인 일이다. 물론 안 그럴 수도 있다. 이보다 더한 고통도 겪었는데, 이 정도쯤이야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그럴 필요가 있는가? 싸움은 끝났고, 멋있게 보일 사람도 없는데.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이 고통을 느끼고 있어야 하는 거지? 통제권을 넘겨주고 감각을 끊어 버리면 되잖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을 막 행동에 옮기려다가 멈췄다. 더 생각해 보니, 고통을 경감시킬 방법도 있었다. 넘겨줄 때 넘겨주더라도, 회복한 뒤에 넘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냥 넘겨 버리면 이 몸의 주인, 해리에게 왠지 미안하니까.
“힐.”
허벅지에 가져다 댄 오른손에서 흰빛이 났고, 그 빛은 허벅지로 옮아갔다. 빛은 잠시 허벅지를 둘러싸고 있다가 이내 사라졌다. 동시에 고통도 반절은 없어졌다. 완전히 낫진 않았다. 피가 여전히 천 사이로 흘렀다. 의심을 살 거라는 걱정에 그런 선택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힘이 모자랐을 뿐이다.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체력이 바닥나 있던 몸이었다. 절반 정도 치유한 것도 용한 거다. 그 덕분에 지금 서 있기 조자 힘들어졌지만, 아까보다는 낫다. 아픈 것보다는 훨씬 낫다.
아무튼, 의도한 대로 힐을 사용하고선 몸의 통제권을 해리에게로 넘겼다. 해리는 나의 존재에 대해서 어렴풋이 눈치를 챘지만,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 일어난 상처 치유도 연결된 감각을 통해 다 알았겠지만, 그냥 넘어갔다.
검투사라서 그런가, 그는 좀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가 복도를 한쪽 손으로 짚으면서 감독관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 작품 후기 ============================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제의 표현에 조금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약간의 탈력감'이란 정말 아주 약간의 탈력감입니다. 천강지체 습득 후 주인공은 하루 내내, 아니 2-3일 이상 검 수련을 할 수 있습니다.(물론 검기를 쓰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입니다.) 그래도 손가락이 약간 베인 정도로 한시간 수련한 힘이 빠진다면 정말 효율이 안 좋은 거죠. 큰 상처라도 나면 체력 전부 소진할 각오를 하고 써야 합니다.... 라는 걸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법 문제는 제 설정과 일반적인 통념이 살짝 다른 것 같으니 설명하겠습니다.
힐 - 기본적인 치유입니다. 육체적 치유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토르 여신은 다른 치유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있다면 여러사람에게 동시에 치유를 하는 '그랜드 힐' 정도 입니다.
리커버리 - 상태이상 회복입니다. 정신적 상태이상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홀리 웨폰 - 버프.
홀리 스트라이크 - 공격마법.
그랜드 크로스 - 엄청 센 공격마법이라서 힐을 선택한 겁니다.
댓글과 추천을 기다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