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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74화 (74/160)

74화

단숨에 끝내 버릴 수 있는 쉬운 퀘스트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주도권을 빼앗아 저 쪽에 앉아 있는 릴리에게 고백해 버리면 될 테니까.

하지만 참았다. 그래도 소년의 경사스런 첫 고백인데, 그렇게 간단히 마무리하기엔 좀 미안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금 끝내나, 오늘 하루를 다 쓰고 끝내나 나에겐 마찬가지니까 좀 더 좋은 타이밍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이들이 있는 교실에서 갑자기 고백하는 건 그 동안 쌓아온 루이스의 이미지와 너무 동 떨어졌다.

그러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그 후 수업을 전부 땡땡이 친 것이다. 뒤에서 릴리가 ‘도망가지 마, 이 게으름뱅이야’ 하는 것도 한 귀로 흘려듣고서는 신전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에게는 이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신학 기초를 제외하고는 땡땡이에 큰 제재가 없었으니 굳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지루한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가 움직이는 것을 따라 마을과 산과 들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마을의 개구쟁이들과 한바탕 싸우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산에 가서 곤충을 잡기도 하고, 들판에서 작은 동물들과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다.

“우하하하하하.”

이대로 8시간이 지나서 잠에서 깨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잠깐 들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아무걱정 없이 마구 웃고 있는 루이스를 보니, 내 마음이 다 편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뭘 해도 온갖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져서 편하게 웃지 못하는데, 그의 웃음은 달랐다. 자유롭고, 가벼워서 날아다녔고, 진정으로 기뻐했다. 어린 아이의 시원한 웃음이 효율을 따지는 내 머리까지 멈추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돌아다닌 후에, 그는 귀향본능을 발휘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다른 아이들의 과업이 대충 마칠 시간에 맞춘 움직임이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말이 이 세계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전에서는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쳤다. 오전에는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일을 해야 했다. 무리한 일을 시키진 않았다. 신전 소유 농장에서 잡풀을 뽑는 다거나, 주변 청소를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마저도 그렇게 엄격하진 않아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농장에서 일을 하기보다는 뒹굴고 뛰노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가면 알아서 제 할 일을 하게 되는 것도 보통이었다. 받은 게 있으면 뱉어내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고, 알게 모르게 그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게 대충 10살 전후였다. 우리 세계에 비하면 이르지만, 대략 중세쯤으로 짐작되는 이 세계에서는 그리 빠른 건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상황에 처해있는 아이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하토르 여신의 신전은 고아들의 천국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았다.

그런 천국에서 사는 아이들이라 마음이 관대한 건지, 다른 아이들은 낮 동안 사라졌다가 얌체처럼 밥 때에 맞춰 나타난 루이스를 타박하지 않았다. 아직 놀기에 바쁜 어린아이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소년 소녀들도 루이스를 관대하게 받아줬다.

참 잘 자란 아이들이다. 내 마음속에 절로 아빠미소가 지어졌다. 그에 반해 루이스는 정말 어린 아이였다. 그 순수함에 감동한 게 바로 조금 전이었지만, 이젠 철 좀 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였다. 지금은 신전의 보호아래 있지만, 그는 결국 고아다. 스스로를 책임여야 하는 입장인데, 이렇게 천방지축이니.

그러나 그 중에 딱 한 명, 릴리만은 천방지축인 그를 가만히 넘기지 않았다.

“야, 루이스! 또 어딜 갔다 온 거야.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나 하나 빠진다고 뭘 그렇게 차이 난다고. 내일 열심히 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해 놓고 열심히 한 적이 있으면 말도 안 해. 너 매일 도망치잖아.”

“흥, 그러면 좀 안 되나? 내가 나중에 신관 되면 다 갚을 테니까 걱정 마. 형이나 누나들도 아무 말 안 하는데 너만 왜 그러냐?”

얄미웠다. 얄미웠지만 어쩐지 미워할 수가 없었다. 루이스 혼자였다면 주변 모두가 그에게 돌아서서 그는 금방 외톨이가 되었을 거다. 하지만 루이스와 릴리가 만드는 분위기가 알콩 달콩해서 보기만 해도 얄미운 감정보다는 즐거운 감정이 먼저 들었다. 아까는 몰랐는데, 둘이 대화하는 중에 보니까 둘이 서로를 신경 쓰고 있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걸 아니까 다른 사람들이 별 말 안하는 것 같았다.

이곳은 사랑의 신전, 일보다는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걸까.

“……언니, 언니가 좀 말해 봐요. 쟤 저렇게 맨날 도망만 다니면 안 되는 거잖아요?”

릴리가 도움을 청한 13세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녀의 얼굴엔 엄마미소라 불릴 만한 게 걸려 있었다.

“괜찮아. 어릴 때는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예전에는 저랬는걸.”

“거짓말. 언니가 얼마나 성실했는데, 저런 베짱이랑 비교해요. 저런 게으름뱅이는 굶어 죽어봐야 정신을 차릴 거예요.”

그녀가 자못 진지한 어투로 말을 내뱉었는데, 그 내용이 조금 심했다. 그도 그렇게 느꼈다. 아까부터 두근거리던 그의 심장이 일순간 정지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럼 그걸 그대로 표현하면 될 텐데, 그는 반대로 표현했다. 충격을 감추기 위해 더 공격적이 되었다.

“야, 그건 말이 너무 심하잖아. 이 마녀가.”

마녀. 그를 하나하나 가르치려 드는 그녀에게 그가 붙인 별명이었다. 그를 제외하면 그다지 개구쟁이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만 유독 엄격했다. 수업시간 땡땡이치는 것도, 오후 과업에 빠지는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매일 벌어지는 일에 다들 포기했지만, 그녀만은 끝까지 그를 붙들고 그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녀의 마음은 훤히 보였다. 그녀 스스로 깨닫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야 뻔했다. 제 3자라서 그럴까, 나는 이렇게 잘 보이는데, 당사자인 루이스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어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녀가 강하게 나온다고 강하게 나가기만을 고집하는 어린애니까. 남자가 되려면 멀었다.

“마녀? 마녀? 너! 그 말 취소해. 내가 왜 마녀야!”

그녀가 마녀란 말에 울컥하자, 그는 속으로는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거야 그의 속마음이고 겉으로는 절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마녀지, 마녀를 마녀라 부르는 데 왜 그래? 이 마녀야!”

“너 거기서! 잡히면 죽여 버릴 거야.”

“피, 잡아 보시지!”

그녀가 쫓아오자 그는 잽싸게 도망갔다. 하루 종일 뛰어다녔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엄청나게 빠르게 뛰었다. 그녀가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어느새 그는 별빛만이 빛나는 들판 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난 왜 릴리의 화만 돋우는 거지?’

‘아니야, 내가 왜 마녀의 기분을 신경 써야 하는 거야?’

여전히 내적갈등을 겪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이 퀘스트가 그리 간단하지만 않을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예상은 적중했다.

한 번 나갔다 들어오니 밤이 되었다. 잠에 들기 직전이었는데, 이번엔 주저하지 않고 내가 몸을 움직여 여자들 방으로 갔다. 이대로 8시간 동안 루이스의 자는 걸 구경하는 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 릴리 좀 불러줘.”

막 방에 들어가려는 꼬맹이에게 릴리를 불러 달라고 말을 했다. 꼬맹이가 응하고 들어가자,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루이스가 난리를 쳤다.

‘뭐야, 뭐야, 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왜 이래?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이잖아. 꿈인가? 아까부터 너무 이상해.’

‘꿈이 아니야.’

‘응? 뭐야? 넌 누구야?’

‘나는 너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너의 속마음이라는 거지. 너는 이러고 싶어 하는 거잖아?’

‘내가 뭐를 하고 싶다는 거야!’

‘고백이지, 뭐기 뭐야.’

‘뭐?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고백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그만 둬! 그만 두라고!’

그가 그러든 말든 나는 문을 열고 나오는 릴리를 보면서 신전 밖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삐진 듯, 표정을 굳히고 있었지만 아무 말 없이 따라왔다. 루이스는 그 모습에 또 두근대면서도, 이건 아니라고 계속 소리쳤다. 물론 10살 소년의 정신력으로는 내 정신방어를 뚫을 수 없었다.

“진짜, 무슨 일인데? 왜 밖까지 끌어내고 난리야.”

밤이라 밖에는 아무도 나다니지 않았다. 불만스런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일단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갑자기 고백을 한다고 이 퀘스트가 끝날 것 같진 않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고백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이 고백에 대한 시스템의 판단을 봐야 그 다음 일을 생각할 수 있다.

“릴리.”

“……갑자기 왜 그래?”

‘그만 둬!’

내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깔고 진지하게 그녀의 이름을 말하니까, 그녀가 당황했고, 그도 당황했다. 밝은 달빛에 그녀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귀엽다. 아냐 누나도 어릴 때 이렇게 귀여웠을까? 그 누나는 지금도 귀여운 편이지만.

“좋…….”

이어서 ‘좋아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 입이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내 안에서 루이스의 감정이 증폭되면서, 내 통제권을 일부 빼앗은 것이다. 그렇게 얼마간 멈춰 있으니까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내 말을 얼핏 들었고, 그 뒤의 말까지 짐작한 듯, 일부러 꾸미는 투가 역력했다. 얼굴도 더 붉어졌다.

“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좋……아하는 사람 있어? 없으면 내가 소개시켜 주려고, 마을의 걔 있잖아. 왜 정육점 아들. 걔가 널 좋아하는 눈치던데, 네 생각은 어때? 너 같은 마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고? 걔랑 결혼하면 고기는 잔뜩 먹을 수 있잖아? 마녀와 고기라, 완전 잘 어울리네.”

나는 버티고 버텼지만, 10살 소년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 죽기 아니면 살기의 심정으로 덤비는 그에게 퀘스트를 깨볼까 하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마음은 통하지 않았다.

“…….”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은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표정으로 다 알 수 있었다.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반면에 그는 그 얼굴을 보고서도 사태를 깨닫지 못했다. 그저 위기를 넘겼다며 안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악.”

그가 정강이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그의 정강이를 확 차 버린 것이다. 감각을 공유하는 나도 아팠지만, 정말 이 녀석은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다.

릴리, 좀 더 패 버려! 남자랑 북어는 3일에 한 번씩 패야 되는 거야…… 아니, 여자랑 북어였던가? 아무튼 남자망신 다 시키는 이런 놈은 패야 말을 듣는 거야! 파이팅!

그 생각이 닿은 건지, 그녀의 공격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정강이를 붙잡고 동동 뛰는 루이스를 향해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렸다. 잘 보지도 않고 때리는 거라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는 정신이 없었다. 한 번씩 정타가 들어오기도 했고,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러는 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보, 멍청이, 똥개, 해삼, 멍게, 말미잘, 미련곰탱이야!”

그러다가 그녀는 욕 같지도 않은 말을 기관총처럼 뱉어내고는 안으로 뛰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그는 충격에 휩싸였다. 내게는 욕 같지도 않는 욕, 오히려 너무 귀여워서 안아주고 싶었던 모습이었지만, 그에게는 정말 심각한 욕이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그는 황당했다. 그는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 몰랐다.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그가 미처 말로 꺼내지 못한 생각은 그런 거였다.

+ + +

그 뒤로 현실 시간 일주일, 퀘스트 내 시간으로 대략 이틀이 흘렀다. 이틀 동안 기회가 되는 대로 둘만의 시간을 만들거나, 혹은 과감하게 모두가 있는 곳에서 고백을 시도했지만, 루이스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내가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려고 하면 필사적으로 반대를 하며 이상한 곳으로 말을 돌렸다. 그때마다 그는 릴리에게서 심한 말을 들어야 했다.

“너 같은 멍청이랑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불쾌해!”

“저리 꺼져!”

“이 정신 나간 놈. 이제 너랑 말도 안 할 거야.”

“한 번만 더 이런 걸로 나 불러내면 진짜 죽인다.”

둘의 사이는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볼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가 불러내면 군말 없이 밖으로 나왔다. 다만 횟수가 더해갈수록 처음 보이던 희미한 기대감은 없어져서 이젠 화조차도 차갑게, 진짜 무섭게 냈다.

‘야, 너 누구야. 너 때문에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데?’

‘나는 너라니까. 나 욕해봐야 스스로를 욕하는 거밖에 안 돼. 잘못하고 있는 건 너지, 솔직하게 표현하려는 내가 아니라고.’

‘뭐가 솔직하다는 건데, 내가 왜 고백을 해야 해.’

‘그러니까 네가 그런 취급을 당하는 거야. 하토르 여신의 빛은 폼이야?’

‘……그, 그건! 뭐가 잘못된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말을 말자.’

루이스는 아직 내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말을 해봐야 제대로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고, 평행 세계에서 온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편이 퀘스트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래야 스스로가 릴리를 좋아한다고 인정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이제 어떡하지? 무작정 고백하는 건 별 소용이 없는 거 같은데…….

============================ 작품 후기 ============================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사실 테디오 편이 이상하게 길었던 거지, 다른 편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요한편은 현실이야기가 대부분이라서 길게 느껴지지만 내용만 따지자면 5편 정도였고, 테디오 편 다음으로 긴 건 존 편으로 10편 정도? 그 마저도 앞뒤 떼버리면 몇 편 안 되겠죠....... 라고 하지만 요즘 짧아지고 있다는 건 스스로 의도한 바입니다..... 흠, 다음 퀘스트는 좀 더 길게 꾸며 볼게요. 이번 퀘스트는 길게 쓸 만한 소재가 아니라서. 길어야 5편? 아마도 2편 안에 끝날 것 같아요.

추천과 코멘트는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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