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73화 (73/160)

73화

<루이스>

크리스마스 파티를 잘 마치고 돌아온 밤, 나는 또다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갔다.

소년, 소녀들로 보이는 뒷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들은 줄을 맞춰 앉았고, 같은 디자인의 회색 로브를 입었다. 그들의 앞에는 흰색 로브에 금색 허리띠를 한 남자가 책을 든 채 서 있었다.

수업 시간인가 보다. 같은 옷을 입고 있으니 학교 같은 곳일 것 같다. 그 이상은 잘 모르겠다. 시작해보면 알겠지.

“시작.”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와 내 귀에 들렸고, 동시에 온 몸에서 감각이 밀려들어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의 움직임, 손끝에서 느껴지는 오래된 나무의 부드러운 느낌, 귀에 들리는 차분한 목소리 등이었다.

“……그리하여 하토르 여신께서는 이 땅에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하시고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여신, 자비, 힘.

로브를 보면서 예상은 했다. 혹시 신 아니면 마법에 관련된 곳일 거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그 예상이 적중한 모양이다. 아마도 신과 관련된 곳이겠지. 선생이 하는 말 뿐 아니라, 이 몸이 지닌 기억도 확인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의 여신을 모시는 곳이고, 지금은 수업시간이라고.

‘지루해…….’

이 몸의 주인은 그런 생각을 했다. 자세가 그 생각을 대변해줬다. 그는 양손으로 의자를 대충 잡고서, 등을 완전히 기대고 있었다. 선생, 정확하게 말하면 수련신관이 지적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조금 더 기억을 읽어보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이 몸의 주인, 루이스 같은 경우 이 수업을 듣는 게 벌써 5번째였으니까. 처음 듣는 앞줄의 어린 아이들이야 눈을 빛내며 듣겠지만, 그에게도 같은 걸 요구하는 건 조금 무리한 감이 있었다. 그건 수련 신관도 다 아는 바였기 때문에 그런 수업태도를 묵인했다.

그런데 이럴 거면 아예 안 듣는 게 서로 낫지 않을까?

‘빨리 좀 끝나지…….’

하지만 그는 이 신전에서 기르는 고아 중 하나였고, 그에게 오전 교육을 빼먹을 권한 따윈 없었다. 권한이 없어도 과감하게 빠져나가는 것이 10살 소년의 특권이라면 특권이었지만, 이 수업만큼은 그런 것도 용납이 안 됐다. 이미 한두 번 빠져나가본 그는 그 이상의 시간동안 지루한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퀘스트의 목표는 뭘까. 그걸 알려면 그의 기억을 좀 더 살펴봐야 한다.

그러기 전에 일단 몸의 주도권을 다시 넘겨주었다. 급한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10살 소년의 몸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잘 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나도 고작해야 21살이지만, 어릴 때의 10년은 정말 강산이 변하는 시기니까. 내가 몸을 움직이면 이상한 점이 금방 드러날 게 분명하다.

“……그래서 여신께서는 생각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힘을 쓰기에 적합한가. 누가 내 마음을 잘 헤아려 내 힘을 적재적소에 쓸 수 있을 것인가. 여신께서는 오래도록 고심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수십, 수천가지의 조건들이 떠올랐습니다. 키가 큰 사람? 얼굴이 잘 생긴 사람? 돈이 많은 사람? …….”

그가 수련신관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면서 건물 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나는 그의 기억을 읽어 내려갔다.

“……결국 그 중에서도 ‘사랑’을 하는 자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알 것이라 판단하신 여신님은 사랑을 하고 있는 자에게 자신의 힘을 나눠 주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 하토르 여신님은 사랑의 여신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신님이 가지신 힘이 특별히 사랑에 관계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여신이라 불리게 된 건 그런 이유입니다. 그 힘을 빌려 쓰는 우리 신관들 역시 사랑의 신관이란 말을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퀘스트에 관련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특이한 기억이라고 해봐야 처음 구해졌을 때의 기억이 전부였다.

그는 도적떼의 공격을 받아 불에 탄 마을에서 발견되었다. 이 세계에서야 평범한 일이지만, 발견된 경위가 특이했다. 혹시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까 하고 찾아온 사랑의 신관이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돌아가려 할 때, 루이스가 우렁찬 울음소리로 신관의 걸음을 붙잡았다는 것이다. 그 전까진 조용히 있다가, 떠나가려 하니까 울어대다니, 그에게 신통력이라도 있었던 걸까? 지금 울지 않으면 죽는다 정도의.

그 외에는 평범했다. 고아 자체가 특별하다면 특별한 거긴 하지만, 고아라고 그의 지난 10년간이 어두웠던 것도 아니었다. 사랑의 신전은 고아들을 막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예비 신관 취급하면서 잘 대해 줬다.

그래서 그는 고아답지 않게 활발했고, 개구쟁이였다. 이 신전에서 지내는 고아들이 대부분 밝게 잘 자라지만, 그는 특별했다. 수업을 빠지는 건 일상이고, 오후 과업은 참여한 적을 꼽는 게 훨씬 빨랐다. 그는 산으로 들로 마을로 나다니면서 놀았다. 가벼움이 그의 공부였고, 자유로움이 그의 일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가벼이 넘어가는 신전에서도 골칫덩이로 여길 만큼,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럼 신관님도 누구를 사랑하고 계시는 거예요?”

앞줄에 앉은 아이 중 하나가 불쑥 건네는 질문에, 수련신관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토르 여신을 섬기는 자들은 모두 사랑을 하고 있는 자. 그리고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고, 자랑스러워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가장 격한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건 사랑에 관한 질문이었고, 몇 년 전만 해도 그가 신관들을 놀리는 주 레파토리로 사용하던 거였다.

“그, 그렇습니다. 저도 하토르 여신님을 섬기는 자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와, 누구예요? 알려 주세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런 것보다 여러분은 열심히 공부를 하셔야 해요.’

내가 사는 세상에서라면, 이 상황에서 저런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사랑의 신전, 신관은 아이들 앞이라도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여러분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신전에 가끔 식료품을 배달하러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은 데이지라고 합니다. 아주 예쁜 사람이에요.”

“신관님, 얼굴 빨개지셨어요!”

그 말을 하는 수련신관의 얼굴은 한 아이가 지적했듯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이들이 데이지라는 사람에 대해 예쁘니, 못 생겼니 하는 것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그녀의 생각만 하면 기쁜 듯, 행복한 얼굴을 했다.

그는 한참동안 아이들의 웅성거림을 들어주다가, 교실을 정리했다.

“자, 여기까지. 여러분도 빨리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거예요. 그게 짝사랑일지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세상이 달라질 겁니다. 그럼 여러분도 하토르 여신의 힘을 쓸 수 있게 될 거예요.”

“네!”

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들과 달리, 루이스는 처음과 같은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까지 그들의 대화에 무관심한 건 아니었다. 의문, 의심 같은 감정들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했다.

‘그럼 내가 쟤를 좋아하고 있단 말이야? 말도 안 돼!’

그가 바라보는 쪽에는 그와 같은 나이의 여자 아이가 앉아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이지만, 귀엽다기보다는 활기찬 인상을 가진 아이, 아냐 누나가 떠오르는 아이였다. 아마도, 같은 영혼을 가진 평행 세계의 아냐 누나일 것이다.

두근.

릴리라는 이름의 소녀를 보는 그의 심장이 이전과 다르게 뛰었다. 빨라졌다. 그는 자신이 릴리를 좋아하는 걸 부정했지만, 그의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이래서 그가 괜스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던 거다. 한 번 보면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까.

그녀는 그와 달리 수업에 열심이어서, 그가 있는 방향으로 얼굴 한 번 돌리는 일이 잘 없었다. 수업이 5분은 더 이어지고야 그녀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뜨거운 눈빛을 느낀 걸까?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내가 기대했던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의자를 잡고 똑바로 앉으라는 시늉을 하며, 손날로 목을 한 번 쓰윽 그었다. 아마 제대로 수업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인 모양이다. 풋풋한 소녀가 쑥스러워하며 다시 고개를 돌리는 걸 기대했는데, 이 둘은 내가 바라던 관계가 아닌 듯하다.

앙숙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머릿속에는 그녀와 싸운 기억이 가득했다. 주로 그가 장난을 쳤고, 그녀가 받아주는, 아니 폭발하는 식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의 선포에 혀를 쭉 내밀고 눈깔을 드러내며 거부했다. 그러자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 반응은 귀여웠다. 루이스가 왜 놀리는 지 알 것 같았다. 아냐 누나도 놀리면 저런 표정을 하는 걸까? 아니 그보다는 누나의 어릴 때 사진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얜 또 왜 이럴까.

‘…….’

어이, 심장을 왜 부여잡는 건데? 눈은 또 왜 계속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건데? 그럴 거면 아예 놀리지를 말던가.

심각한 내적갈등을 겪고 있는 루이스의 마음을 살피고 있자니, 조금 어이가 없다. 한편으론 귀엽기도 하다. 이게 바로 좋아해서 괴롭힌다의 표본인가?

‘내가 왜 이러지? 이건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마찬가지로 고개를 홱 돌리며 창밖을 바라보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그녀의 찡그린 얼굴이 재생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아무리 부인해도, 의자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은 뜨뜻해지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내리니, 손은 은은한 빛을 냈다.

“사랑을 하는 자는 모두 빛을 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입니다.”

수련신관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손에서 은은한 빛이 났다. 그건 루이스의 손에서 나는 빛과 같았다. 몇 번이나 본 광경이지만, 그는 신관의 손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그가 고민하고 있는 이유였다. 머리는 거부해도, 하토르 여신은 그가 릴리를 사랑한다고 증명해주고 있었으니까.

“그걸로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이걸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저 빛날 뿐입니다. 치유의 힘을 발휘하고 싶으면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수업 시간이 다 됐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른 수업을 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일어나서 교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수업보다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그런 흐름에 동참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가장 먼저 튀어나갔어야 했지만, 그는 그답지 않게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당연했다. 그는 수련신관이 얘기하지 않은 다음 이야기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 다음은 좋아하는 걸 고백해야 한다고 했었나……?’

그 때, 시스템이 이 퀘스트의 목표를 알려 줬다.

[여덟 번째 퀘스트, 릴리에게 사랑의 마음을 고백하세요.]

떴다!

내가 왜 이런 퀘스트 안 나오나 했다. 100 번 중에 한 번은 나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퀘스트마다 여자가 빠지지 않았으니, 아예 이런 식의 퀘스트도 분명히 있을 거란 예상이 적중했다.

좋아, 이번에는 간단하겠군.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을 얻으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마음을 고백하는 건데 그게 뭐가 어렵겠는가? 그 결과야 내가 알 바 아니고, 나는 말만 하면 되니까. 그 정도는 퀘스트 시작하자마자 끝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작품 후기 ============================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새 퀘스트의 시작이네요.

이번 퀘스트도 네 편 예정입니다.

이번 퀘스트를 적다보니, 지난번 퀘스트를 좀 더 쓸껄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다음 편은 내일 오전에 올라갈 것 같습니다.

그때까진 꼭 써볼게요.

추천과 댓글을 기다립니다.

여러분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저번 편에 왜 시러해 노답이라고 달렸는지..... 방금 후기 쓰다가 깨달았습니다...ㅋㅋㅋㅋ 여러분, '사랑해, 나도.' 랍니다. 알고 계시겠지만욬ㅋㅋㅋ 그리고 여러분의 의문에 대한 대답은 댓글로 해드리겠습니다. 질문을 적어 주셨다면, 그 편의 댓글을 다시 한 번 봐주세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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