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72화 (72/160)

72화

퀘스트 보상은 검술로 받았다. 그레이가 익힌 칼리크보 제국 검술은 B급 검술이라 경험치 전환 비율이 자그마치 25%로, 그 덕에 라이트닝 소드 레벨이 대폭 올랐다.

[B급 [칼리크보 제국 검술 Master]의 경험치 25%를 A급 [라이트닝 소드 lv.3 88.259%]에 더해 [라이트닝 소드 lv.8 6.49%]로 변합니다.]

그 후 현실에선 검기를 써 보기로 했다. 라이트닝 소드는 lv.7부터 검기를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습용 롱소드를 들고서 정신을 집중했다. 아침햇살에 날이 서 있지 않은 검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그런데 검기란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

그레이의 세계에서는 검기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었다. 그가 계속 쓰던 거였고, 그 감각을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으니 어색할 게 없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그 세계에서는 ‘기’라는 게 허락되어 있었으니까. 온 몸에 충만한 ‘기’를 인식하고, 검으로 움직이면 됐다. 검기를 제대로 형성하려면 좀 더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지만, 기본은 그랬다. 그것만으로도 검은 우윳빛을 띠며 강한 절삭력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 세계에서는 ‘기’와 ‘마나’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매번 체력을 소모하며 헬 파이어를 쓰고, 이프리타를 불러내는 게 아닌가. 좀 더 파고들면 그게 그거일 수 있겠지만, 현상적으로는 달랐다. 무엇보다 기는 느껴지고, ‘체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헬 파이어를 쓸 때나 이프리타에게 힘을 보낼 때나, 언제나 저쪽에서 시작했다.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다가, 이프리타가 내 힘을 가져가기 시작하면 약간 컨트롤이 가능하지만, 그 이전에는 불가능하다.

물론 이건 다 내 검술 레벨이 올라가기 전에 한 고민이다. 시스템은 위대해서, 라이트닝 소드 레벨이 오르자마자 내 머릿속에 검기를 쓰고, 다루는 방법을 입력해 주었다.

그 방법이란, 검령(劍靈)을 매개로 검기를 발현하는 거였다.

기를 가지고 바로 칼날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검령, 일종의 검의 정령에게 내 의지를 전달하고, 그 검령이 힘을 발휘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단계를 더 거치기 때문에 이 방법은 효율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론 그 정반대이다. 검을 가장 잘 이해하는 건 외부의 인간이 아니라 검에 깃든 검령일 수밖에 없다. 그런 검령을 통해 검기를 내면 작은 힘으로도 좀 더 강하고, 오래 간다. 그만큼 수준 높은 기예다. lv.7이 되어서야 쓸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보통 검기는 lv.6부터 쓸 수 있었다. 기나 마나가 없는 이 세계에서는 소용이 없는 얘기지만.

일단 이 몸으로는 처음 펼치는 것이므로 천천히 검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가검에도 검령이 있을까, 이제 고작 3개월 정도 썼는데, 검령이 깨어날 수 있을까 같은 걱정이 집중을 방해했다. 효율이 좋은 만큼 선결조건도 만만치 않아서, 아무 검이나 들고서 쓸 수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검에 검령이 존재해야 했고, 검령이 검기를 발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 있어야 했고, 사용자와의 교감이 있어 그 검령을 깨울 수 있어야 했다.

이건 단점이자 장점이었다. 전쟁터 같은 곳, 혹은 검이 없을 때는 굉장한 단점이었다. 그럴 때는 그냥 일반 검기를 쓰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러나 오래 쓴 검, 더구나 좋은 검이 있다면 굉장한 장점이었다. 검령이 강할수록 검기의 강함은 일반 검기의 수배까지도 뛰어넘는다. 검기만으로도 검강을 두부 자르듯 벨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연습용 가검은 과연 그에 적합할 것인가. 아니라면 다른 검을 구해봐야 하나?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박물관이라도 가서 훔쳐야…….

[집중해라, 강민.]

[……고마워.]

검령도 일종의 정령. 이프리타가 있으면 도움이 될까 싶어 소환해놓은 상태였다. 역시 도움이 되었다. 긴장과 걱정에 딴 생각에 빠진 나를 바로 잡아 줬다.

그래, 검령도 역시 정령. 온 마음을 다해야겠지.

다시 한 번 집중하며,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렸다. 연습용 가검의 모습을 보면서, 머릿속에도 똑같이 생긴 검을 떠올렸다. 손잡이의 장식, 검신의 길이, 날의 뭉툭함, 표면에 뭍은 먼지한 톨까지 그대로 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 후 이번에는 눈을 감고서, 그 이미지를 유지하며 말을 걸었다. 이프리타나 평행 세계의 나와 대화하던 방식을 생각하며 노크하듯이 검에 의지를 전달했다.

[거기 있어? 있으면 대답해 줘.]

잠시 기다렸지만 응답은 없었다. 다시 한 번 내 검, 지난 3개월간 하루도 놓지 않았고, 수련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던 내 검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나와 줘, 이젠 진짜로 나와 같이 움직이자.]

우웅.

반응은 머릿속이 아니라, 검에서 직접 왔다. 아직 의지를 전달할 정도로 성장한 건 아닌지, 검은 스스로 떠는 것으로 대답해왔다.

역시나 검령은 존재했다. 연습용 가검이었지만, 지난 3개월간 동고동락했던 검이다. 내심 있을 거라고 믿었다. 파이레스의 퀘스트를 깰 때는 수련이 유일한 낙이자 위로였다. 그런 검에 검령이 깃들지 않았다면 굉장히 슬펐을 것이다.

[좋아, 그럼 네 힘을 보여줄래?]

우우웅.

검이 한 번 흔들렸고, 이어 은은한 빛이 검 날에 맺혔다. 화려하지 않았고, 있는 듯 없는 듯한 빛이었지만, 분명히 검기였다.

[성공한 건가?]

[응.]

[시험해 보겠는가?]

[어떻게?]

[이걸 베어 봐라.]

이프리타는 내 가슴 앞에 불꽃 구를 생성했다. 그녀가 무얼 말하는 지 대번에 알아들었다. 이게 검기라면 벨 수 있을 것이고, 검기가 아니라면 당연히 벨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은빛이 은은하게 맺혀있는 검을 들고서 불꽃 구를 천천히 베었다. 검은 구를 갈랐고, 구는 그 순간 공중으로 흩어졌다.

신비한 광경이었다.

내가 했고,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잘 와 닿지 않았다. 고체가 기체를 베다니, 풍압으로 벤 것도 아니고, 그냥 베다니……. 이게 검기인가?

[됐……다. 네가 없앤 거 아니지?]

[그래, 축하한다. 이제 웬만한 건 다 벨 수 있겠군.]

이프리타가 확인해주고서야, 나는 검기를 생성해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빛이 맺혀있는 검을 보니, 함께 싸울 수 있는 동료가 생긴 듯해 든든해졌다.

[앞으로 잘 부탁해.]

웅웅.

검도 내 마음에 응답해 주었다.

이제 조금 더 강해졌다.

+ + +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연인이 되고 나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이브다. 그것도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 당연히 예지와 만나기로 했고, 지금은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예지랑은 오랜만에 만나는 거였다.

그녀는 3박 4일 일정으로 친구들과 여행을 갔고, 오늘 도착 했다. 도착하고 좀 쉬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피로가 쌓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크리스마스 이브니 절대로 쉴 수 없다며 꼭 나오겠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크리스마스는 내년에도 오지 않냐며 그녀를 걱정하니까, 그녀는 자신이 용납할 수 없단다.

‘첫 크리스마스니까, 절대로 오빠랑 있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그녀는 은근히 욕심쟁이다. 친구와 남자 친구를 동시에 가질 속셈인가 보다. 거기에 내일은 가족과 함께 보낸다는데……. 그러고 보면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미인이고, 안 가진 게 없다. 나를 선택한 게 어쩌면 미스테리일지도.

어쨌든 오늘이 그녀를 만나지 못한 지 3일 째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엔 좀 오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의 매일 만나던 그녀다. 단 3일 이지만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특히나 이번 퀘스트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베르트랑의 폭주를 경험한 이후로, 감정 동화에는 늘 주의하고 있었다. 그들의 감정은 그들의 감정, 나의 감정은 나의 감정. 몇 번 하다보니까 이젠 꽤 익숙해져서, 갑작스런 폭주가 일어나도 그들의 감정 사이에서 내 감정을 지킬 수는 있게 되었다. 그 폭주가 강력해서 몸의 통제권을 빼앗기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의 감정을 나의 감정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내 감정이 변화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의 감정이 왜 폭주하는 지,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 수 있었다. 생각이 언어를 뛰어넘어 그대로 전해져 오니까, 그들이 왜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는지, 왜 그 감정이 커진 건지, 어째서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폭주하는 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인끼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하기 힘든 완벽한 공감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들과 함께 웃고, 운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차갑게 해서 퀘스트를 진행해야 한다.

솔직히 이것도 일종의 감정 동화다. 하지만 다르다. 전의 감정 동화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 거라면, 이건 내 의지로 일어난 일이다. 영화나 소설에 감정 이입을 잘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들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었다. 현실 속의 인물이었고, 평행 세계의 나였고,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감정을 한 귀로 듣고 흘러 넘긴다는 게, 가능하긴 한 건가?

이것도 경계하는 중이지만, 내 마음이 열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첫 번째 시도에서 느꼈던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퍼레이드 장면 다음에 이어지는 후일담에서, 나는 예기치 못한 펀치에 마음을 확 열어 버리고 말았다.

예지와 에비게일이 같은 영혼을 공유하기 때문일까.

내가 그레이와 같은 영혼을 공유하기 때문일까.

감정 동화에는 늘 주의하고 있었지만, 어젯밤만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 +

“정의의 신의 이름으로, 그레이와 에비게일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 언약은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 깨지지 않을 것임을 천명합니다!”

짝짝짝.

션의 선포에 그들을 보고 있던 수많은 하객들이 손뼉을 치며 축하했다.

그러나 에비게일을 쳐다보고 있던 그레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레이는 모든 오감을 에비게일에게만 집중한 채, 속으로 이게 꿈은 아닌지 되묻고 있었다.

‘이거 꿈은 아니겠지? 나 드디어 이브(에비게일의 애칭)와 결혼하는 건가? 그녀도 허락한 거 맞지? 나랑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지금 동의한 거 맞는 거지?’

그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듯, 그녀도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그 눈빛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진짜야, 이건 진짜다. 정말 진짜인 거겠지? 확인하고 싶어. 내 볼이라도 꼬집을까? ……아니지, 더 좋은 방법이 있잖아?’

그는 천천히 얼굴을 그녀에게로 가져갔다. 주변의 소리가 더 커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만이 중요했고, 그녀의 반응이 중요했다. 슬며시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그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왔다.

쪽.

가벼운 입맞춤에 그는 이게 현실임을 인지했다. 입술로 전해져오는 그녀의 입술이, 그 촉촉함이 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 눈에 비친 그의 입이 그가 이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 + +

넓은 방, 커튼이 달려 있는 큰 침대에 두 사람이 있었다. 백발이 멋지게 자란 남자와, 여자였다. 여자는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고, 남자는 여자의 반쯤 뜬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에비게일과 그 곁은 지키는 그레이다.

조금 전까진 션의 제자들과 그레이의 자식들이 같이 있었지만, 그레이의 요청으로 다 밖으로 내보냈다. 아들딸들이 반발할 법도 했지만,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물러섰다. 나이가 들어서도 늘 붙어 다니는 두 사람 사이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레이는 천천히, 그녀의 푸석푸석한 백발을 쓸어 넘겼다. 탱탱했던 피부는 쭈글쭈글해졌고, 이빨은 다 빠져 입이 푹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눈엔 여전히 아름다웠다. 죽음의 향기를 내뿜는 그 모습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의 눈에서 눈물이 다 나려고 했다.

그는 억지로 그 눈물을 삼켰다. 마지막이었다. 웃는 얼굴로 보내고 싶었다. 그녀가 먼저 죽는 게 지금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렇게 슬프지 않아도 되니까.

“……여……ㅂ…….”

“말하지 마. 괜찮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다 아니까, 말하지 마.”

희미한 눈빛으로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지는 다 알았다. 그러니까 없는 힘을 끌어내며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시간만 단축될 뿐이다. 그는 그 짧은 시간조차도 아까웠다.

“ㅅ…….”

“…….”

그렇지만 그럼에도 입을 달싹이는 그녀를 막을 순 없었다. 제대로 된 말로 완성되지 못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숨소리랑 아주 조금 달랐지만, 그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오랜 세월 함께 해왔고, 수없이 들은 소리였다. 첫음절이 시작될 때 미묘하게 달라지는 숨소리만으로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ㄹ……ㅎ…….”

“윽, 읍.”

대답을 하려 했지만, 복받쳐오는 슬픔에 그는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다행히 그녀는 아직 기다리고 있었다. 희미한 눈빛은 ‘괜찮아요.’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얼른 감정을 추슬렀다. 이대로 그녀를 보낼 수는 없었다. 제대로 보내야만 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죽은 뒤에도 사랑할 거야.”

“ㄴ……ㄷ…….”

그녀가 마지막으로 두 개의 소리를 낼 때까지, 그는 계속 미소를 짓기 위해 노력했다. 울지 않으려고 애써 참았다. 할아버지가 된 이후로 이렇게 울 일은 없을 거라고, 이미 자신의 눈물샘은 다 말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서 이렇게 눈물이 솟아나는 지, 조금이라도 마음을 풀면 침대가 다 젖을 정도로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

“…….”

그녀의 눈이 빛을 잃고, 그 입에서 자그마한 공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고, 그의 손이 닿은 그녀의 이마가 차갑게 식어져 갈 때까지, 그는 계속 입가를 당겼다.

주름이 잔뜩 져 있는 그의 볼과 입을 타고 아까부터 짠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에비게일이 예지가 아니었다면, 바리스타 누님이나, 아냐 누나였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후일담이라 긴장을 풀고서 감상모드로 있었다고 해도 슬픈 영화 보는 것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지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나도 그레이와 같이 웃었고,울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남자의 웃음과, 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남자의 입가를 번갈아 경험했다.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어서 너무 기뻐했고, 왜 이런 장면을 내가 봐야 하는 걸까하며 슬퍼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크리스마스라고 예쁘게 차려입은 예지가 멀리서 걸어오는 걸 발견하자마자 달려가서 그녀를 꽈악 안았다.

“오빠?”

예지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물었지만, 나는 그녀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더욱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가 숨이 막히는 듯 손으로 내 등을 쳐댔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놓기만 하면 품 안에 그녀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당장이라도 못 볼 것만 같아서 놓을 수가 없었다. 늙은 에비게일의 몸이 혹 잘못될까, 품에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던 그레이의 후회가 평행 세계를 넘어와 나를 움직였다.

한참이나 사람이 많은 길가에 서서 그녀를 안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내가 너무 꽉 껴안은데다가, 그녀가 신음 비슷한 걸 흘리고 있으니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서 작은 헤프닝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녀는 아픈 와중에도 눈짓으로 사람들에게 ‘아무 일도 아니에요.’하고 설명해야만 했단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야, 나는 그녀를 풀어 주었다. 내 눈에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나 보다. 그녀가 손을 들어 내 눈물을 훔쳤다.

“이 바보, 저 어디 안 가니까 그렇게 울지 마요.”

그 말을 듣는데,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통하는 게 있긴 한 모양인지,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정확하게 집어내지 않는가? 그게 참 기뻤다.

“울다가 웃으면 안 좋다지만, 오늘은 봐 줄게요. 웃으니까 이렇게 멋진 사람인데, 좀 웃어달라고요.”

“응, 웃을 게. 계속 웃어야지.”

한 번 털어내고 나니 슬픔과 후회는 다 사라진 듯,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다행이다. 그녀가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받아주는 그녀가 있어서 말이다.

남은 건 나중에 헤어지고 나서 이프리타를 불러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이프리타가 있는 것도 정말로 다행이다. 안 그러면 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꼴이 되었겠지?

“그럼 오늘 인사를 해야죠. 오빠, 메리 크리스마스!”

“나도, 메리 크리스마스.”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얼굴로 키스를 하기엔 조금 멋쩍었지만, 날 보고 웃는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참을 새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쪽하고 내 입술 도장을 찍었다.

“제 입술이 그렇게 좋아요?”

“응, 좋아. 하루 종일이라도 키스할 수 있을 것 같아. 한 번 해볼까?”

“무, 무슨 소리를……! 오빠는 진짜 변태예요.”

이제 익숙할 때도 된 것 같은데, 홱 돌아서는 반응이 귀엽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내 팔짱을 끼는 대담함은 여전했다.

“일단 가요. 저녁에는 카페에서 파티라면서요?”

“응, 사장님, 미영이 누나, 리오샤 형, 세료자 형에 아냐 누나까지 전부 온데.”

“그럼 빨리 움직여야겠어요. 오늘 하고 싶었던 게 많았는데.”

“파티에는 좀 늦으면 되지 않을까?”

“그래도 되지만, 파티도 재밌을 것 같잖아요.”

둘 다 포기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녀가 아닌 것 같으면서도 그녀 같아서 조금 웃겼다.

“그래, 그럼 빨리 움직이자.”

“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빨리 하며,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거리를 걸어갔다.

============================ 작품 후기 ============================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드래곤 가죽은 그 다음 드래곤 가죽입니다. 처음에는 드래곤 본만 남았고, 그걸로 다음 드래곤을 잡고, 또 아이템 만들고..... 빈익빈 부익부.... 나쁘다ㅠ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에 닿으셨다면 추천과 댓글을 부탁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