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69화 (69/160)
  • 69화

    <그레이>

    [일곱 번째 퀘스트, 힘을 합쳐 어스 드래곤을 물리치세요.]

    기억과 감정과 생각을 본인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서, 현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간단히 하자면,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은 퀘스트의 메시지만큼이나 단순했다.

    내 앞에는 도마뱀이 있었다. 단순한 도마뱀은 아니었다. 그 길이는 30m 정도 되고, 어깨 높이만 2m 조금 넘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도마뱀이었다. 사실 도마뱀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성인 남성 네다섯 명을 한 번에 삼킬 것 같은 큰 입에는 무식한 크기의 이빨들이 가득했고, 그만큼 큰 그 머리에는 큰 뿔이 세 개나 나 있었으니, 이게 도마뱀이라면 지구의 도마뱀들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 거였다.

    거기에 그 피부는 얼마나 단단해 보이는지. 피부 위에 돌이 자라나 갑옷처럼 보호하고 있었는데, 형체가 일정하지 않고 되는 대로 돌을 같다 붙인 것 같은 그 괴기함이 강한 인상을 주었다. 뚫으려면 꽤 시간이 들어 보였다. 그 돌이 쌓인 긴 시간만큼 칼질을 해야 할 지도 몰랐다. 어스 드래곤이라기보다는 스톤 드래곤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들 외형이었다.

    어스든 스톤이든, 눈앞에 보이는 드래곤의 위용엔 겁을 집어 먹는 게 보통이었다. 크기나 모습도 그 요인 중에 하나였지만, 드래곤급 몬스터들이 자연적으로 가지는 피어 때문에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건 어려웠다.

    이 몸의 주인, 그레이도 마찬가지였고, 그의 동료들도 그 일반적인 반응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더 이상 사냥할 게 없다 하여 최고의 헌터 파티라 불리는 그레이의 파티는 그레이 포함 모두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사 둘, 궁수, 마법사, 신관으로 이뤄져 있는 교과서 같은 파티에는 내가 아는 얼굴이 셋이나 들어가 있었다.

    저번에 이어 또 등장한 예지는 갈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였고, 처음 등장한 바리스타 누님은 롱 보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힘센 궁수였다.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나온 사장은 힘센 궁수보다 더 무식한 전사로, 방패 같지도 않은 철판때기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방어형 전사였다.

    보조에 일가견이 있는 정의의 신전 소속 남자 신관만 모르는 얼굴이었다. 물론 내 얘기다. 그레이에게는 남자 신관 포함 넷 다 죽음과도 바꾸기 싫은 동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불꽃을 뿜어대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린 어스 드래곤의 앞을 막아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파티는 산개한 채로 나름 잘 싸웠다. 하지만 처음부터 드래곤의 위압에 눌려 반응은 평소보다 늦어져 있었고, 그 탓인지 파티는 어느새 한 곳으로 모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파티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 위치에 기다리고 있는 건 드래곤의 브레스였다. 이런 때 막기 위해 무식한 철판때기를 수련해온 사장, 메이슨이 나설 타이밍이었지만, 그의 방패는 이미 두 번의 브레스를 막고서 녹아 있었다. 이번에는 못 막을 게 뻔했고, 그럼 모두가 죽는 건 기정사실로 보였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선 게 바로 그레이다.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생명을 태워 칼리크보 제국 검술의 비기를 쓰면 한 번쯤 막을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동료들은 말하지 않아도 그의 뜻을 알고 잘 움직여 줄 거라 믿었다. 그를 두고 도망치기를 바랐다.

    드래곤에 도전하는 건 실패였으니까.

    그의 파티는 와이번도 손쉽게 잡았다. 하늘을 나는 와이번을 리디아가 롱보우로 쏘아 땅에 떨어뜨리고, 땅에서의 발광은 메이슨이 나서서 막았다. 그러면 마법사, 에비게일이나 공격 일변도인 그레이가 빈틈을 노려 와이번을 죽였다. 그 과정 중에 혹시 발생할지 모를 불상사는 신관 션이 대비했다.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정석 중의 정석인 사냥 방식이다. 심지어 간단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 이 간단한 걸 왜 다른 파티는 못하는가.

    실력에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다.

    먼저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움직이는 와이번을 맞출 수 있는 리디아는 특수했지만, 일반 궁수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에 불과했다. 메이슨의 힘이 강하긴 했지만, 힘으로 따지면 메이슨을 능가하고, 더 방어력이 좋은 전사는 널려 있었다. 칼리크보 제국에 잠시 몸담았던 그레이의 공격력도 대륙 제일 수준이라기엔 무리였다.

    에비게일은 그나마 최상급 마법사였고, 그런 마법사가 포함된 파티가 흔하진 않았다. 그래도 찾자면 못 찾을 건 없었다.

    다만 이런 조합을 갖춘 파티는 대륙에 하나 둘이 고작이었다.

    궁수가 있으면 전사가 약했고, 전사가 세면 마법사가 없었고, 마법사가 있으면 궁수의 실력이 부족했다. 하나, 혹은 둘이 갖춰진 파티는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넷 다 조건에 맞는 파티는 정말로 찾기 힘들었다.

    거기에 정의의 신전 소속 신관이 더해진다면, 그레이의 파티 말곤 없다고 봐야 했다.

    최고의 헌터 파티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파티였고, 와이번 사냥에 질려가는 그들이 드래곤으로 눈을 돌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드래곤.

    와이번과 큰 차이가 있는 생명체는 아니었다. 와이번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었고, 속도도 비슷했다. 드래곤은 대부분 브레스를 뿜지만, 와이번 중에도 드래곤만 한 브레스를 뿜는 종이 있기에 그것도 차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단 하나, 드래곤은 영리했다. 그것도 인간과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을 괴롭히며 인간 위에 군림했다. 자신의 레어가 있는 지역에서 잘 벗어나진 않지만, 그들은 인간을 바퀴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며 그들을 착취하거나 학살을 일삼았다.

    그들이 그러는 것도 이해는 갔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은 지능은 좋으나 육체는 형편없기에, 하인으로 부려먹기 딱 좋은 종족이 아닌가.

    결국 인간은 수십 세대를 그들의 아래에서 숨죽여 지내야 했다. 드래곤의 영토 밖에서 인간들이 나라를 이룰 때까지, 드래곤 아래의 인간들이 드래곤의 비술, 마법을 훔쳐낼 때까지 몇 백 년을 그들의 아래에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인내의 결과, 인간은 드래곤과 싸우진 못해도 스스로는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드래곤이 영토 밖으로 한 번 나오면 수천, 혹은 수만의 인간이 죽어가며 막아야 했지만, 적어도 막거나 돌려보낼 정도로는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대륙의 대부분은 드래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 아래에서 고통 받는 인간들도 많았다. 게다가 와이번을 위시하여 각종 몬스터가 판을 치고 있는 것도 드래곤이 따로 정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몬스터들은 종종, 아니 거의 매번 드래곤의 영토를 나와 인간들을 습격했는데 그들을 막기 위해 용병과 군대가 동원되었다. 그 중에 그런 몬스터들만을 전문적으로 잡는 이들을 헌터라 불렀는데, 헌터들의 꿈은 하나같이 드래곤을 잡는 거였다.

    드래곤을 잡은 실력을 인정받고, 고통 받는 인간들을 해방시켜 명예를 얻고, 드래곤이 모은 재산과 영토를 차지하여 부를 얻는다.

    드래곤 한 마리만 잡으면 인생이 뒤집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아무도 성공한 이는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와이번이랑 비슷했지만, 딱 하나의 차이, 그 지능이 꽤나 넘기 힘든 벽이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의 파티가 다른 헌터 파티와 여러모로 비슷하지만 작은 차이로 칭송을 받는 거와 다르지 않았다.

    그레이와 그 동료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드래곤에게 덤벼들기 전에 몇 번이나 계획을 뒤집고 유보시켰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오를 데가 없었다. 와이번을 눈감고 잡을 정도가 된 건 아니지만, 머리 나쁜 와이번만 잡아서는 실력이 잘 늘지 않았고, 지난 몇 년간 헌팅에 힘써온 결과 더 쌓일 부도, 명성도 없었다.

    남은 건 드래곤 하나였고,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도 그거 하나였다.

    “하자.”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함께 자란 소꿉친구인 넷과 여행 중에 운명처럼 만난 션은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삶을 살아왔다. 물론 이야기만 가득한 건 아니었다. 겉으로는 이야기처럼 보여도, 그들의 삶을 채운 건 매일의 고통이었으니까.

    그 고통을 이야기로 바꾼 건 그레이가 가지고 있는 향상심이었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앞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가 이 파티를 여기까지 이끌어 왔고, 이 위치에 오르게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익숙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편한 것보다는 조금의 인내 뒤에 오는 열매를 달게 여긴 그의 자세가 아니었다면, 게으른 메이슨과 집중력이 부족한 리디아, 꿈이 없었던 에비게일이 이렇게나 성장할 수 있었겠는가? 션은 조금 예외였지만, 션도 그의 영향력을 부정하진 않았다.

    이름도 없이 ‘그레이의 파티’라 불리는 그들의 파티는, 그 호칭처럼 그레이가 중심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에 큰 토를 달지 않았다. 그들도 주변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고, 오랜 시간 그레이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근질근질한 참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레이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헌터가 되어 드래곤에 도전하다 죽은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헌터가 되면 누구나 꿈꾸는 일인 것이다. 오히려 웃었다. 꿈이 눈앞에 있는데 무서워만 하는 건 자신답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아쉬웠다. 이 싸움이 끝나면 고백하고 결혼하려한 오랜 친구, 에비게일과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이렇게 헤어지는 것만큼은, 최고 헌터의 자부심이고 뭐고, 그 어떤 이유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었다.

    내가 퀘스트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그레이가 드래곤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불덩이를 보면 자신의 검을 들고 있는 그 시점, 절체절명의 상황 중에서도 절체절명, 나를 향해 총알이 이미 발사된 것이나 다름없는 그 시점이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마스터에도 이르지 못한 검술로 뭘 하겠는가, 시간도 없는데 헬 파이어의 주문이나 외우고 있겠는가.

    날개도 없는 짝퉁 드래곤 따위의 불꽃은 씹어 먹어 줄 거라 믿고서 이프리타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이프리타!”

    내가 그 이름을 외치자마자 내 앞에서 불꽃이 피어나며 인간의 형상을 이루었다. 타오르는 불꽃 갑옷을 입고, 아홉 꼬리를 창처럼 휘두르는 불꽃의 정령왕이 이내 강림했다.

    보통이라면 여우 형태였겠지만, 그게 아니고 처음부터 전격 전개인 건 이유가 있었다. 사실 이게 이 퀘스트 두 번째 도전이었던 것이다.

    처음 도전에는 이프리타를 부를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저 불꽃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낭패였기 때문이다. 그런 짓을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첫 도전 때 브레스에 죽은 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 불꽃을 막았다. 막는 데는 원래 그레이가 쓰려고 했던 비기, 칼리크보 제국 검술의 비기, 테하누 밤(Tehanu Bomb)을 썼다. 비기는 제국 검술이 마스터에 이르러야 쓸 수 있는 기술로, 온 몸의 기를 한 번에 폭발시키는 거였다.

    그레이는 그 폭발이 잠시지만 브레스를 뒤로 밀리게 할 것이고, 부가 효과로 자신들도 뒤로 밀려나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마스터가 아닌 자신은 비기를 쓰다가 죽겠지만, 다른 동료들은 살 수 있기를 바란 계획이었다.

    처음 퀘스트에 들어왔을 때는 그런 전후 사정을 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프리타를 부를 수는 없으니, 그냥 몸을 맡겼을 뿐이었다.

    + + +

    “시작.”

    하기 전에도 나를 향해 벌린 드래곤의 입과, 그 안에 있는 불꽃을 보며 여러 방법을 생각했지만,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그레이에게 몸의 통제권을 내주었다. 무슨 방법이 있겠지 싶었다.

    잠시, 아주 잠시 몸의 통제권을 빼앗겼지만, 그레이는 뭔가 이상한 걸 느낄 새도 없이 하려던 대로 움직였다.

    온 몸을 내달리던 기가 그의 의지에 따라 검 끝에 모였다. 그는 모으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계속 기를 검 끝으로 보였다. 기는 눈에 보일 정도로 모여들었고, 실체를 이루었고, 그것도 모자라 스파크가 튈 정도로 반발했다. 한 점에 기가 모인 것 정도로 이정도의 반발은 일어나지 않지만, 비기 특유의 방법으로 반발하게 만들었고, 그 반발은 밖에서 또 다른 기로 억누르면서 더 압축되었다.

    그 모든 게 한계에 다다라 그레이의 능력으로는 제어할 수 없어진 순간, 그가 내 뻗은 검 바로 앞에는 어스 드래곤이 내 뿜은 불꽃 브레스가 있었다.

    마스터는 아니었지만, 마이너한 버전의 테하누 밤을 자주 써온 그레이는 짧은 시간 동안 온 힘을 다한 비기를 완성시켰고, 그 타이밍은 그의 예상대로 정확했다.

    테하누 밤은 브레스가 검에 닫기 전에, 그가 의도한 그 시점에 정확하게 터졌다.

    콰가가가강!

    ============================ 작품 후기 ============================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시작했습니다.

    3회 안에 끝날 예정입니다.

    이번 챕터는 퀘스트보다는 현실에 초점이 더 맞춰져 있습니다.

    퀘스트도 퀘스트지만, 현실 이야기도 즐겨주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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