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68화 (68/160)
  • 68화

    지나가는 장면들 속에서 회현의 입장이 되었을 때는 그의 기억을 뒤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혜선과의 일이 궁금해서, 급하게 그 부분을 찾았다. 다행히도 중년의 그는 그녀와 결혼해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어떻게 고백했고, 어떻게 사귀게 되었고, 어떻게 결혼을 했으면, 아이는 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그걸 알아보기 전에 장면이 넘어갔다. 이프리타와는 또 어떻게 계약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그것도 알아볼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둘이 잘 된 걸 안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런데 ‘인류의 수호자’란 칭호는 뭘까? 뭔가 의미심장했다.

    회현이 이프리타와 얘기하는 동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이상 개체’는 굉장히 파괴적인 이미지였다. 그의 칭호는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그의 생각처럼, 그 세계에 정령이 등장한 데는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쪽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걸까나. 괴물 코뿔소라든지, 폭주하는 정령이라든지, 혹은 또 다른 일들이 일어나서 내가 지금 얻는 힘이 필요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프리타 소환 lv.9]를 배웠다. 전투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서였다.

    원래 배우고 싶었던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이것.

    [전자공학 lv.8] - 2100년대,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수준의 전자공학 지식. 각종 홀로그램에 관한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

    회현은 대학을 나와 마찬가지로 전자과로 간 모양인지, 내게 꼭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식을 가져오면 내 전자공학 지식이 4에서 7정도로 올라가는데, 그렇게 되면 현대에 개발되지 않는 각종 연구 성과를 배우는 셈이 된다. 그럼 그걸로 논문내고, 학위 받고, 특허로 돈을 쓸어 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 뿐 아니라 지금 공부할 필요도 없어진다. 머릿속에 90년 동안 있을 중요한 연구 성과들이 다 들어가 있고, 지금 배우는 것도 다 들어가 있을 텐데 왜 공부를 하겠는가? 띵가띵가 놀다가 적당히 시험치고, 대학원에서 천재 취급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참았다.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누군가가 피땀 흘려 이룩할 성과를 날름 가로채는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인간답게 살려고 마지막까지 생의 끈을 놓지 않았던 회현의 당당함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데, 회현의 지식을 훔쳐서 비겁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다른 기술을 가져오는 것도 비슷할지 모른다. 그래도 [이프리타 소환] 같은 건 현대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궤변이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며 [이프리타 소환]을 배웠다.

    [S급 [이프리타 소환 lv.9]의 경험치 40%를 S급 [이프리타 소환 lv.1 40.74%]에 더해 [이프리타 소환 lv.7 68.915%]로 변합니다.]

    지금은 아직 약하니까 이런 식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 이를 테면 90번째 퀘스트를 진행할 때쯤이면 인간다움이고, 당당함이고 다 때려치우고 그저 실리를 선택할 것 같다. 그 때 쯤 되면 ‘나에게도 보상 정도는 필요하잖아?’ 같은 합리화와 함께.

    그 날이 오기는 올까?

    파이레스와 헤어진 후에는 그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 90번째 퀘스트가 먼 것 같지만, 크게 먼 것도 아니다. 여섯 번째 퀘스트는 고작 이틀 만에 끝났으니, 이런 게 몇 번만 이어져도 90번째 퀘스트는 금방 오게 된다.

    어쩌면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100의 퀘스트가 끝날지도.

    + + +

    “저 왔어요.”

    카페로 들어가며 인사를 했지만, 누구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손님이 있었다면 눈길이라도 한 번 받을 텐데, 오늘도 역시 카페는 텅 비어 있었다.

    “경찰 대변인은 건물 붕괴의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밝혔으며…….”

    건성으로라도 반겨줄 사장도 뉴스에 빠져 있는 건지, 카페 안이 스마트폰 소리로 가득 찼다.

    “무슨 뉴스를 그렇게 보세요?”

    “아, 너 왔구나. 소식 못 들었어? 점심부터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던데?”

    “저야 TV를 볼 일이 잘 없으니까요. 인터넷 신문을 잘 보는 편도 아니고.”

    “쯧, 남자가 컸으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있어야지. 혹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 정도 일을 모르는 건 거의 병 수준이야.”

    “큰 뉴스예요?”

    “당연하지. 자 봐라.”

    사장이 스마트 폰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넘겨줬다. 액정에는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 기사 제목은 이랬다.

    대구서 원인불명의 건물 붕괴…… 8명 사망

    “흐음…….”

    “어때, 심각하지? 넌 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니까.”

    “……진짜 심각하네요.”

    시내에 있는 원룸 하나가 12시 쯤 갑자기 무너졌다는 소식이었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주위 건물은 멀쩡한데, 그 원룸 하나만 무너져 버린 괴이한 일이었다. 그 앞을 지나던 사람 몇이 크게 다치고, 원룸에 남아 있던 사람은 전부 죽었고, 구조는 실패했단다. 그나마 12시쯤에 사건이 발생한 게 다행이었지, 아침이었다면 더 큰 사고가 났을 거라고 기사는 전하고 있었다.

    “근데 왜 그렇게 표정이 시무룩해?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오호, 그럼 인도적인 관점에서 그 정도로 슬퍼하는 거냐? 프로게이머가 웬일이야.”

    “…….”

    사장이 분위기를 풀려고 했지만, 내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내 반응에 그가 한 발짝 물러섰다.

    “……장난도 못 치겠군.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남의 일은 대충 넘어가라. 원인 불명의 사고라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하나하나 신경 쓰기 시작하면 너만 골치 아파지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람이 많이 죽었나 적게 죽었나로 반응이 달라지는 것도 웃기지만, 몇 백 명이 죽은 것도 아니고 고작 8명 죽은 정도의 일에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감성이라면 하루 평균 42명이 자살한다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건물 붕괴 사건에 관련된 자였기에 굳은 마음을 풀 수가 없었다.

    건물이 무너지는 이유는 뭘까? 가장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부실공사다. 대충 지어도 무너지지 않을 듯한 4층짜리 원룸이었지만, 부패가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 외에는 가스가 누출되어 폭발했다든가 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지. 그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뉴스를 보는 순간, 본능이 기억 속에서 한 남자를 끌어 올렸다.

    골목 안에서 사라졌던 정체불명의 남자.

    그 남자가 건물 붕괴의 주범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또 다른 사람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왔다. 나처럼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퀘스트 속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사람이 있을 것 같았다. 나만해도 헬 파이어를 쓰면 건물 하나 태워 버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물론 그냥 부실공사 일수도 있다. 아직 조사 중이니까, 내 생각을 정답이라고 밀어붙일 수는 없다.

    하지만 이건 퀘스트를 하는 자가 저지른 일이라는 감이 계속 왔다.

    왜 그럴까? 텔레포트를 썼을 거라고 예상되는 남자와 조우하긴 했지만, 이제껏 다른 사람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크게 열정적이지는 않았다. 나와 같은 비상식적인 일을 겪는 사람이 또 있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내가 뭐 그리 특출한 게 있다고 나만 이런 일을 겪는단 말인가. 평행 세계의 ‘나’는 하나 같이 평범한 인물은 아니지만, 세계는 넓고 사람은 많다. 나 이상의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우물안 개구리나 다름없다.

    그래도 내심은 나뿐이었으면 했다. 나 혼자 먼치킨이 되어서, 세상을 호령하고 싶은 어린아이 같은 생각인 건 아니었다. 그저 나 같은 사람들이 많으면 세계가 얼마나 곤란해질까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벌써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헬 파이어와 이프리타의 콤보만 있으면 도시 하나쯤 날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었다. 퀘스트가 진행될수록 나는 더 강해질 게 분명했다.

    그런 사람이 나 말고도 더 있다고? 그런 일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이 퀘스트의 목적이 무엇이든, 참여하는 사람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세계가 입는 피해가 커지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럴수록 내 주위의 사람들이 휘말릴 가능성도 높아진다. 내가 지키지 못할 경우도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열정적이지 않았다. 아예 잊지는 않았지만, 그 가능성을 유보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퀘스트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더 큰 짐을 떠맡을 게 분명해 보였다.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회현의 세계, 지구와 거의 흡사한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며, 이 세계에도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추측했던 것이 오늘 아침이다. 그리고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그 추측에 들어맞는 증거를 보았다.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었다.

    퀘스트를 하는 자가 나 말고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알바 시간 동안 지난 소식들을 살펴보니, 건물 붕괴 사고 말고도 괴이한 일들이 몇 개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사건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의심 가는 일들이 제법 보였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그런 사례들을 찾을 수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닌 모양이다. 적어도 열 명 이상이었고, 그 이상일 확률이 높았다.

    한 가지 이상한 건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정보들이 최근 한 달에 집중되어 있다는 거였다. 드러날 거면 확 드러나고, 숨겨진 거라면 더 숨겨졌어야 했는데, 왜 하필 최근 한 달일까? 퀘스트를 시작한 건 3달 전이었는데.

    밝혀지지 않은 이유라면 대충 짐작했다. 나의 경우를 보더라도, 일단은 숨기는 게 정상적인 일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무력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으니까,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또 정부에서 정보를 통제할 가능성도 있었다. 시내에서 일어난 이번 같은 사건이라면 정보 통제가 어렵겠지만, 진짜 기이한 일들은 기사화되기도 힘들고, 알게 모르게 통제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제야 하나 둘씩 나타나는 건 당최 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능력이 차츰 강해져서 이제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라도 든 걸까? 그런 어린애 같은 이유 말고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남자는 모두 소년이라지만, 그 정도의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에게 퀘스트를 맡겼을까? 그간 시스템이 보여 준 현실성을 생각하면 그 가정엔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텔레포트 남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잠복이라도 해 볼까. 아니면 건물 붕괴 현장까지 찾아가서 조사를 해볼까.

    솔직히 별로 달라질 건 없었다.

    경계를 더 확실히 하는 건 당연하지만,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은 퀘스트를 계속 진행하는 것뿐이다. 때를 대비하여 힘을 더 키우든지, 이 사건의 본질에 더 접근해야겠지. 그럴 수 있는 방법은, 퀘스트를 하는 것 말고는 없으니까.

    딸깍.

    시계의 분침이 하루의 마지막 움직임을 마치며 시침과 만났다. 오늘은 예지도 오지 않았고, 그 탓에 알바 시간 내내 이 생각에 매여 있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퀘스트로 돌아와 버렸다.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족쇄 같은 흐름에서.

    더욱 더 수렁 속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회현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민지'입니다. 회현은 어디까지나 조력자 입니다. 물론 그도 후에는 이프리타와 계약하게 되고, 큰 힘을 가지며, 책임을 져야 하고, 이름도 날리지만, 어디까지나 최초의 인물은 민지고 그 활약상이 회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일단 그 점이 여러 독자분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점이 아닐까 십습니다.

    회현은 주인공이 아니라 이야기가 어정쩡한데, 강민은 주인공이라 그 가운데에서도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 두개가 얽히는 와중에 제가 배분을 제대로 못한 게 독자분들께 혼란을 준 원인이겠지요.

    그래서 61편 부터 부분부분 좀 고쳤습니다. 큰 흐름은 바뀌지 않았지만, 저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문장을 추가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가 더 깊어졌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댓글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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